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대비 학생 비율은 한국이 3.41퍼센트, 미국이 3.35, 호주가 3.24, 프랑스가 2.88, 독일이 2.29로 되어 있다. 가족을 포함하여 교양시민층이 인구의 1퍼센트에 미달했던 시기와 대학생수가 인구의 2.3퍼센트를 차 지하는 사회에서 이미 중산층은 특별한 신분상징이나 정체성의 표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참고로 1939년 독일 대학생의 총수는 약 4만 명으로 인구의 0.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또 차이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대항계층도 없어졌다. 사실상 구귀족이라는 계층이 소멸하였고 선망과 질시의 경쟁대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양 취득을 통한 정신귀족을 지향할 동기의 하나가 소멸한 것이다. 또 기운차게 확산되고 있는 평등주의 이념과 그 점진적 실현은 지배엘리트와의 경쟁을 재촉하지도 않게 되었다. 따라서 각자가 독특한 생활스타일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생활스타일의 다원화가 계급과 계층에 기초한 전통적 사회조직과 그 에토스를 소멸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양도 소멸해버린 구제도의 하나인 셈이다.
-117p

위에서 약술해본 독일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대학생 수가 극히 적은 사회에서 특혜받는 소수파는 그 혜택을 누리는 한편으로 사회에 대해 어떤 사명감을 갖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회의 계몽이나 진보에 기여하련다는 자임에서부터 새 문학 건설이나 혁신에 기여하련다는 예술적 포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사회적 사명감이나 예술적 포부가 문학이 저급한 상업주의로 떨어지는것을 방지한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가 없는 시대의 언어상품이다. 그것은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파괴적 허드레 문학이다. 계몽되지 않은 독자가 이러한 작품에 일찌감치 노출되었을 때 거기 중독되어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한 지그 수준에서 정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숲’에 중독된 독자는 그 작품의 화자가 읽고 있는 이 소설 ‘마의 산’을 끝내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마음의 귀족 되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흉 될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11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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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했다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밤에 대해서도 고요히 쌓이는 눈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따금 나는 나의 눈을 찔렀다. 모두가 나의 나 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더 오래 살 것이다.
-54p, <나의 나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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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제자리에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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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패배의식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있는 듯한 표정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책상과 의자는 몸에 맞지 않아서 마치 작은 처형 도구에 몸을 끼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옆 사람의 숨소리와 몸 냄새에 신경이 곤두서서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물론 그런 사정은 내 옆자리의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산소가 점점 희박해지는 공간 안에서 초록 칠판에서 떨어지는 흰 분필 가루를 마시면서 어떤 고역들을 참아내는 시간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비켜설 수 있게 해줄 거라고 믿었다.
-64p, <잘못 찾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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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제자리에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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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어떤 일들은 구름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단 한순간에 완전히 빛깔을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따뜻한 기운을 품은 은은한 복숭앗빛 하늘이 왜 저토록 사나운 핏빛으로 변해버렸을까. 좀전까지 잘 어울리던 한 쌍의 커플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 마주 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끔찍한 악연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까. 왜 그런 일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어떤 사람을 다시 벗어나지 못할 수렁으로 몰고 가는 걸까.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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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빨려 들어가 춤을 출것이다.

그러다 작살을 쥐고 한 사내의 과거를 헤집을 것이다.
외롭다고 말한 뒤에 외로움의 전부와 결속할 것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 이불 밑에다 북어를 숨겨둘 것이다.
숨겨 두고 가시에 찔리고 찔리며 살다
그 가시에 체할 것이다

생애 동안 한 사람에게 나눠 받은 것들을
지울 것이며
생략할 것이다

- <정착> 중

사람이 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 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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