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라면 지식과 생각의 성장은 각자의 도덕적 의무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흘러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꽤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즐겨 찾아가는 알라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의 글' 중에서

위에 적혀 있는 말을 읽으며 나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은 인식수준이라면 삶은 얼마나 허망할까요?

이 말을 내가 나갔던 독서모임에도 한 번 적용해보고 싶어졌습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독서모임에서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한다면

그 독서모임에서 저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아마도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구요?^^;;

너무 당연하게도 10년 전에 들었던 말을 지금도 독서모임에서 계속해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이 똑같다고 해서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할 수밖에 없다면,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10년 전과 똑같은 말을 10년 전과 똑같은 인식수준에서 똑같이 하고 있다면

저는 그게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보여지니까요.

그 사람의 삶이나 전체적인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까지는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독서모임에 나와서 책에 대해 하는 말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책에 있어서 재미가 있는 건 중요합니다. 재미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언제까지나 재미에만 얽매여 있는 건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책이 재미있냐 없냐로만 책을 판단하는 건 책을 읽을 때의 즉물적인 감정에만 매달린다는 말입니다.

그건 한 때의 감정으로만 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이가 들어서 읽거나 다른 많은 경험들을 하고 다시 책을 읽게 되면,

과거에 가졌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을 가질 확률이 높습니다.

재미없었던 책들이 재미있어지고, 재미있었던 책이 재미 없어지기도 하죠.

그러니까 너무 재미에만 얽매여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의 제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10년 전에도 재미,재미 하던 분들이 10년 후에도 재미,재미라는

말을 외치는 상황이 된다면, 제가 보기에는 그 독서모임에 허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더군다나 그 재미라는 게 자신의 입장에서는 재미겠지만,

다른 이의 입장에서는 재미가 아니거나,

내 입장에서는 재미가 아니지만 다른 이의 입장에서는 재미인 경우에는,

상호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재미에만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에.

또 재미라는 건, 위에서도 말했지만 삶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의 재미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재미에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독서를 10년 전에도,

지금에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조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책도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읽어보세요.

어렵다는 게 반드시 재미없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다른 누군가는 당신이 어렵고 재미없다는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재미없다고 해서 지금 내가 읽은 책이 반드시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미가 있거나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한 책들만 읽고 있다면,

비슷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면,

조금 다른 책들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해보세요.

그런 게 삶의 인식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테니까요.

쾌락적인 독서에만 몰두하지 마시고, 책과 나 사이의 의미망을 조망하는

의미론적 독서로 서서히 넘어가보세요.

그러면 이 의미론적인 독서가 쾌락이 되는,

즉물적인 책에 대한 감정에만 얽매이는 게 아니라 책과 나 사이에서 생성되는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의미'가 독서의 쾌락이 되는,

새로운 독서의 삶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변화하고, 어떤 식으로든 성장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들어야할 그 누군가는 제 말을 들을 수가 없겠죠.

제가 그 대상이 누구인지 말 안 할테니까요. ㅎㅎㅎ

하지만 저는 그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들이 듣지 않더라도 말을 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을 해봅니다.

저 자신이 되지도 않는 의미론적 독서 같은 말을 하면서.

끝으로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제가 나가는 독서모임에서 10년 전과 같은 말을 하는 그 누군가들이

변화하기를.

그래서 제 허망함을 그들이 종식시켜주기를.

내가 왜 이 독서모임에 나왔나 하는 후회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해주기를.

