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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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밀실살인게임-우타노 쇼고

우타노 쇼고는 종잡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그의 책들은 본격추리소설이라는 장르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의 세단편 중 하나인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정통 미스터리에 대한 풍자,  

[생존자,1명]은 무인도에서의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추리소설에 대한 동경이 담긴 애잔하고 쓸쓸한 미스터리였고,
<시체를 사는 남자>는 에드거 앨런 포나 에도가와 란포가 쓴 것같은  

탐미적이고 기괴한 추리소설이었고,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사회파적 성향을 가미한 서술트릭 작품이었고,
<여왕님과 나>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아웃사이더들이 펼치는  

심리 미스터리 소설이었습니다.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우타노 쇼고가 추구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밀실살인게임>에서의 그의 또다른 변신을 기대하며 책을 들었습니다.
제목부터 웬지, 스멀스멀 불길한 포스를 품기던 이 책을 넘기며 초반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저는 와우!!라는 감탄사를 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시작하자마자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리며 기선제압을 합니다.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광인들이,  

역시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살인게임을 펼칩니다.
여기까지 읽고, 저는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윤리적 의무감에 사로잡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가진 채,
책을 덮어야 하는가, 아니면 윤리적 판단중지를 하고 소설은 소설로만 읽을 것인가.
하지만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자 하는 욕망이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더군요.  

이 욕망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멈춰버리는 윤리적 판단중지 상태를 만든 다음에  

저를 미치광이들의 살인게임으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상당했지만 계속 읽어나가자 어느 순간 익숙해지더군요.
네, 저도 어느새 그들의 냉혹한 살인게임에 동참하고 있었던 셈이죠.
(음, 그게 어쩌면 더 끔직한 일일지도 ㅠㅠㅠ)

책의 큰 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프라인으로 만난 적 없고,  

오직 온라인으로만 대화하는 사람이 게임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불법도박도 아니고,온라인 게임도 아니고,컴퓨터 게임도 아니고,TV에 연결해서
하는 콘솔게임도 아니고,플래시 게임도 아닌 살인게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 명중 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범이 살인과 연관된 수수께끼를 말하면
나머지 게임 참가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입니다.  

반드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살인범은 제공해야 하구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토대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살인은 하나의 오락입니다.  

그들은 원한이나 이익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재미라는 목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아무 연관도,관계성도 없는 사람들을
단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죽이는 겁니다.
'죽이고 싶은 인간이 있어서 죽인 게 아니라 써보고 싶은 트릭이 있어서 죽였지.'

어떻습니까? 정말 비상식적이고,비도덕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자신이 도덕적이고,윤리적이며,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책을 읽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타노 쇼고는 처음부터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명확하게 제시했나 봅니다.  

처음 부분을 읽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읽지 마라는 엄포인 셈이죠.

그 때문에 졸지고 비상식적이고, 비도적이며,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린 저는 그런 엄포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판단 중지니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를  

머릿 속으로 외치며 읽어나갔습니다.
궁금했던 거죠. 그들이 무슨 게임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며,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윤리니 도덕이니 상식이니를 제외하고 읽어나간다면, 그들의 게임은 실로 흥미진진합니다.
어떠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살인게임은 언제나 예측을 불허합니다.
고전적인 알리바이 트릭,밀실살인 부터 현실에 스플래터 호러영화에 나올 잔인한 이야기도 있고,
심리적인 허를 찌르는 트릭도 있습니다.
(게임의 흥미진진함은 작가의 역량인 셈이죠.  

윤리적인 판단을 제외한다면 우타노 쇼고의 이야기 구성 능력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고칠 수 없는 수준까지 병들어  

살인게임을 저지르는 광인들의 파티는 소설 내내 계속되다가, 

소설의 90%를 넘어가면 광인이 인간으로 변하는 지점이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수도꼭지에서 드디어 인간성의 이야기가  

수돗물처럼 나오려는 시점이 등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소설은 우리의 뒷통수를 강하게 때립니다. 기분 나쁠 정도의 반전이 나옵니다.
인간성의 이야기가 나오려는 시점에 소설이 끝나버리는 것이죠.  

그리고는 다음 편이 있다고 말합니다. ㅎㅎㅎ
(일본에서는 <밀실살인게임 2.0>이 이미 발표된 상황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이야기에 끌린 저로서는
'왜 안 끝나?'보다 '다음 편을 읽고 싶다'라는 욕망이 더 강했기에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다만, 다음편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망을 가져봅니다.

