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김병운작가님의 두번째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가 12월 1일에 출간되어 읽었습니다.
(봄에는 더 잘해줘)
영묵씨를 받아들이고 예뻐해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극진하게 대하려는 영묵씨를 보며 ‘더없이 전형적이고 평범해서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해보고 싶었던(36쪽)‘ 나의 진부하지만 간절히 원했던 욕망.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잘 봐, 나는 너를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너의 비밀도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의 비밀은 안전해.(51쪽)‘
서로가 지니고 있었던 깊은 상처와 분노에 쌓여 알고자 하지 않았던 진심, 그 누구도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비밀들을 더 늦기 전에 똑바로 바라보며 잘 지나온 홍주와 나 사이에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천진한 홍주의 아들 원기.
(크리스마스에 진심)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105쪽)‘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돌려 줄 수도 없게 된 P의 디지털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인 찬오에게 선뜻 주는 추운 겨울 한복판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산타할아버지의 모자같은 마음을 지닌 찬오대신 삼촌인 용이와 더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121~2쪽)‘
가족들에게 이미 죽음을 선고받아버린 장희의 삼촌 원진무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산에서 진무 삼촌을 곁에서 지켜봐온 이영서씨를 만나 진무 삼촌과 화상 면회를 하고 진무 삼촌의 고장난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맞이하는 장희와 나.
(교분)
‘너는 항상 땅만 보고 걸었어.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시절의 너는 너무 빛나서 어디서든 잘 보였는데.(164쪽)‘
그 시절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매번 단속해야 했던 김준일선생님과 자신을 빼닮은 후배이자 그 애인 김인경의 이름을 발음해보는 소설가 이윤범과 함께 잘 지나온 친구 재효.
(아마도 이재현편집자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단편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게 단편의 끝 여백에 페이지 표시를 하지 않았던 다른 단편과 달리 끝난 후 여백에 176 페이지 표시가 되어 있어서라는 저의 망상같은 추측을 해봅니다.)
(오프닝 나이트)
‘진짜가 아니구나. 삶을 내걸고 쓴 게 아니었구나. 아니, 어쩌면 기만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삶을 훔쳤다고, 자격도 없으면서 이득을 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닐까?(199쪽)‘ 와
‘언제나 너의 첫 독자일 수 있었던 그 특별한 영광이 실은 내게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나를 습격해왔을 때, 나는 너의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내 사진을 모두 숨겨달라고 말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투쟁하고 싶어서 업로드했던 우리의 모습을 더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200쪽)‘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불현듯 떠올랐던 어떤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사소한 일이다)
‘먼저 말해볼까 싶다가도 거절을 당하는 건 또 싫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건 나였고 우리의 공백은 펜데믹 때문은 아니었으니까.(232쪽)‘
코로나바이러스에 확진된 엄마를 대신하여 엄마와 함께 살던 동네에서 만난 한때는 하트현이라며 별명을 지어주며 선후배사이로 지냈으나 이제는 깍듯이 존대하는 ♥현이 빗어내는 만둣 가게가 있고 장현씨와 손을 마주잡고 거닐 수 있는 동네가 다시 좋아지려고 하는 선배이자 소설가인 나.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제가 떠올려버린 어떤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진짜 (진심으로) 사랑을 하여 자신들의 시절을 잘 지나오며 자신들에게 찾아로는 한 시절의 끝과 시작을 잘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김병운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