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라는 악몽 오늘을 비추는 사색 3
마키노 마사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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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렌트를 읽어본 적이 없거나, 아렌트를 읽었는데 이해할 수 없었던 이에게 추천한다. 우선 분량이 매우 얇고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는 의지가 보인다. (한나 아렌트 소개를 반페이지로 끝낸다) 다음 책을 찾게 하는 개론서로 만족스럽다. 지식을 편집하는 측면에서 아렌트를 읽는 철학자의 구슬 꾐의 결과물, '책'의 유용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2. '전체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를 해체하는 제국주의의 태동과(그렇다면 국민국가도 알아야 한다. 국민국가는 계급과 계층으로 구성된다)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던 19세기를 알아야 한다. 이 포괄적인 세계 정세를 정리하면서 1장 반유대주의의 기원을 들어간다. 


3. 그래서, 전체주의가 왜 위험할까? 

인간관계를 이루는 공통 세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서 제대로 된 판단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95p


4.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제대로 된 판단은 어떻게 이뤄질까? 

바로 공통 감각을 통해서이다. 공통 감각이란? 


사람들에게 공통된 감각, 다시 말해서 상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면서 선악을 재는 판단력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타인은 외부에 있는 사람 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안의 또 한 명의 나, 상상 속에서 타자의 모델이 되는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 93p 


인간을 인간으로서 성립시키는 것은 "공통 세계"이다.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혀낼 수 있다. 94p


5. 전체주의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자유로운 "운동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154p 

 

6. 전체주의, 공통 감각, 공통 세계의 설명을 지나오며 서문을 다시 보면, 전체주의를 초래한 다양한 요인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민족, 인종 간의 대립,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이 진전된 지금 전체주의가 모습을 바꿔 다시 등장할 위험이 오히려 커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빠진 단어가 없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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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욕망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기 위해 오늘을 비추는 사색 1
우메다 고타 지음, 노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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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열풍 속에서 드디어! 나도 쇼펜하우어를 읽게 되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책 대부분은 그의 아포리즘을 엮은 책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이 요구하는 짧고 강렬하면서 인생에 필요한 조언을 쇼펜하우어의 이름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좋다 나쁘다 한쪽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전에 이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은 아닐까 싶다.


그중에 까치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출간되었다. 일본의 철학자들이 세계적인 대표 철학자를 쉬운 언어로 소개하는 책이다. 가급적 쉬운 언어로 철학자의 생애와 철학을 개괄하는 주문을 받았다고. 1장에서 철학자의 생애를 살펴보고, 2장은 쇼펜하우어의 구도철학을 중심으로, 3장은 처세 철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4장에서는 현실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알아본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가족의 업을 잇기 위해 사업가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나, 학문의 즐거움을 깨닫고 말았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시기에도 일을 하고 부를 쌓는 삶과 학문을 수행하는 삶은 대척점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결국 근대 시민으로 이상적인 삶을 살도록 부모님의 부름을 받아 공부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아버지가 급사한다.

