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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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인간 문명의 폐허 위에 고양이 문명을 건설하려는 고양이의 모험담을 그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당연히 인간은 중심이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는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간 독자인 나는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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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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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6.28개월 28일 밤-살만 루슈디

 

 

"나는 이야기하면 항상 셰에라자드가 생각나. 살기 위해, 여성들을 죽이는 왕에게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천일동안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에는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힘 같은 것이 들어 있어. 한 번 시작하면 그칠 수 없고, 듣다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나는 믿어. 그녀만 그런 힘을 가진 것일까? 아니야. <일리아드>,<오디세이아>라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호메로스도, 아서왕 전설이나 성배 전설, 롤랑의 노래를 읊조리는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들도 이야기꾼으로서 이야기의 힘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 켈트 신화, 북유럽 신화, 중국 신화, 일본 신화 속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들도 마찬가지지. 그들은 이야기에 홀린 사람들로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듣는 이들도 이야기에 홀려서 들을 수밖에 없지."

 

"이야기에는 진짜 힘이 있는 것 같아. 시간을 걸쳐서 전해지고 전해져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잖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이야기는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도 전해지고 있지. 문학은 이 이야기의 후손들이야. 문자 시대에 인쇄매체에 적혀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흥미로운 건 20세기에 이야기에 적대감을 가지거나 이야기를 해체하려는 이들이 나타난 거야."

 

"그들은 누구인데?"

 

"현대적인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지. 포트스모더니즘을 한다는 사람들이나 문학적인 실험을 한다는 이들은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해체하거나 파괴하여 자신들만의 문학을 하려고 했지.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오스트리아 작가는 이야기를 증오한다고도 했어. 그런데 실험과 해체의 흐름 앞에서 이상하게도 문학은 길을 잃고, 힘도 잃어버려. 문학의 위기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야. 이런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흐름이 나온 건 서구쪽이 아니야. 20세기 후반에 유행하기 시작한 라틴 아메리카의 붐 소설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돼. 근데 붐소설에서 뭔가 돋보이는지 알아?"

 

"뭐가 돋보이는 데?"

 

"이야기의 부활이야. 서구 문명에서 인위적으로 사라지게 만들려던 이야기가 라틴 아메리카의 붐소설에서는 맹렬히 살아 숨쉬면서 문학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어. 붐 소설에 속하는 작품 중에 실험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는 소설들조차 이야기의 힘을 받아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소설은, 문학은 이야기와 함께 할 때, 생명력을 가지는 것 같아. 소설은 이야기의 자식이니까. 자신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근원적인 것과 함께 할 때 에너지가 생기고 생명력을 받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잖아?"

 

"맞지. 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붐 소설이 또 읽고 싶어지네. 참 붐 소설 이후의 문학적인 흐름은 어때?"

 

"붐 소설 이후 이야기는 부활하여 큰 역할을 차지하게 되지. 붐소설을 쓰는 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문학을 하는 이들도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 속에 잘 쓰게 되거든. 대표적인 인물들이 중국의 모옌이나 영국의 살만 루슈디 같은 이들이야.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붐소설에서 쓰였던 마술적 리얼리즘을 자신의 소설에 집어넣고 있어.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리얼리즘을 부여하면서 소설 속에 집어넣거든. 그런데 이런 환상적인 요소는 과거 이야기의 특징이잖아?"

 

"그렇지. 변신, 요술, 마술, 기적 같은 것들이 과거 이야기에는 자주 등장하지."

