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한데도 어느것하나 흐트러짐없이 조화롭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공작이 백치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는 누구보다 선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무언가 그 안에 내재돼있는 열정이 튀어오르게 되면 뛰어나던 통찰력이 붕괴되고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그를 아무말이나 떠드는 백치로 만들어버린다. 공작의 열정은 때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으로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거진 다 실패로 돌아가버린다. 그 단계까지 왔다면 공작은 이미 사람들에게 백치로 낙인찍혀버리고 거의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가 스위스에서 요양을 했을 때 만났던 불쌍한 소녀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봐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인류애적 사랑을 보여주고 공작을 더욱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적 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을 읽고보니 복선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는 깊고 넓은 사랑이 깔려있다. 물론 레베제프 같은 비열한에게 짜증도 내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이 사람들을 이용하고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파괴된 인간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사랑한다. 스위스의 그 소녀도 나스따시야도 모두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고통을 받았다. 그 원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을 받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 가늠할 수 없다.

공작은 그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위로했고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상처에서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그 자체의 본성인 사랑이 그를 해치는 칼날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그를 다시 백치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때로는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오직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타인에게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너무 타인에게 집중돼 있었고 정작 자신을 그처럼 사랑하지는 못했으며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그가 다시 백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스위스의 소녀는 자기희생적인 수용으로 고통을 감내하여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견뎠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스따시야가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꼭 한없는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읽는 내내 나스따시야를 동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실 자신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스따시야가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은 깊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다. 본인이 더럽혀졌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혐오해도 된다는 자기파괴와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는 공격성이 동시에 발현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오직 그것만이 그녀 내면의 축이 되어 자신을 지탱하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이 버거웠던 것이고 그에게서 도망치면서도 구원을 바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스따시야가 몰랐던 것은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독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공작의 순수한 사랑을 오염시키고 공작마저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공작이 자신의 독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어 그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구원의 구심점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있었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동시에 타인도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큰 에너지와 통찰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기성찰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오래도록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나스따시야 같이 상처로 너덜해진 영혼이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작은 그것을 알고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녀 내면에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의 선택은 비극으로 종결됐다.

그의 선함과 고결한 사랑이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쓸쓸하게 체감하게 된다.

사실 난 공작의 선택에 대해 예브게니처럼 분노했고 그를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예브게니가 공작에게 구구절절히 비난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공작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백치라고 단정지어버리는 편견적이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사랑하는 아글라야를 버리고 나스따시야에게 갔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로고진과 공작이 예수의 그림을 보는 장면도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공작의 사랑은 의도적이라고 생각될만큼 예수의 운명을 따라간다.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견디면서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켰던 그처럼 공작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정신은 부활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이 소멸됐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그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터널에 들어간 것일 뿐이다. 세상을 여행한 대가가 이렇게 잔혹할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 구원의 길은 열려있다. 그가 그 길을 걸어 평화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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