어쨌든 소설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폭발적으로 잔인하지도 않고,끔직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비도덕적 상상력의 대지를 개척한 이 소설은,  

바로 그렇기에 어떤 잔인하고 끔찍한 영화보다 끔찍합니다.
살인 자체의 끔직함과 잔인함이 아니라,  

살인 동기와 인간 심리의 끔찍함이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끔직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더더군다나 인간적인 이야기가 끊어진 게 안타깝습니다.

이제 다음 편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물론 다급하게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유롭게 광인들의 게의 결말을 기대해 볼 생각입니다.  

추가적으로 우타노 쇼고의 또다른 변신도 기대해 보렵니다.
그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설마 벌레로 변신한 남자가 사람들을
죽이는 내용까지 가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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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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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브리다-파울로 코엘료 

코엘료가 <연금술사> 이후에 출판한 소설로, 90년도에 처음 나온 소설이 <브리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금술사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으며,
연금술사의 여성판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이룩한 자아의 신화가,
마녀로서 신비주의적인 자아의 각성을 이루는 브리다의 자아 발견의 여정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그녀를 돕는 인물들을 보면서 산티아고의 여정을 돕는 인물들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그 인물들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조력자로서 산티아고를 돕던 인물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심지어, 책 중간에 양치기가 나오는데 그의 이름이 산티아고 입니다.^^
*p.195
오후 내내, 그들은 눈 덮인 숲을 거닐었다. ...(중략) 그러다가 양떼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을 만났다.
"안녕, 산티아고!" 마법사가 목동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신께서는 목동을 각별히 총애하시지. 자연과 침묵, 인내에 익숙한 이들이거든.
그들은 우주에 소통하는 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까지 코엘료의 문학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아무리 봐도 신비주의적 각성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연금술사>,<브리다>가 위치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브리다>와 <연금술사>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랑에 관한 중요도의 차이입니다.
<브리다>에서는 사랑이 핵심적인 가치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 소울메이트와의 만남 및 그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소설의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올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과 인간들간의 운명적인 사랑의 의무,
그리고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은 <피에트라~>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사용됩니다.
(<피에트라~>에서는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이 신의 여성성이라는
더욱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또 섹스를 통한 신비적인 합일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11분>의 예고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둘러보니 <브리다>는 파울료 뒷작품들이 잉태된 씨앗같은 느낌입니다.

에, 어쨌듯 지나치게 코엘료스러운 신비주의 소설이라서
오히려 저에게는 신비적인 느낌이 떨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영적 각성 과정은 흥미로웠고,
사랑의 신비함을 새삼 실감하는 소설이었다 정도로 <브리다>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문뜩 허탈해집니다.
<브리다>는 소울 메이트도 만나서 필생의 사랑을 이루고,
영적 각성까지 해서 미래에 마스터가 될 인물이 되고,
스승인 마법사와의 인연으로 진실한 사랑의 의미도 깨닫는 판에
저에게는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이거 이런식이라면 저도 마법사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당장 쓸만한 마법사 찾아서 숲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내 소울메이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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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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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빌린 책,산 책,버린 책-장정일  

오랫만에 읽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독서일기라는 형식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답게, 그의 서평은 일기의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하나의 글이다. 서평이 단지 책을 평가하는 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읽을만한 하나의 형식임을 보여주는 책.
어떤 블로거는 그의 글이 힘이 약해졌다고 혹평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의 자유롭고, 때로는 날카로우며,삐딱하며,비판적인 글들에 통쾌함과 매혹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책 제목과 달리 그가 소개한 책들은 나의 미래의 독서목록에 읽어야 책으로 등재될 예정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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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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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빵가게 재습격-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지금 '~이즘'과 '~주의'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사상이나 철학,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냉혹하고도 비정하며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다.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즘'과 '~주의'보다는 생존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더욱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서 조각조각 해체된 사상의 잔해들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이 해체는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체된 사상을 대신해 주도권을 잡은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원자회된 개인들은 자신들의 좌표와 방향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불안해다가 결국 생존이라는 현실 명제에 주도권을 넘겨줘버렸다.
그것이 아마 지금의 우리 모습일 것이다.

