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제자리에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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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어떤 일들은 구름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단 한순간에 완전히 빛깔을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따뜻한 기운을 품은 은은한 복숭앗빛 하늘이 왜 저토록 사나운 핏빛으로 변해버렸을까. 좀전까지 잘 어울리던 한 쌍의 커플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 마주 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끔찍한 악연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까. 왜 그런 일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어떤 사람을 다시 벗어나지 못할 수렁으로 몰고 가는 걸까.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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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빨려 들어가 춤을 출것이다.

그러다 작살을 쥐고 한 사내의 과거를 헤집을 것이다.
외롭다고 말한 뒤에 외로움의 전부와 결속할 것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 이불 밑에다 북어를 숨겨둘 것이다.
숨겨 두고 가시에 찔리고 찔리며 살다
그 가시에 체할 것이다

생애 동안 한 사람에게 나눠 받은 것들을
지울 것이며
생략할 것이다

- <정착> 중

사람이 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 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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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칸트 자신의 저서가 아닌 다른 데서 칸트 철학을 찾는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데 칸트 자신의 저서는 그가 잘못 생각하거나 틀린 경우에도 무척 교훈적이다. 그에겐 독창성이 있으므로 모든 진정한 철학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을 그에게도 무척 잘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보고문이 아닌 그들 자신의 저서로만 이들 진정한 철학자를 알 수 있다. 그런 비범한 철학자들의 사상은 평범한 두뇌로 여과되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광채를 발하는 두 눈 위, 넓고 훤하며 멋지게 도드라진 이마 뒤에서 태어난 이 사상은, 개인적 목적을 추구하는 우둔한 눈빛으로 요리조리 엿보는, 좁고 짓눌려 있으며 벽이 두꺼운 두개골이란 좁은 집과 낮은 지붕에 옮겨지게 되면, 온갖 활력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본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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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9-06-22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데 꼬박 한달이 걸렸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책이네요.악몽과도 같은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제 머리를 쥐어박았죠. 그리고 다양한 논객들의 견해를 읽고 나서야 감을 잡는데는 수십년이 걸린듯 합니다 ㅠ

인문학에길을묻다 2019-06-2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너무도 어렵게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과거는 고정된 시간의 어떤 형태가 아닙니다. 현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생명체입니다. 상상은 과거를 현재와 연결시킴으로써 과거를 역동적인 생명체로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과거에 갇혀버리는 거죠. 과거에 갇히면 현재의 시간이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의미 없는 삶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비정상적인 행위도 의미 없는 삶보다 나으니까요."
-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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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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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 앞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282p, <코네티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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