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나무와 붉은 물웅덩이와 기를 쓰고 나아가는 애벌레를 떠나 따라갔다. ‘불쌍한 아들‘이 나를 불러 달라고 했으니 아주머니가 절대 나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전만 해도 아주머니는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온갖 짓을 다 했었다. 아주머니는 나 때문에 아들이 나쁜 물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의 성적 욕구가 고조되어 있을 때 그가 그럴싸한 여자를 만나는 걸 나 같은 사람이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286p, <두 번째 죽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가 하면 정은과 현수는 내가 언젠가 막연히 나에게도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삶, 진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그랬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한 독립체로 대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고 그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아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결합으로 보였다. 그건 내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을 완벽한 형태의 관계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을 뿐이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마치 나보다 한 세대는 위의 사람들인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행에 뒤처졌다거나 고리타분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내가 그래왔고, 그러고 있는 것보다 이 세상을 훨씬 더 많이, 잘, 속속들이 활용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47p, 정영수, <우리들>

"다시는 할 수 없는 말."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이란 말은 뭘까?"
나는 때로 사랑이라는 건 그 자체로 의미를 품고 있지 않은, 그저 질량이 있고 푹신거리는 단어일 뿐이라고 느끼곤 했다. 나와 연경이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을 세어보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서로가 그 말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을 때조차 마치 우리 사이빈 공간을 메우려는 것처럼 그 말을 쏟아냈다. 구멍이 뚫린 튜브에 계속해서 호흡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의 말들이 완전히 무의미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라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더이상 아무 뜻도 남지 않은 언어라도 멈추지 않고 채워넣는 것 외에 무엇을, 형체를 잃어가는 우리가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일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261p, 정영수, <우리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바노프는 눈을 감았다. 기진맥진해서 넘어지는 아이들을 더 이상은 애처로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갑자기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내부에 갇혀 평생을 힘겹게 뛰고 있던 심장이 그의 전신을 뜨거움과 전율로 휘감으며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했다. 갑자기 그가 예전에 알던 모든 것이 좀 더 정확히, 그리고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해관계라는 울타리 속에서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타인의 삶이 열린 가슴을 통해 다가왔다.
-267p,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귀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에 비하면 말똥말똥 깨어 있는 게으름뱅이, 사람들 사이에 섞인 군주들, 터무니없이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얼마나 더 행복한가. 석양 무렵 테라스 난간에서, 저 아래 불빛과 호수에서, 짙은 살굿빛 저녁놀로 녹아드는 먼 산의 형상에서, 옅은 잉크빛 창공을 배경으로 검게 윤곽선을 그린 침엽수들에서, 조용하고 슬프고 금지된 해안선을 따라 몸부림치는 심홍색과 초록색 물결에서 강렬한 희열과 황홀한 마음의 격통을 느끼는 이들은, 오, 내 그리운 보스코벨이여! 감미롭고도 두려운 기억, 부끄러움, 영광, 미칠 것 같은 암시, 어떤 당원도 도달할 수 없는 별이여.
-28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아주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 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 어떤 비평가나 작자 모두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 비평가가 바보란 걸 알 수 있어." 킨보트: "하지만 전 고등학교에서 그리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해. 한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 중국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수 없어 달랑 논 사진 한 장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듯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
킨보트: "예, 동감합니다."
-19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