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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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p
‘교양‘의 깊이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려 할 때 얼마나 큰 지도책‘을 상상할 수 있는지에 따라 계측된다.
‘교양 없는 사람‘이란 ‘자신이 누구이고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생각할 때 살고 있는 맨션의 배치도 따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란 세계사 지도 같은 두꺼운 책을 떠올리며 그 어디쯤의 시대, 어디쯤의 지역에 ‘자신‘을 놓아두면 좋을지(킵차크한국 같은 데는 아니겠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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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47p
‘경제적 자립‘은 당연히도 현행 경제 시스템에 편승‘ 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현재의 노동 시장에서 상당액의 대가를 얻는 사회적 능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 나름대로의 학력, 적절한 직업적 전문성뿐만 아니라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사람과의 협상, 다른 의견과의 타협, 도량 좁은 사람의 편견에 대한 관용…… 이러한 ‘사회적 기량‘은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중시되며, 상당액의 임금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다.
기존의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적절한 포지션을 차지한다는 사실만이 ‘경제적 자립’을 뒷받침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자립‘은 남들의 ‘경의’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자립‘이란 ‘나는 자립했다‘는 단정이나 깨달음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그런 간단한 이야기라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을것이다.
정신적 자립을 이룬 사람이란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지원을 부탁하고 조언을 청하고 의존하고 공동의 영위에 참가하기를 거듭 바라는 이다.
보시는 바대로 ‘자립‘이라는 말은 ‘종속‘이 그러하듯 함께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와 함께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타자 대부분은 ‘국가‘나 ‘인권‘ ‘신‘과 같은 환상에 ‘아직도’ 깊이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경제적 · 정신적 독립‘은 그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과 함께 살며 그들의 신뢰와 경의를 얻음으로써만 실현된다.

166p 지식인의 함정은 자신이 동의하는 것은 <옳은 일>이어야만 한다는 확신에 있다. 이론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어도 실천적으로는 용인한다‘는 대중의 생활 감각과의 괴리는 여기서 생긴다.

177p 타인을 경멸함으로써 우월감을 얻으려는 자는 언제나 ‘자기보다 천한 인간이 안정적이면서 대량으로 공급되는 장소’로 이동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105p 우리의 마음을 오랜 세월에 걸쳐 산酸처럼 침식하여 우리를 폐인으로 몰아가는 종류의 ‘후회‘는 ‘무언가를 하지 않은 후회’다.
둘도 없는 시간, 둘도 없는 사람, 둘도 없는 만남을 놓친 것에 대한 후회,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을 끝없이 계속 도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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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p 의식 있다는 선진적 지식인들이 걸핏하면 우리 현대사가 치욕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절대빈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경험할 필요가 없던 그들의 불구적 행운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서 누릴 것을 가장 잘 누리면서 전혀 고마움을 느끼 지 않는 것이 도덕적 정의인가 하는 것은 생각할 문제이다. 모두 제 복이요 능력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이란 생각을 못 하는 소아적·유아론적唯我論的 발상이다.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주체의 부정과 함께 몰염치한 자기기만이다. 부족함과 부러움 없이 살면서도 없는 사람 편을 드는 자신이야말로 이해관계를 초월해의 편에 선다는 선의의 자의식도 숙성된 자기기만이니허영인 경우가 없지 않다. 정치로 연결되기 마련인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은 단순한 도덕적 감정 차원의 사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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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적과의 공존문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공동생활에 대한 의지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을수록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이다. 야만이란 분해를 향한 방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야만의 시대는 인간이 분열하는 시대이며, 서로 분리되어 적의를 가진 소집단들이 만연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 ) 자유주의는 최고로 관대한 제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 해 인정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구상에 울려 퍼진 가장 고귀한 외침이다. 그것은 적,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적과도 공존하는결의를 선언한다. (…) 적과 함께 살기! 반대자와 함께 통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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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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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p ...언제나 ‘구조적으로 지게 되어 있는 사람‘을 상정해보는 겁니다. 언제나 시간적으로 뒤처져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정신적 외상입니다. 과거에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갖고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언제나 과거의 경험으로 돌아가 과거의 프레임으로 현재를 삽니다.
하나의 점에 붙들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그것을 무도에서는 ‘거착’이라고 말합니다. 보통은 발바닥이 바닥에 착 달라보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공간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처럼 당연히 ‘시간적인 거착’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어떤 시간의 한 점에 고착되어 시간이 앞으로 흐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적으로 거착되어 있는 셈입니다. ‘저 사람은 저때부터 시계가 정지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언제나 과거로 돌아갑니다. 어떤 경험을 해도 그것을 과거의 프레임안으로 넣고는 그 프레임으로 바라봅니다. 무사시 씨의 경우는 편치를 한 방 먹었을 때 다음에 자신이 두 방 먹이는 것을 ‘현재’라고 생각함으로써, 말하자면 ‘미래로 도망감‘으로써 통증을 상대화합니다. 이와 반대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은 과거의 어느 시점을 현재라고 생각함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참기 쉬운 것으로 만듭니다. 즉, ‘과거로 달아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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