제발, 제발....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도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얼마나 다른지 깊이,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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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 <맹자와 공손추>라는 책을 읽다가 이 네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왜 이 책을 계속 읽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을 계속 읽고 있는 이유는 내가 계속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 소비한 시간, 노력과 심리적인 부분까지가 너무 아까워서 계속 읽을 뿐이라는 말이다. 너무나 뻔한 내용의 결론, 관심 없는 주제의 나열을 읽다가 지쳤다고나 할까.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고, 새롭게 아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의 도움이 내가 읽으며 느낀 '시간낭비'라는 생각에 대한 부분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호흡법이나 '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지루했으며(나는 신선이나 도술, 단전호흡을 위해서 동양철학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공자에 대한 칭찬배틀을 나열하며 공자를 지상 최고의 인간이자 성인으로 만들려는 저자의 의도에 전혀 공감을 하다 못해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삶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저자의 말을 들으며 저자가 지금까지 강의를 하고 있었다면 한국 청년들에게 '노~~오~~력'을 강조할 것이 눈에 뻔하게 보여, 내가 지금까지 '초울트라슈퍼꼰대'의 글을 읽었구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기에, 총평을 하지는 않겠다. 남은 부분은 제발 나의 마음에 어떤 지적인 울림을 줄 수 있기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책을 읽은 게 너무 공허해질테니까.

 

*그런데 뒷부분에서 갑자기 중국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든다. 역시 책은 마지막까지 다 읽어나가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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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이상했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신 분은 '이 정도도 쓸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분은 한번도 글을 쓰신 적이 없다.

되지도 않은 글을 몇자 끄적거리는 나보다도 더 글을 적은 경험이 없고,

아예 글을 쓰실 생각도 없다며,

지레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접으신 분이었기에.

그런데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 정도도 쓸 수 없습니다.

한번도 글을 제대로 써본적도 없고,

글을 쓸 생각도 없어서 글을 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여러 권의 책을 낸 저자처럼 쓸 수 있겠습니까?

저 저자가 저렇게 쓴 게 쉬워보이지요?

만만해보이지요?

그러나 써보면 압니다.

저렇게 쓰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권의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당신이 저 저자만큼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 어떠한 노력과 시간도 들이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다고요?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쓸데없는 말은 접어두시기를.

제발,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말은 접어두시기를.

그리고 앞으로 제 앞에서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만용의 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두손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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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글을 쓰기 싫다는 게으름의 욕망에 언제나 패배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의 백전백패. 안타까운 일이고, 바뀌었으면 좋겠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따져봤을 때 변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책을 읽을 때나 다 읽고나면 무언가 써야겠다는 욕망은 내 마음에 어른거린다. 그 욕망의 어른거림이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전까지는 '글을 쓰겠다'는 말을 쉽게 뱉었다. 이번에도 쉽게 내뱉어볼까. 글을 쓰기 싫다는 욕망에게 패할 것이 거의 확실한데. 고민은 이어진다. 고민의 끝에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이상한 글을 쓴다. 나도 안다. 이것이 글을 쓰기 싫다는 욕망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미뤄두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어쩌랴. 이게 나인데.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내뱉어 본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싫다는 욕망에 패배하기전까지 내 다짐의 실패는 유예될 것이다. 이전에 그랬듯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글을 쓰기 전까지. 반복은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글쓰기에 있어서 반복은 견딜 수 있다. 앞으로도 이 반복을 견디고 또 견디며 나는 글을 쓰고, 글을 쓰지 않고, 다시 글을 쓰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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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편>