이 사건은 쇼펜하우어에 깊은 절망을 남기는데, “아무리 유복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도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약속과 학자의 길에서 갈등을 겪던 중, 어머니의 결단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1/3을 받아 비로소 돈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마침내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철학자의 삶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젊은 시기와 노년으로 나뉘어 살필 수 있다. “젊은 쇼펜하우어는 속세에서 벗어나 의지의 부정이라는 무의 경지를 추구하고, 몸을 던져 완전한 자기 포기를 지향하는 구도 철학을 제시했다. 한편 만년의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이라는 진짜 의식을 모든 사물에 응용하고, 욕망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속세를 당당히 활보하는 노련한 처세술을 담은 처세 철학을 전수했다.” 이런 시간성에 유의해서 두 가지의 철학을 섞지 않고 각각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삶의 의지 때문에 괴로운 것이 바로 인생,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쇼펜하우어에게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의지”이다. 흔히 똑똑하면 사는 데 좀 더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지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놓는다.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일평생 사람이 욕구에 쫓겨 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삶의 의지”라고 설명한다. 이런 괴로움 속에 사람들이 찾아야 할 것은, 다른 존재도 나와 같은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에서는 “의지”와 신체 사이에 인과성이 없이, 의지와 신체를 늘 함께 놓고 생각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의지가 원인이 되어 신체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생각을 명확히 부정했다.”62p 이어서 “표상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특권적 표상은 “나”의 신체이다. 활동하는 “나”의 신체만이 의지이자 표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의지만이 실재한다” 또는 “세계가 내 의지에 따른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66p 고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의 글을 고맙게 읽는 것이 이상한 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독자로 지내는 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최단 시간에 타인의 사상을 흡수하려고 들지만, 그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 96p 라는 대목에서는 다른 사람의 글과 영상과 소식을 보느라 하루가 다 가는 일상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어떤 때보다 많은 것을 읽지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점점 소거된 일상을 이르는 것 같다.


더불어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글을 고맙게 읽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쇼펜하우어의 뜻이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된 것.” 96p이라고 이야기 한다.


괴로운 것이 당연한 것이 인생이고, 인생에 대해 과격해 보이는 아포리즘과 염세주의적인 말을 남긴 쇼펜하우어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푸들을 키우고 사랑했는데 특히 애정을 쏟은 갈색 푸들에게는 “부츠(작은 아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자신이 키운 다른 모든 푸들은 “아트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트만”이란 인도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모든 영혼의 원천인 “참자아”를 뜻한다고. 94p 푸들을 보며 작은 아이와 참자아를 생각한 쇼펜하우어를 생각하며 “책 따위를 읽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책과 더불어 지금 내가 보고 소비하는 모든 것을 치환해 보니, 혼자서 생각하고 나를 움직이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기타: 참고로 쇼펜하우어의 “목적 없는 의지”가 “맹목적 의지”로 번역될 때가 많은데, 이처럼 맹목이라는 말을 “무목적”으로 즉각 해석하는 것은 시각 장애인을 멸시하는 차별적인 태도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에는 적절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66p 라는 대목을 적어둔다



::까치글방 서포터즈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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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예술 토머슨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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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웃어서 당황했다. 웃긴데 밤에 보면 좀 으스스하다. 비유에서 성별을 고루하게 서술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1987년에 나온 책임을 생각하면 이해할만 하다. 책 또한 초예술다워서 책등에 1이라고 써있는 점이 소름. 2에 대한 소개는 없다 알아서 찾아여 하고 제목에 초예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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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현실문화. https://blog.naver.com/hyunsilbook/223453556799


참내, 새 빙고판도 있습니다. 다운 받을 수 있게 해놨더라고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생동하는 물질> 흥미롭게 봤습니다. 이런 것을 사변철학이라고 하는군요

놀랍게도 엄청 술술 읽혀서 제가 마치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가독성과 난이도는 어느 정도 발을 맞춰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만


가독성이 나쁘다고 난이도(책을 통과한 후 생각의 변화 등을)도 높지 않다면 그건 나쁜 일이겠지요.

독자에게도, 저자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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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쓰는 페이퍼. 

함께 리뷰를 쓰고 싶은 책들이 있어 메모



파견자들 VS 세계 끝의 버섯














김초엽의 인터뷰만은 늘 읽고 있다. 쓰기의 성실함, 직업인으로서 어떤 자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견자들>을 6개월 만에 썼다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말하자면 어떤 프로젝트를 6개월 만에 종료했다는 말이다. 보통의 직장인들에게도 6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어떤 결과를 낼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가 어떤 자세로, 얼마나 집중하고 한 권이 늘어지지 않고 끝낼 수 있도록 노력했을까.

