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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태어나는 것, 문득 일곱 살이 되는 것, 낮은 계단에도 다리를 다치고 마는 것. 몇 번의 연애가 언제나 이별로 돌진 중인 것, 무성의한 월요일 아침이 또 온다. 그것을 인내하는 것으로 삶은 끝을 향해간다. 우리가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이 이어진 단 하나만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지진한 일 같지만, 어쩌면 열네 살과 열다섯 살을 통과했던 이해 불가한 사건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막무가내로 벌어졌던 사건을 단지 위로하고 싶은것은 아니다. 이어진 단 하나의 시간을 산다는 삶의 ‘형태’는 내 자신이 직접 살아왔음에도 그 때에는 알 수 없었던 소의 되새김질처럼 반복으로만 가능한 삶의 이해 '방식'을 불러온다.
이런 삶 옆에서 소설은 더욱 극단적인 선택지를 보여주며 우리를 뜨악하게 하지만, 놀람을 걷어내고 보면 생을 그대로 본뜬 모양으로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소설 <그믐>에는 시간이 지나 남자로, 여자로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어른이 되어 훌륭하게도 남자와 여자는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다 자라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던 남자의 친구 '영훈'이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대명사로 주인공을 배치시키는 것과 다르게 ‘영훈’은 고유명사로 가장 중요하게 소설에서 움직인다. 소설의 인물이 ‘영훈’을 대하는 태도는, 산 이가 죽은 이를 ‘이해’한다는 불가함을 은유하면서도 소설의 바깥에서 독자는 소설의 화자처럼 똑같이 시험당한다.
소설은 진심으로 상대를 알아봤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교류가(남자와 여자) 얼마나 상대를 변화 시킬 수 있는지, 무한한 감정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그 마음이 비틀려 이해되었을 때(남자와 영훈) 막을 수 없던 과거의 비극이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져서 미결인 상태로 얼마나 아파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남자를 알아본 단 하나의 개인이었다는 것은 여자와 영훈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에게는 사랑을, 영훈에게는 죽음을 준다. 이 불공평한 관계는 후에 공평하게도 같은 비중의 비극으로 마무리 되지만. 남자가 극단적으로 대했던 이 둘의 '관계'는 어떤 차이들로 비롯되었던 걸까. 또한 남자가 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벌였던 소설 끝은 남자에게 진정한 '답'이 될 수 있었을까. 소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관계에 선행되는 ‘알아보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자.
알아보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관심(사랑)과 함께,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지혜)이 필요하다. 둘 중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이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자와 영훈에게는 모두 남자의 글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러나 남자를 알아본 둘은 글을 알아보고 이야기 하는 위치가 달랐고, 그로인해 남자가 느낄 온도차가 현저했다. 여자는 ‘교지 편집위원’으로 그의 글을 읽고 비평하며 여자는 또한 ‘둘 만의 장소’에서 남자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훈은 일진은 아니지만 노는 애들의 축에 속하는 아이로, 어느 해 남자와 사이가 틀어졌으나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교지’에 실린 남자의 글을 보고 영훈은 '작가'라며 ‘놀린다’. (물론 ‘놀린다’고 느끼는 것은 남자의 시선이다)
영훈과 남자의 틀어짐에 대해 소설은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영훈과의 관계에서 그저 영화 <파수꾼>에서 보여주는 그 나이의 남자가 갖고 있는 예민함, 말로 소통할 수 없는 오해와 무력이 벽을 친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뿐이다.
이렇게 남자의 유년에 그를 알아본 두 개의 사건이 있어 여자와의 일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용기 이상을 얻었지만, 영훈과의 일로는 마음을 깊게 다쳐 파국에 이른다. 그러나 여기서 영훈이 남자를 향해 보였던 ‘알아봄’에 ‘사랑’이나 ‘지혜’가 얼마나 진실로 포함되어 있었을까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진실에 정량이 있어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서 차이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영훈의 마음을 알아챌 수 없던 ‘남자’의 맹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
영훈은 죽었지만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그는 남자가 아이였을 때 죽인 친구이자, 남자를 끈질기게 쫓는 아주머니의 아들이고, 여자가 남자와 함께 가고 싶은 미래의 길목을 막는 치워지지 않는 흙더미다. 소설은 남자가 이영훈을 왜 죽였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크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남자가 과거의 말을 ‘번복’하는 것으로 그가 영훈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남자가 9년 동안 지켜왔던 주장, 영훈이 평소에 남자를 괴롭혀왔으므로 일정부분 참작되어야 하는 우발적인 살인이었다는 주장, 이것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여자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힘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가 자신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설계할 수 있었던 길이었다. 그러나 후에 남자는 이 주장을 번복한다. 동시에 여자와의 ‘관계’를 버리며, 자신의 미래 역시 닫는다.
저는 조금이라도 감형받기 위해 그런 말들을 지어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은 제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147
소설에서는 남자의 거짓말이 어디서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영훈의 태도와 관심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도 지키지 못하고 사라진다. 자신이 진실 할 수 있는 만큼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이 변화 할 수 있다는 교육적인 결말일까. 남자는 영훈의 장난스러운 말을 뒤늦게 이해했던 것일까?
이 대목은 난데 없이 소설에 출현한 ‘작가의 말’이라고도 생각한다. 작가는 말을 지어낸다. 그건 물론 감형이 목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란, 자신이 알고 있는 신뢰의 세계를 기반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은 이해를 탐하는 일이라고 이해해볼 때, 외부에 자신을 알리기 전에 죽어버리는 주인공의 자리에 '너는 대체 누구였어?' 라는 대사가 남는 것을 본다. 이 대사는 환상같은 세계로 초대하고는 금새 자취를 감추는 작가, 나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지만, 당신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글 속에서도 작가이자, 글 밖에서도 작가인 '남자'의 고백 같은 건 아닐까. 소설은 관계의 파괴에 대해 윤리적인 대답은 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다가왔던 관계를 책임지며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을 남긴다. 이것만은 소설에서 깨어난 우리가 소설 밖으로도 가져가 기억할만한 사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