"운명을 믿나요?"
"네,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이렇게 우리가 만났다는 것 자체가 운명이 아닐까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만나서 여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요."
-나의 미발표 창작 SF <우주의 끝> 중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오늘 내가 겪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오랜기간 나가지 않던 인디고 수독 모임에 나간 것도,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이라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독서 모임에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진행자가 되어 모임을 이끌어가게 된 것도, 이렇게 내 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작용일 것이다.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오늘 이루어진 운명의 기원에는 텔레그램에서의 대화가 있다. 주제에 대한 토론. 나름의 다른 생각과 그 다른 생각에 대한 다른 이의 반응과 대화. 감정과 분노.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수독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때 나의 행동은 오늘의 만남을 위한 운명의 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운명은 나로 하여금 오랜기간 수독에 나가지 않게 했고, 나는 그것이 운명인 줄 모르고 수독 모임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인디고 수독 모임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는 '부산고전함께읽기'라는 모임을 만들어 고전읽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고전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과 함께 플라톤의 대화편 7편을 읽고, 뒤이어 이 모임은  동양고전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동양고전을 읽은 최근의 두달은,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 동양고전과 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 기간동안 즐거웠고 행복했다. 읽고 또 읽다 어느정도 기계적인 독서를 했던 내가 잊어버렸던 독서의 초심을 되찾는 기간이었고, 모르는 것을 아는 즐거움을 되살리는 기간이었고, 피눈물나는 '어려운 책읽기'를 넘어 포기하지 않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했고, 독서는 내 운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독서의 운명을 실감한 내 마음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고, 평온을 되찾자 나는 다시 '인디고 수독 모임'을 떠올렸다. 떠올림은 행동으로 이어졌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인디고 수독 모임 송년회에 운명처럼 참석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운명처럼 수독 모임 송년회에 참석했지만 운명의 오묘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독 모임 송년회에 참석하기 전에 나는 한길사에서 나온 <춘추좌전1>  빌려서 집에 놔두고 있었다. 송년회가 끝나면 읽겠다는 마음으로. 송년회에 참석해서 수독 모임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000 샘이 내게 말을 건넸다. 12월 2주 모임 진행자로 나서는 게 어떠냐고. 나는 책이 뭐냐고 물은 뒤에 12월 2주 모임 책이 대만의 지식인 탕누어가 <춘추좌전>을 읽고 쓴 <역사,눈앞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춘추좌전>을 읽으려고 집에 놔둔 사람에게, <춘추좌전>을 읽고 쓴 책을 진행하라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됐다. 이건 운명이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수밖에. 나는 운명에 따라 <역사, 눈앞의 현실>을 읽고 12월 2주 모임에 운명처럼 모임을 진행했다. 저마다 다른 운명의 힘에 따라 <역사, 눈앞의 현실>을 읽은 이들과 함께.

<고전편>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왜 그 오래전 책들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다른 면이 있는 게 분명한데도 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물음에 하나의 정답은 없겠죠. 저마다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답은 제가 알 수 없으니까 저만의 답을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삶이라는 건 관성이 있습니다. 하던 대로 하죠. 하던 대로 하다보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고전을 한 번 봅시다. 고전은 현재 우리의 삶과 너무 달라요. 현재의 삶이 가진 관성이 고전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고전의 힘이 있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자기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조금 더 객관화해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고전의 '다름'이, 우리의 삶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것이죠.
다른 것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저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화해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것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은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인 본성부터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바뀌지 않는 요소들까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고전'은 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로봇과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삶에는 바뀌지 않고,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그 바뀌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여서 삶의 흐름 속에서 살아내야한다고 말하는 고전의 속삭임을 듣고 있노라면, 저는 저 자신이 고전에 담긴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실려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저 자신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류라는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 소속감, 그 실감이야말로 고전을 읽는 하나의 힘이 아닐까요?^^

<고전의 현재화편>

탕누어는 <좌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좌전>을 읽는 탕누어는 자신의 읽기의 흔적을 <역사, 눈앞의 현실>에 담아냈습니다. 이 책에서 <좌전>은 탕누어라는 인간의 삶과 사상과 생각과 사고와 관념과 언어를 통해서 현재의 삶이 됩니다. 탕누어는 <역사, 눈앞의 현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고전의 현재화'를 이룬 것이죠. 탕누어도 했으니 우리라고 못하는 법은 없죠. 저는 12월 2주 수독 모임이 '고전의 현재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가하신 분들이든 참가하지 못하신 분들이든 저마다의 고전의 현재화가, 이 모임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든 하지 않든 본인의 자유이지만(^^;;) 최소한 12월 2주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은 고전의 현재화를 위해 노력해봅시다. 참석하신 분들의 분발을 바라며 후기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글은 끝나지만, 진정한 의미의 끝은 아닙니다. 고전의 현재화라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 있기에. 그저 저라는 인간의 흔적이 사라질 뿐. 진정한 끝이자 시작으로서의 이 글의 마무리는 참여하신 분들의 댓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댓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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