하여간, 그의 책에서 균류의 세계가 나온다고 한다. 표지에서도 약간 은유되어 있다.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세계를 그릴 때 인간을 더 잘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계 끝의 버섯>은 새로운 삶의 자세를 배우고, 나아가 삶의 무진한 영감을 주는 책이다.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안정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안정감은 물론 훌륭하지. 그러나 다른 면을 볼 기회가 적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면을, 삶을 왜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삶이 모양이 불안정하다면 안정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길이 아니고, 안정감이 줄 수 없는 훌륭함을 찾아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송이 버섯은 어떻게 살아갈까? 인간이 이렇게 파괴한 곳에서.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인간은 우습게도 과대되어 있다.


덧: 표고버섯을 요리해 먹을 일이 있었는데 버섯을 데치면 이렇게 쫄깃쫄깃하고 마치 고기의 식감이 나는 건지 새삼 감탄했다. 향도 훌륭하고 말이지.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VS 헌치백















올해의 문제작을 읽으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헌치백>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다면 그 힌트를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고 왔다.


우선 <헌치백>을 통해 종이책의 폭력성에 대해 처음 알았다. 종이책을 읽으려면 여러 개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도 들어야 하고 넘겨야 하고 오랜시간 앉거나 서 있어야 하고... 대부분 비장애인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전자책의 훌륭함은 이렇게 발견된다. 오디오북도 말이다. 비장애인 위주로 생각하면 영영 모를 일이다.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의 내용은, 전자책을 읽는 것이 당연히 더 나은 날이 온다는 것이 이 책의 거친 요약이다. 노령의 나이에 진입하게 된다면, 그때는 누구나 이전과 다른, 퀴어한 시간성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년의(그리고 나이듦에 따라 수반되는 병듦) 섹슈얼리티를 탐구한다. 그것은 잘 말해지지 않는다. 비장애인과 다르게 잘 이야기 되지 않고, 그래서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느껴지게 만드는 장애인의 섹슈얼리티처럼 말이다.



스타벅스 일기 VS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당시 이상의 삽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흥미로운 만남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보다, 소설이 되어가는 방식이 흥미롭고, 그 형태를 따라 놓인 삽화가 새롭다. 그동안 글만 읽어왔다니 조금 아쉬운 노릇.


소설의 줄거리와 이야기로 무엇을 얻는다기보다, 당시 생활과 생각의 다름, 혹은 비슷함을 느끼는 것에 재미가 있다. 다른 리듬을 주는 문장을 읽는 재미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다방과 카페의 공간은 현재와 반대인 것처럼 나온다. 오늘날 카페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가는 공간이지만, 1930년대의 카페는 여급들이 있는 곳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다방이 오늘날 카페에 비슷한 장소였던 것 같다.


"생각이 피로한 그는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중에서

다방(카페)에 들리는 이유는 그나 우리나 비슷하다.


이들이 역전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90년 전 경성에서 구보가 사람들을 관찰하고 친구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구성한 장소도 다방으로 나온다. 오늘날 카페에서 수많은 작업과 분투가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 서로의 자리에서 나만 알게 일어나는지, 하지만 다른이에게 보여지면서 많은 일을 수행한다. 여가를 보내거나, 친목을 도모하거나 고독을 즐기거나 글을 쓰거나. 그리고 카페에서 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는 이야기는 다른 관계와 사회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이 예전의 소설에 나오기도 하고. 집이 아닌 공간에서 타인과 마주하지 않고 식사가 아닌 차를 마시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탄생하게 하는지.


<스타벅스 일기>는 제목만 들어도 재미있다. 스타벅스에서 다른 사람들은, 작가는, 번역가는 무엇을 쓸까? 무엇을 생각할까? 일종의 관음, 참고, 덧대봄, 나를 돌아봄을 함께할 수 있는 에세이처럼 보인다. 


참, 이벤트가 있다.

#소설가구보씨의일일 #프릳츠 #구보씨의커피리뷰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60283&start=pb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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