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자네는 매우 영리하고, 빈틈없는 사람이고, 또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기도 하지. 그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주사위만큼 정확하지. 자네는 정말 괜찮은 친구야. 문제는 말일세, 자네에게는 중요한 세 가지가 빠져있어. 첫째 욕망, 둘째 기쁨, 셋째 연민. 요엘, 자네가 나에게 부탁한다면, 내가 세 가지를 한꺼번에 꾸러미로 엮어 주지. 자네가 두 번째 것이 없다면, 자네는 첫 번째 것도 세 번째 것도 없는 거라네. 자네가 처한 상태, 자네는 끔찍한 상태에 있어. 이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네. 이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게. 자네를 바라보고 있는. 난 자네를 볼 때마다 거의 울고 싶다네. p. 166
아모스 오즈, 『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도착 할 때까지 로맹가리를 듣기로 했다. 새벽의 약속. 처연하게 가라앉는 글 아니라, 웃는 가운데 환부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났다가 숨는게 보기 좋았다. 환한 아픔 같은 것.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마다 너 살아있음을 친절하게 가르치기 때문일까.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너 있음을 알아야 하는 일은 틀리기 쉬운 일기예보나 몇 개의 뉴스와 길 지나쳐 스치는 사람들로 잊기 쉬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사물이 되어가는 심정*. 조금씩 내리는 비는 밤에 가서야 그친다고 했다. 서울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그칠 거라는 예보는 모두 빗나갔다. 어제라면 당연히 내려야 할 곳을 지나서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지나친 곳이 마침내 내릴 곳이 된다는 것이 어쩐지 웃음이 났다. 좀 전에는 어제 들었던 그걸 또 들었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김영하가 헤더, 하고 부르는 낮은 음색은 이제 로버트를 거의 다 만들었다. 헤더와 콜린이 지나친다면 거의 알아볼 지경이다. 가을에서부터 나는 그들의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아직은 팔이나 다리가 드러나기 좋은 바람이다.
'윤오'라는 이름을 두 번 썼다.
어제는 무척 오랜만에 입이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이 오랜만에 있었다고 해야겠지.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주 오랫만에 내가 읽어왔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때마다 분명히 혼자였을 공간에, 햇빛이나 바람이 지던 풍경이 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던 일이라고 해야겠지, 그때 일고 지나갔을 통증을, 지금은 다 잊었을 그것을 다시 떠올려 위로하는 어제가 있었다고도 해야겠지, 지금 들리는 낯선 목소리가 그랬던 나의 예전에 들어왔던 일이라고도 해야겠지만 그런 건 말하지 않고 다만 '즐거웠다'고 간단히 전했다. 그러나 매일 내렸던 지하철을 지나고, 내려서 그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한 세기만 어긋났더라도 불가하다는 일을 알고 있을런지. 비슷한 공간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비슷한 시간이 아니라 같은 시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이렇게 말이다.
언젠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죽었을 것이라던 여자를 1/10으로 그렸던 남자가 들려준 말을 전한다. 그는 그 관 속에 자신이 누워 있고 누워있는 여자가 자신을 그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그날을 지나가는 시간이 자신과 그녀를 이렇게 세워두었기 때문이라고도. 삼단 같던 머리칼과 희고 둥근 손톱, 어긋난 뼈들은 수백년만의 바람을 맞으며 슬쩍슬쩍 흔들렸다고 했나. 들리지 않는 몇 마디를 건네고 듣지 못하는 말 몇 개를 간신히 주우며 여름 몇 주를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그를, 생각한다. 그런 만남을 비껴서 어제 우리는 '말'을 나누었으니, '그날 같이 있음'에 대한 긴 말을 이렇게 쏟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이근화, 「짐승이 되어가는 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