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이야기 - 다윈에서 뇌과학까지 생물학의 모든 것
김웅진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생물계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ent'존재


데본기, 캄브리아기, 4,800만년 전 같은 단어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우연에라도 마주치기 어려운 이름들. 아침, 지하철, 허기, 늦은 저녁은 데본기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황망함이라고 해야할까. 생물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이해한다는 듯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코끼리와 개미는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것 외에 서로 닮은 데라곤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전자들은 상당히 서로 비슷합니다. 154> 늦은 밤 열한 시, 생물학 이야기라는 책을 들고 개미의 몸으로 코끼리를 이해해보려는 무모함을 응원하는 말 같다. 코끼리 발등에 올라서 코끼리를 찾게 되는 우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생물학을 감상한다는 기분(?)으로 시대적 순서에 따라 자유롭게(?) 쓰겠다는 말을 남기며 서문을 떠난다. 이것을 이루겠다는 듯 목차는 '생물 이야기', '진화 이야기', '생명 이야기', '생물학과 사람 이야기'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라고 붙이는데. 시종일관 높임말은 흡사 동화책 읽어주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생물(학)이라면 중학생때 완두콩과 린네를 떠올리는 것이 다인터라 어떤 것을 이야기해도 처음 만나는 아이처럼 신기한 까닭이다.

 

' 어류의 시대'라고 불리는 데본기의 한 시점인 약3억 7,500만 년 전, 어류로부터 최초의 사지동물인 네발 달린 물고기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바다 속에는 길이가 2m~5m나 되고 강력한 이빨로 무장한 거대한포식 어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지요. 이빨과 갑주의 군비경쟁과 살벌한 포식전쟁을 피해 누군가가 육지로 탈출하는 것이 시간문제였던 겁니다. 75


이 런 대목을 읽을 때, 옆에 그림이라도 있었으면, 거기에 노련한 성우의 목소리까지 있다면 박진감 넘치는 데본기의 한 장면. 그건 것 없더라도 다큰 성인 남녀는 이 정도 깔아 줬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지에 네발 달린 물고기가 나타난 심정을 말이다. 우글거리는 포식 어류를 피해 뭍으로 나오려는 마음을 미생으로부터 이해하자. 물에서 뭍으로 다시 공중으로 나를 살려놓고 싶은 생물 진화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주제의 책을 만날 때, 다른 언어를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전달, 깊은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한 앎의 다른 구간이 있음을 알기 위함아닌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읽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별은 캄브리아기에는 아직 그 별로부터 빛이 지구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별들을 그때에는 더러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욕지의 바위 아래나 그늘지고 습기 있는 곳에서는 조류가 이끼처럼 자라고 있지나 않았을까. 혹시 작은 연체동물들이나 절지동물들이 그 조류 속에 숨어 있지 않았을까. 87


캄브리아기, 발음도 어려운 이 시기에는 별빛이 없다. 아직 그 별로부터 빛이 지구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 시간을 이렇게 당겨 돌아가면 이곳은 별빛이 없는 깜깜한 하늘이다.


만일 생물계가 강호의 무림과 같고, 생물들이 기발한 생존기수로가 싸움의 비급을 개발하고 익혀온 무예의 고수들과 같다면, 그 고수들이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하며 연마한 무예와 내공을 체계적으로 알아내는 것이 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생물들은 수많은 비밀과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외형적 다양성과 행동, 생태적 분포는 모두 생물의 기원과 과거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111


진 화를 설명하는 장에서 강호와 무림을 부른 것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수한 개체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계파의 고수로서, 어느것 하나 만만치 않은 시간을 지내왔다는 역사를 부여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정도 되면 고리타분 혹은 어려움이라는 생물학의 이미지는 날아가고 없을 것 같다. 이 뒤의 설명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코드 역시 그렇다며 팔레스타인 사람을 부르고 북미 원주인들, 남북의 대치에 대해 일침한다. 평면적인 관찰로 알 수 없는 인과적 연관성이 있다고 꼬집으면서 앞면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 외 다른 수많은 면을 만나야 함을 생물학을 들어 설명한다.


