인간의 굴레에서 1 p. 117

한 가지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 혼자서 성단소(聖壇所)를 지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교생이 의례에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아들의 견진례를 보러 온 학부모들도 있다. 이들에게 절룩거리며 걷는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되자 갑자기 굴욕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 었다. 대성당의 드높은 천장 아래 하찮고 작은 존재가 되어 성단소를 향해 절룩절룩 걸어가면서, 그는 뚜렷한 의식으로 사랑 의 하느님께 자신의 불구를 제물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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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 p. 62

 어느 날, 그는 행운을 만났다. 레인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 이트를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삽화에 사로잡혔다가 다음엔 마법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다른이야기들도 마저 읽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판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주변의 생활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사람들이 두세 차례 불러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필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독서 습관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필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서 나날의 현실 세계를 쓰라린 실망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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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재밌다. 한 챕터마다 쌍둥이가 영혼을 요리하기 위해 가상현실을 설계하는데 이 설정 자체가 기발하다.
악이 있으면 선도 있는 법인데 시리즈로 나와 좀 더 세계관이 확장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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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왕국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9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 박원영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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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진실에 다가가기까지
노련한 형사마저 길을 잃게 만든 광기의 왕국. 환자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었던 라두너 박사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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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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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인생으로, 존재의 끝으로
좋아하는 책을 오랜만에 오래도록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때는 그저 재밌게만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삶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라는 키치 왕국이다. 특별히 정의할 수 없지만 서로를 곁에서 붙잡아둘 수 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힘. 여섯번의 우연이 만들어낸 바구니 속의 작은 그녀와 문 앞의 남자. 토마시가 문을 열어준 그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한번도 집 문을 제대로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던 여자가 자신을 가두기만 했던 문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인생으로 이어질 문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한번도 여자들에게 자신의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던 남자는 이 여자에게만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버린다. 죽어가는 까마귀를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그녀, 존재의 유한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레자를 그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으로 느꼈다.
소련의 무자비한 폭력, 도청, 정신 통제와 고통받는 사람들. 지식인들의 뜻은 강압적인 폭력에 난도질되고 계급은 소련의 주요 통제수단이 된다. 토마시는 지식인 중 하나였지만 조작된 논리에 의해 추락하고 창문닦이 노동자가 된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삶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테레자다.
사실 창문닦이를 전업으로 삼으며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집에서 계속 그를 바라보며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하는 테레자의 눈을 아주 효과적으로 피할 시간운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귀농하여 테레자와 함께 살 것을 선택한다.
테레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토마시의 여자들,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어머니, 자신의 삶에 대해. 그녀는 정신적으로 무너질 때 추락에 대한 유혹을 느낀다. 자기파괴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삶을 버틸 수 있는 이유도 역시 토마시 때문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지독한 말을 뱉을 때도,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이 차오를때도, 서로의 곁을 떠나 방황해도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그 긴 세월동안 고통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체념하고 삶을 받아들였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키치 왕국은 프란츠와 사비나의 것과는 다르다. 사비나는 조국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한다. 가능한한 멀리 떠나고 싶어하며 소련에 대한 시위나 대항은 그녀를 예술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반면 프란츠는 이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시선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인물이다. 전쟁의 잔혹함보다는 그러한 탄압에 맞서 싸우는 자신의 이상적인 겉모습에 도취한다. 너무도 다른 둘이 만나 사랑을 할 수 있다니...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사랑-나와 전혀 다른 상대방에게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 유형-은 이 인물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토마시나 테레자나, 사비나나 프란츠나.
단 한번 사는 인생이므로 지금 한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선택을 내린 존재의 끝은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모든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 인간의 자기합리화가 선택의 경중을 정할 수 있는 것인가?
조국이 탄압에 의해 무너져가는 시대에서 토마시는 계층하락을 담담히 견뎌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체적인 사랑에 자신의 삶을 내맡긴다. 테레자는 토마시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아발전과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 사비나는 조국의 현실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도피하지만 뿌리를 잊을 수는 없다. 프란츠는 이상에 눈이 멀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들의 삶이 잘됐다거나 잘못됐다는 것은 논의할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그저 각자의 최선의 선택을 한 것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사랑을 하느라 상대방에게 잠시 자신을 내보이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한것이다. 선택이 존재를 만들어나간다. 그 존재의 끝은 가볍고도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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