 

"맞아. 마술적 리얼리즘을 사용하는 작가들은 과거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받은 현대의 이야기꾼들이지. 그들은 현대의 삶 속에 환상을 담아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하지만 그 환상이 현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야. 오히려 그것은 현재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비추는 거울이 돼."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살만 루슈디가 쓴 <28개월 28일 밤>이라는 소설이 있어. 제목을 계산해보면 1001일인데, 1001일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바로 천일야화야. 그래, 살만 루슈디는 제목부터 1001일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현대판 천일야화를 쓰겠다는 말을 하고 있어. 이 현대판 셰에라자드는 '이계 전쟁'이라는, 마치 SF와 판타지 영화나 소설에 쓰일 듯한 소재를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마계에서 인간계로 넘어온 마족이 등장하고, 마족 중에서 마신들은 변신을 하면서 인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공중 부양을 하거나 손끝에서 번개가 나가거나 자신이 그린 그림 속 존재가 살아나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마계공주의 도움을 받아서 싸우면서 영웅이 되는 식으로."

 

"와우, 마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

 

"맞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정확하게 말하면, 마블의 영화들이 고대의 이야기 흐름을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화했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이 환상적인 모험담이 단지 환상적인 모험담으로만 끝나지 않는 건 이 소설이 가진 여러가지 장치 때문이야. 작가는 첫 부분부터 서양에서 아베로에스로 불리는 이슬람권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를 등장시키고 있어. 이븐 루시드는 자신의 논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잘리와의 논쟁에서 패배하고 궁중에서 물러나게 되고, 쉬는 와중에 인간계에 호기심을 가진 마계의 공주 두니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식들을 낳지. 이 자식들의 후손들이 나중에 영웅이 되는 존재들이 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븐 루시드와 가잘리의 논쟁이야. 이븐 루시드는 철학자답게 이성을 옹호하는 편에 서 있고, 가잘리는 이슬람 신학을 언급하며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이븐 루시드의 패배는 동시대에 신앙에게 이성이 패배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지. '이성'과 신앙으로 대변되는 '비이성'의 대결은 이 책의 중요한 구도야. 미래에 이븐 루시드는 두니아에 의해 영혼으로 부활하고, 가잘리는 마신에 의해 영혼으로 부활하지. 당연하게도 영웅이 되는 이븐 루시드의 후손들은 '이성'의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고, 램프의 지니 시절을 거칠 때 가잘리와 인연이 있었던 마신은 영혼이 된 가잘리의 부탁을 받고 세상을 공포에 빠뜨리고 파괴함으로써 가잘리로부터 이어지는 '비이성'의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 이성을 상징하는 인간 영웅들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마신들과의 싸움은 이성과 비이성의 대결을 이 소설의 핵심 주제로 부각시키면서,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게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어나가지. 여기에 다른 것들이 추가 돼. 언뜻언뜻 스치는 것처럼 언급되지만, 종교적 자유와 관용, 현대의 혐오를 이용하는 정치와 비타협적 배타주의 등등등. 작가는 이성과 비이성의 대결이라는 뼈대 위에, 철학, 사상, 예술, 역사, 상징, 우화, 현대문화와 사회정치적인 현실등의 요소들을 섞어서 다양한 것들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고전적이고 현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살만 루슈디가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이런 점이야."

 

"너는 재밌게 봤겠네?"

 

"재밌게 봤지. 나는 살만 루슈디의 이야기로 쓰여진 소설이 좋아. 엄청난 달변으로, 능청스럽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환상적인 모습을 보이다 보니 계속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거든.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을 현대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까.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건, 이슬람권의 이야기를 서양의 이야기와 섞어서 펼쳐내는 힘이야. 이 부분에서는 살만 루슈디가 현재 가장 독보적인 것 같아.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까? 살만 루슈디가 펼쳐내는 이야기에 매혹된 독자로서 나는 그의 소설이, 그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기를 바라.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를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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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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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식 천일야화. 철학과 사상과 종교와 역사와 판타지와 영웅신화와 모험담과 풍자와 우화와 상징이 뒤범벅된 이야기가, 능청스러운 살만 루슈디의 손끝에서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소설로 태어나 읽는 독자를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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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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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현실의 교차 속에 더해지는 기욤 뮈소식 스토리 전개. 단언컨대 내가 읽은 기욤 뮈소식 소설 중에서 가장 문학성인 높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기욤 뮈소는 역시 기욤 뮈소. 그의 소설에 따라오는 즐거움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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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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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5.인생은 소설이다-기욤 뮈소

 

 

1.