생물과 무생물은 원래 하나였으니 생물학과 물리과학이 결국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만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255


이 쯤되면 거의 종교적인 통찰이다. 알고보니 다윈이 인간에 대해 통찰한 것 역시 그렇다. 다윈은 <인간이 생물계의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net'존재라고 겸손히 표현287>했다고 한다. 내려온 존재. 유달리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받아 온 것 뿐이라는 설명은 인간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어서 다시 한 번 다윈을 인용하는데. 다윈은 <"약하고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악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다윈은 진화의 방향성이나 목적성을 인정한 바 없습니다. 진화에는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이죠. 288> 진화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마지막은 '발전된', '더 나은'으로 오해하는 '진화'를 일축한 모양새다. 악하려고 특별히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다윈의 선언을 정면으로 맞서는 기분이다. 약하고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산다, 이곳의 하늘은  캄브리아기 때와 다른 이유로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의 생물학은 오늘의 밤하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후의 독자는 오늘의 난투전을 어떻게 읽을까. 인간이 생물계의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net'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눈이 유일하게 있었던가 하면, 인간 외의 가치를 지표삼아 인간-아닌 것으로 내려다 보는 눈이 빈번하게 많다. 한낱 미물이라도 그가 이뤄온 역사는 쉽지 않았으므로 뜻밖에도, <생물학 이야기>라는 체를 통과해 마지막으로 받은 말은 '겸손'이라는 단어인데. 노력하지 않아도 악해지는 삶에서 '겸손'이라는 말을 소화할 수 없게 된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새해가 이틀 앞이다. 딱딱한 떡을 오래, 끓여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2-17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비노 우주만화(코스미코미케) 보고 아, 이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구나 대오각성했던 제 경험;...생물과 진화론을 들여다볼 때 정말 `겸손`해질 수 밖에 없더라는....나 또한 미물인데!

봄밤 2015-02-17 09:42   좋아요 1 | URL
대오각성...(ㅋㅋ)!!
문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가 `겸손`을 이릅니다. 생물과 진화, 뿐만아니라 과학 전반에 대한 교양서는 얄팍한 인문학 책보다 단단한 읽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자주 남기지는 못하지만 잘 보고 있습니다. Agalma님 건강한 사유 응원합니다. 연휴 복되시기를요!
 
[eBook] 나의 아름다운 개는
김명신 지음 / 기린과숲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정도가 심한쓸데없는질이 떨어지는"

긍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세 가지 꾸밈은 모두 접두사 '-'가 갖고 있는 뜻이다찾아보니 대략 세 갈래로 나뉘어 쓰이는 것 같다그러고 보면 '-'처럼 많이 불리는 이름도 없을 거니와, '-'처럼 뜻 모르고 비하되며 낭비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얼핏 살피면 동물 ''에 기댄 듯한 제목나의 아름다운 개는』. 그러나 이곳에는 하이픈이 빠졌다동물 개 그림이 표지부터 그려져 있지만 그건 개라는 동물을 그린게 아니다. '정도가 심하고 쓸데 없고 질이 떨어지는 것'들을 개라는 동물의 얼굴에 빌려 낸 거라고 읽고 싶다그렇다면 하이픈 없이 아름답고 순진한 눈망울에서 왜 '-'을 붙여 어둔 곳으로 내려가는 걸까. 그늘 깊은 곳에서 뒹구는 하찮은 것들을 살피는 이유가 말이다. 이곳은 '-'같은 곳이 그렇지 않는 곳을 잠식하는 세계. 목소리는 묻는다. 한 뼘 남은 곳의 참됨을 이르는 시는 너무 많지 않니개-같은 걸 시로 부르면 안되니여기는 동물 개와 접두사 '개-'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말놀이의 세계다.

 

'검은 개들이 분명한가꽃을 꽂은 검은 개들이 분명한가엉덩이에 꽃을 꽂고 꼬리를 노래하는 검은 개들이 분명한가오줌을 누지 않는 검은 개들이 분명한가개들이 분명한가부분여기 '분명한가'의 반복은 '검은 개들이 맞느냐'는 의심의 반복이다대답은 없고 분명한지 물으며 검은 개를 살피는데, '검은 개'가 상기시키는 두려움손톱만한 흰자의 무서움매끈한 어깨를 확인하려는게 아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은 우스꽝스럽고 수치를 모르는 형태가 맞느냐는 거다. '엉덩이에 꽃을 꽂고 꼬리를 노래'하며 오줌을 누지 않는가. 그 개는 분명 짖지도 않을 것이다. 오줌을 누지 않으므로 영역이 없다'꽃은 바치기 위해 피는 거지꽃은 침을 뱉기 위해 지는 거지말미에 가면 좀 더 정확해질까. 이곳에 쓰인 꽃은 아름다운 일에 초대되는 속성이 남아있지 않다. 꽃이 피는 이유를 그 자체의 완성이 아니라 수단으로 '바친다'는 뜻에 의해 재단했다. 정도가 심한쓸데 없는질이 떨어지는의 '개-' 의미를 '검은 개'에 완전히 심은 것도 모자라 '꽃'을 더해 조롱한다. 불온한가그러기에 더없이 쉬운 세상이다. 그래도 춥지 않았던 기억이 있잖아. 그러나 추위만큼 괴롭혔던 더위를 따뜻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불온하다 