나는 항상 그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린다.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좌절된 학생운동의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을 도시적인 감성으로 그려내기 시작한 이 작가는 지속적으로 거시적인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혼란스럽고,불안하고,모호한 모습과 
그러한 개인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자신만의 개인주의적인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단편집인 <빵가게 재습격>이 있다. 여전히 카오스적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그럼에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이 펼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의 모음집이나 다름없는
이 단편집에는 하루키 특유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해학과 익살의 맛까지 보여주며 하루키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한다.
참을 수 없는 허기 때문에 한밤중에 맥도날드를 습격해 돈이 아닌 햄버거를 훔치는 부부의 이야기와, 수수께끼의 코키리 실종 사건의 진실을 쫓는 남자의 이야기와,
바른 생활 사나이인 여동생의 결혼 상대에게 반감을 느끼는 바람둥이 오빠의 이야기와,
헤어진 쌍둥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남자의 이야기와,
집에서 일기를 쓰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1881년의 인디언 봉기와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을 연관시키는 사람의 이야기와,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시작으로 기묘한 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에서,
방향성을 상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은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해내며, 그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쫀득쫀득한 고기를 씹는 것 같은 소설을 읽는 맛을 선사한다.

혼란스러운 도시적 개인의 삶을 읽을 만한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하루키의 능력에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은 끝나있었다.
너무나 빨리 끝나버린 독서의 시간에 당황했고, 당황하다니 보니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허기에 시달리다 보니 홀연히 하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그것은 '빵가게를 습격'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고 나는 소설의 첫부분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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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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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1)질문
1740년 7월 20일 페루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진다.                                               

당시 식민지 페루의 가장 멋진 다리로,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던 이 다리는 혼자 무너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그때 다리를 걷고 있던 다섯 사람을 죽음의 세계인 명부로 끌고간다.

신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몰두하던 주니퍼 수사는 우연히 그 다리 근처에 있다              

다섯 사람이 발버둥치며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그것을 목격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회라고.
신의 섭리가 세상을 작동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완벽한 불의의 사고로 죽은 다섯 사람이야말로 신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조사로 그들이 죽을 만한 죄를 저지른 사실이 증명된다면,
그때의 사고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사는 죽은 다섯 사람의 조사에 매달린다.
6년의 시간동안 걸쳐 조사를 한 수사는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다.

장장 6년의 세월동안 다섯 사람의 삶의 궤적을 쫓은 수사.                                                     

수사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2)대답
수사는 거기에서 인간을 보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을.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음이 삶의 절대적인 기본 조건을 이룬 상황에서
각자의 욕구와 감정과 이성이 덧붙여져 각자의 삶을 형성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때의 인간이란 평범하기도 하고, 평범하지 않기도 했다.
때로는 광기에 휩싸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사악해지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비겁해지고, 때로는 남을 괴롭히고,
때로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때로는 삶이 버거워 도망치기도 하고, 때로는 탐욕스럽고,
때로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때로는 마음의 어두움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때로는 짐승과 같은 욕망에 휩싸이고,
천사와 악마,어린애와 어른을 왔다갔다하는 인간의 모습들.                                                           

단순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이상하며 특별한 것인지 드러내주는
글에서, 그가 본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신비였다.

3)결말
자신감있게 시작한 수사의 책은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오묘함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책이 증명하는 사실에 당황한 교단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의 논리에 책이 위배된다는 생각을 하고,
책과 수사 모두를 이단으로 결정해 화형을 명한다.
누구보다도 신의 섭리를 믿었던 수사는 그렇게 자신의 책과 함께 화형당한다.
단지, 인간 삶의 흔적을 따라가 그들 삶의 복잡함을 드러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4)살아간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오묘한 것이다.
수사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려 시작한 행위가 죽음이라는 예상밖의 행위로
끝나버린 것처럼.
우리는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삶이란, 인간이 살아간다는 행위란
그렇게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원시적인 욕망과 감정, 
문명화된 이성과 내적인 규율의 충돌을 계속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그런 존재들 다수가 모여 만들어낸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공동체를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네 삶이란 쉽게 얘기하거나, 비하할 수 없다.
이 어렵고도 쉬운 삶의 진실을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더해 그려내기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소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생생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로서,
영문학의 고전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고전의 힘이란 우리네 삶의 힘과 일치한다.
삶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삶이 되는 가상의 이야기로서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그 문장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소설로서
 내 머릿속에 깊이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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