 

기욤 뮈소, 내게 이 이름은 '킬링타임용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 부담감 없이, 그냥 앉아서 아무 생각없이 보고 즐기다가 끝나는 영화 같은 소설. 약간의 낭만, 약간의 환상, 흥미로운 전개와 클라이맥스,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까지, 완전히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 나는 기욤 뮈소를 킬링 타임용 영화 같은 느낌으로 지금까지 읽어 왔다. 그런데 <인생은 소설이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2.

 

항상 비슷한 느낌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독자 입장에서 지겨운 일이다. 읽는 독자도 지겨운데, 비슷한 글들을 쓰는 작가도 지겹지 않을까? 나는 기욤 뮈소의 소설들이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전개를 가진 소설들이라고 생각해왔고, 비슷한 소설을 읽으면서 써내는 작가도 지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작들에서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기욤 뮈소의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2020년작인 <인생은 소설이다>는 그 변화의 정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3.

 

소설 속 소설인 액자소설 형식에,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방식의 전개는 익숙한 형식이다. 실험적인 소설을 써왔던 프랑스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부터, 20세기 후반의 문학의 새로운 부활을 주도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붐소설 작가들과 거기서 비롯된 마술적 리얼리즘을 자신의 스타일로 써온 작가들, 역시 실험적이고 해체적인 소설을 써왔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들까지, 이런 메타픽션 형식의 소설은 문학을 읽어온 이라면 낯설지 않은 형식이다. 하지만 메타픽션 형식을 기욤 뮈소가 썼다는 건 특별하다.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소설을 쓰며, 팔리는 소설로서의 이야기를 써온 작가가 문학적 자의식과 문학적 실험,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메타픽션을 썼다는 것은 스타일의 변화를 예고한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실제로 <인생은 소설이다>은 작가와 작중 인물의 대화, 작중 인물끼리의 대화를 통해서 여러가지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주고받는다. 창조자인 작가의 권위의 한계에 대한 질문, 작중 인물의 자율성에 대한 토론 같은. 결국은 이 소설은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본령을 지키지만, 동시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품고 가는 소설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게 메타픽션이 가진 힘이기에.

 

 

4.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읽히고 팔리는 작품을 써온 로맹 오조르스키가 마주친 현실의 고난, 현실의 고난 앞에서 멈춰진 작품 속 주인공인 소설가 플로라 콘웨이가 소설 속에서 마주친 딸의 실종, 딸의 실종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자신이 작품 속 주인공임을 깨닫고 작가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소설과 현실의 교차, 그 뒤로 이어지는 현실과 소설의 문제 해결에까지 이르기까지, 이 작품은 메타 픽션 형식에 기욤 뮈소 특유의 즐겁고 흥미로운 전개를 더하며 끝을 향해 달려간다. 소설의 끝을 본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소설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겉모습을 취한 메타픽션 소설이 아닐까 하는. 기욤 뮈소표 소설 같아서 그 힘이 약해보이지만, 문학의 본령을 되묻는 작업을 기욤 뮈소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엔터테인먼트 소설과 예술로서의 소설 그 어디쯤엔가 위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즐거움을 주는 소설과 예술로서의 소설 중간 어디쯤엔가 위치하며 왔다갔다 하는 듯한. 필연적으로 궁금증이 생긴다. 이 다음에 나오는 기욤 뮈소의 소설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인생의 소설>보다 더 문학적인 소설로 나아갈까? 아니면 예전처럼 즐거운 이야기로 되돌아갈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기욤 뮈소가 문학성의 대지로 발걸음을 내딛었으며, 그 발걸음이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형성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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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0 2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욤뮈소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하나같이 다 재미있더라구요 완전 잘 읽힘~!! 저도 이책은 정말 좋더라구요. 액자의 액자 구성이 좀 특이하더라구요😆

짜라투스트라 2021-09-10 21:00   좋아요 2 | URL
네, 저도 특이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