개들이 분명한가」는 '개-'에 대해 쓰인 시 중 가장 기분 나쁜 시다. 이 후로 시는 바깥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도 '개-'를 읽을 수 있다. '개-'는 개살구, 개떡처럼 원래의 상태를 나쁘게 설명하는 속성이 있다. 살구와 떡으로 온전하고 싶었으나.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의 논리정연을 새까맣게 다 적을 필요는 없다. '흙 산에서 보면 참 좋았어고만고만한 집들이 비를 맞을 땐 붉은 기와들이 더욱 붉게 피어났지축축하게 젖은 기와를 밟으며 도둑 놀이를 하던 그 시간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습니다부분시의 마지막은 '오늘 집 값이 매겨졌어,' 다. 뒤를 부러 잇지 않는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다. 때로는 쉼표 하나가 긴 말을 담고 있으니.


'개-'가 있는 곳은 우스꽝스럽고 수치를 모르며 조롱한다. 온전치 못하고 까닭 모르게 밀려난다. 안부를 묻듯 그곳의 날씨는 어떨까. '춥다→→간절하다←←따뜻하다// 내 말의 눈망울이네첫눈은 하얗네어린 노동이 살고 있네부모는 틈을 잃었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부분'춥다'와 '따뜻하다' 사이를 '간절하다'라고 적는다. 국경에는 눈이 내린다. 길이 끊기고 다시 한 번, '간절하다'는 이렇게 자리를 매긴다. '죽을 것만→간절하다←살 것도// 생은 첫눈만 내리고/ 신은 첫눈만 달라하네'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부분. '죽을 것만'과 '살 것도'의 뒤에 생략된 '같다'는 말을 '간절하다'라는 뜻으로 바꿨다오빠는 취한 말을 끌고 국경을 넘는다. 동명의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왔다. 오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생계가 막히고 겨울이면 길을 에우는 눈보라, 말조차도 술을 마셔야 견딜 수 있는 혹독한 추위에서 남매는 밀수를 하기 위해 떠난다. '살아남는다'는 말을 뱉지 못한다. 그 말을 지우고, '간절하다'라는 말로 채웠다. 이곳의 날씨는 간절하다. 여기는 '개-'라는 말로 피폐를 견뎌야 했던 곳이다. '개-'라는 이유로 원래 갖고 있는 뜻을 버려야 했던 곳이다. 시집 『나의 아름다운 개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입에 꿀꺽!
카이오 히터 글, 로랑 카르동 그림 / 느림보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 오리 일곱 마리가 연못에서 참방참방"


그림책은 '아기 오리 일곱 마리'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말해볼까. 아기 오리는 '어미'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참방참방, 이라는 귀여운 말에는 어떤 근심도 없이 태평하다. 표지에서는 일곱 마리 아기 오리는 똘똘 뭉쳐 수면 사방을 내다보는데, 서로를 제법 단단히 지키는 것 같지만, 위험은 그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악어는 수면 아래에서 뽀글뽀글 숨을 쉬며 한눈에 아기 오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그림에 "한입에 꿀꺽!"이라는 (!느낌표까지 가미된) 제목. 긴장을 이렇게 단순한 장면에 한 줄의 글귀만으로 이뤘다.



책을 작은 손으로 집어 든 아이가 있다. 자신처럼 작고 귀여운 아기 오리를 바라볼 너덧 살의 아이. 이 나이 아이의 내면은 '초자아'라는 새로운 심리적 구조를 준비한다. 초자아는 자아를 관찰하고, 명령을 내리고, 판단하고, 처벌의 위협을 주는, 부모와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일까. 동화에는 '어미'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직 연못과 아기 오리 일곱 마리와 거대한 악어 바나베만이 전부다. 네 살배기는 자연히 아기 오리 일곱 마리에게 자신을 이입하는데. 아기 오리들의 모습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세계를 이제 자기의 것으로, 부모와 분리된 '나의 세계'로의 인지를 돕는다. 아기 오리들이 부모를 찾거나 보호를 바라지 않고 엄청나게 큰 악어와 대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내가 아기 오리라면, 이라는 가정을 설 풋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커다란 악어는 '바나베'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아기 오리 일곱 마리는 첫째, 둘째, 셋째라는 서수의 호칭만 있다는 점이다. 아직 '이름' 하나에 자신 하나를 같이 작동하지 못하는 일을 이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기 오리 한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리나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이 생겨서 분간하기 어렵고,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악어에게 먹히는 순서대로 불리는 막내, 여섯째 등의 숫자일 뿐이다. 책 표지를 다시 볼까. 오리 일곱 마리가 하나로 모여 있는 그림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오리, 성장하게 될 큰 오리가 겹치는 것 같다. 결국, 일곱 마리는 한 마리 큰 오리 이전의 모습을 뜻하고 성장하지 못한 미숙한 아이가 그리게 될 어엿한 큰 오리의 '상'을 암시한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분이 종잡을 수 없고 여러 개의 꿈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아이의 특성이 일곱 마리의 오리에서 각각 나타난다. 혼자서 참방참방 헤엄치는 걸 좋아하는 막내 오리, 허둥지둥 도망을 못 쳤던 여섯째 오리,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다섯째 오리, 멋진 이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넷째 오리. 악어 바나베는 여섯째 오리까지 순탄하게 잡아먹고(한 입에) 나머지 오리는 힘으로 잡아먹는 게 어려워지자 여러 가지로 변신을 한다. 특히 배트맨으로 분장하고는 '나와 함께 바나베를 잡으러 가자'며 꾀는 부분은 놀랍다. 배트맨이라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는 파탄으로 흘러, 이제 아기 오리는 여섯 마리나 잡아먹혀, 마지막 남은 새끼 오리는 울면서 바나베에게 빈다.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는지 당뇨병이 있다며, 뼈마디도 욱신거린다며(웃음) 잡아먹지 말라고 애원한다. 이렇게나 티 나는 거짓말, 어른의 말을 잘 담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인다. 아기 오리 일곱마리가 한 마리의 큰 오리가 되기까지. 일곱 개의 수난 일곱 번의 좌절, 일곱 번의 역할을 겪어야 한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지. 자,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만들까. 하나 남은 아기 오리는 이 위험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책을 다 덮은 후, 아이는 일곱 마리가 한데 올망졸망했던 모습에서 늠늠한 큰 오리를 하나를 발견하게 될까?


*네이버 지식백과_심리 성적 발달 단계, 심리학 용어사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신화들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며, 게다가(이것이 그의 주된 초첨은 결코 아니었으나) 모든 신화들이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였다. 즉, 신화의 목적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한편, 이 세계의 문제와 모순들을 마술처럼 해결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화적 생각은 항상 그들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진전된다...신화의 목적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문화로서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우리 자신과 우리 존재 사이의 갈등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12> 




이해할 수 있을까.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문화'로서의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설명을. 살 떨리는 만감의 교차를. 여지껏 사라진 적이 없으니 신화 있던 오늘은 언제나 이해하기 어렵고 살기 만만찮았던 것 같다. 신화의 존재가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있나. 싶으면서도 신화를 읽으며 조금 더 나은 날을 갖고자 하는 긍정의 태도를 읽는다. 이제 신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에 존재하게 되었다. ex_아이폰의 작동 원리, 엑티브 엑스의 존재 이유, 중세에서 날아온 듯한 어느 항공기 일가와 현 정권 (이건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과 함께 이해 불가의 어깨를 견준다. 


그렇다는 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신화소'라는 특유의 단위를 통해서 해석해 왔던 '신화'에 대해 정신분석을 적용한 책이 나왔다. <신화와 정신분석>. 중국 일본 한국은 물론, 그리스,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화를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한다. 주몽에 대한 정신분석은 다음과 이렇다. (이런 건 생각도 못했다)


주몽은 어머니로부터 극진한 돌봄을 받아 자존감과 거대자기가 잘 형성되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경우 자신을 냉대하는 상징계의 요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어렵다. 주몽은 어머니 외에 친밀관계를 맺은 여인의 존재가 모호하다(별거). 그의 삶에 만족을 주고 정신에너지를 보충하는 데 필요한 아니마(여성에너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의 관계가 신화에 부재한 것은, 주몽(당대 한민족)의 모성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컸음을 암시한다. <신화와 정신분석, 583>


이 책에서 흥미로운 건 이젠 새롭지도 않는 동서양의 차이를 신화에서도 발견하고 해석하는 데 있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에서도 동양의 신은 선대의 신과 싸우거나 대립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승, 생성되는데 이에 비해 서양의 신은 '살해'라는 과정을 통한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을 담은 창세신화는 동서양의 차이가 매우 확연하다. 중국의 창세신 반고는 저절로 노쇠해져 죽은 뒤 그 몸에서 자연만물이 자연스레 생성된다. 일본의 창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성관계를 통해 국토와 태양, 달, 바람 등을 창조하며 선대의 신들과 대립해 싸우지 않는다. 한국의 창세기에서는 우주와 만물이 최초 형성되던 때부터 미륵·천지왕이 존재해 우주와 인간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데, 이 신들이 자연만물을 직접 창조하지는 않는다. 

(...)

그리스의 창세신 우라노스와 게르만족의 태초신 이미르는 모두 신세대 신에게 살해된다. 북유럽의 오딘은 형제들과 연합해 태초신인 거인 이미르를 살해하고, 이미르 몸의 각 부분을 절단하여 하늘·대지·바다·호수 등의 자연을 창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만신의 어머니'거인 티아마트가 젊은 신들에 의해 살해당한다.<신화와 정신분석, 564>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동양 특히 한국에서 왕 살해·아버지 살해는 유독 반인륜적 행위로 해석되어, 그 흔적이 말소된 상태"라고 하면서 "왕 살해 요소에 때한 이런 철저한 검열·부인·억압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언급했듯이, 억압된 무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비롯된 신경증적 과민방응일 수도 있다." p. 568. 며 설명을 잇는다. '왕 살해'를 찾아 볼 수 없더라도 '왕 살해' 위협이 없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제일대사건'으로 지목한 묘청의 난을 기억한다. '왕 살해'가 왕만을 처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왕과 함께 하는 지배 체제 전부를 전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물론이다.

 

힘 없고 약하고 작고 가난한 것은 온전하게 존재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보통'처럼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필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는 사회는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소식을 전한다. 흡사 '영아 살해'를 떠오르게 하는 소식들에서. 직접적으로 가해하는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더 어리고 약한 것의 억압을 부추겨야만 하는 세계의 잘못을 생각하고 싶다. 여기서 '왕 살해'를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상상력이며, 필요한 물음인지 돌아본다. 신화 읽는 것을 고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계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라는 본문의 말은 붙이지도 않겠다. 그저 이곳을 이해할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래된 신과 신들의 싸움과, 영광을 읽는다.


덧붙여 신화 읽는 것이 저 먼 곳을 비롯해 오늘을 읽는 시도라고 한다면, 문화를 아는 것은 오늘을 반영하는 거울에 눈 맞추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 두 번 읽고 싶은 책이다.


긍정적 문화는 내일에 대한 약속을 현시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현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오늘의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잠시 재충전하며 쉬려고 들어가는 영역이며, 결국 "생존의 적대관계들이 무마되고 평정될 수 있으며, 외관상 분명히 통일되고 자유로운 영역이 문화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문화는 사회생활의 새로운 조건들을 긍정하거나 또는 감춘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5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1-2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저 <황금가지>에도 전임사제를 죽임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황금가지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죠. <전>의 세계는 스스로 속죄양이자 파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인간 욕망의 괴이한 이종교배 속에 분열적인 양자역학 결과들이 너무 많이 파생되니...(모든 걸 누리고 배울 수 있는 최상위층들이 오히려 더 막되어먹은 부분들만 봐도;;)....우리 고뇌든 고통이든 줄어들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동서양을 나누기도 어려운 지점.

봄밤 2015-01-26 10:33   좋아요 0 | URL
칼비노! 칼비노를 읽어야겠습니다. 반가워요 Agalma님.
<황금가지>로 풀어주시니, 그에 대한 댓글을 달 수가 없네요.
`양자역학`이라는 말을 이렇게 듣다니요.
고뇌든 고통이든 줄어들 순 없겠지만 점심만큼은 맛있게 드시길요!

AgalmA 2015-01-26 11:4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가워요^^ 방금 칼비노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오는 길인데...이거 오버랩들이 재밌습니다 ㅎ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다고 우리는 말했다. 이 사랑의 침묵의 충만함은 죽음의 침묵에까지 건너간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침묵에 의해서 이미 죽음으로까지 뻗어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사랑에 한계를 짓고 분명하게 해주며, 사랑에게 사랑에 적합한 것만을 주는 것은 말이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사랑은 단순한 하나의 샘물과 같다. 그 샘물이 둘레에서 꽃들이 자라나는 자갈 바닥을 뒤로 하고 이제 하나하나의 물결과 함께 냇물로서 혹은 강물로서 자신의 성질과 모습을 변화시켜가다가 마침내 가없는 대양 속으로 흘러든다. 그 대양은 미성숙한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참으로 단조로워 보이지만, 위대한 영혼은 그 해안에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다."(발자크)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까치. 110~111쪽




신림의 어느 책방에서는 책표지를 싸준다. 투명한 비닐을 잘 드는 가위로 재단을 하는 동안 손님은 그럴 듯한 이유로 조금 더 서성여서 좋다. 아쉬워 서점 안쪽을 한 번 더 다녀와도 좋고 표지를 잘 싸는 주인의 손을 유심히 보는 것도 좋다. 책 안쪽에 붙은 테이프는 처음에는 투명하게 붙지만 나중에는 노랗게 떠 지나간 시간을 짐작하기 좋다. 


<침묵의 세계>는 신림의 어느 책방에서 왔다. 곁에 둔지 일 년이 지났으나 읽은 부분과 읽지 않은 부분을 헤아리기 어려워 언제나 낯설게 펴보는 책이다. '가까이 두고 싶지만 가능하면 끝까지 읽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해가 될까. 언제나 새 책처럼 두려는 마음은 읽은 부분을 잊고 읽지 않은 부분을 헷갈려 놓기로 했다. '침묵'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토록 두껍게 쌓인 말을 들여다 보면, 침묵에 대한 이해를 앞질러 사랑에 대한 이해를 전해 듣는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려울 것도 모를 것도 없는 말 앞에서 마음을 절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면, 말이 침묵보다 불완전 함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침묵보다 위에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랑은 말을 통해서 구체화되며, 말을 통해서 진리 위에 서게 되며, 말을 통해서, 오직 말을 통해서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된다'


고백하는 말은 우리 말이 없었던 날들과, 말을 주저하는 날들에는 언제나 조금씩 사랑 없었음이다. 말이 필요한 곳에 침묵이 있던 까닭은 침묵이 쉽고 침묵은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극진한 형태는 침묵일 것이나, 사랑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전해질 수 없다. 바다 속이나 하늘 위에는 인간의 말이 닿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말이 침묵과 같은 형태가 된다. 인간이 사랑을 약속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이 더럽고 위험한 땅위에서만이다.


새해 선물로 책을 세 권 선물 받았다. <너희는 고립되었다>세 권. 기륭전자 조합원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집이라는 설명이 간단하다. 사진이라는 '침묵'을 사진집이라는 책으로 엮어 그것은 하나의 '말'이 되었다. 사진집은 보통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사진집은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분들이 직접 보내시는데 내일부터 오체투지를 또 하기 때문에 오늘 보내신다는 말을 들었다. 선물을 주신 분은 한 부는 내가 갖고, 두 부는 꼭 전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책은 내일 받을 수 있다. 그 내일은 누군가의 오체투지가 시작되는 날이다. 오체투지는 불교에서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삼보께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절의 이름이다. 신께 바치는 기도는 깊고 은밀해서 기도는 침묵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리는 기도는 아스팔트 위에 있다.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무한히 낮추면서 오체를 바닥에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이 더럽고 위험한 지면 위에서만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만 이곳에 말이 모여야 함을 온 몸을 당겨 크게 쓸 수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말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을 아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뷰리풀말미잘 2015-01-07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를 싸준다니.. 저 같은 책 결벽증 환자에게는 감동이네요.

봄밤 2015-01-07 18:25   좋아요 0 | URL
직접 싸보셔도 좋아요. 어렵지 않으니 두 번째로 아끼는 책부터 해보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