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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ㅣ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평점 :
8331.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 서평을 쓰면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연속적으로 하나의 책에 대한 서평을 두 개 쓰는데, 처음에 쓰는 글은 책 내용을 대충 훑고, 다른 하나는 책에 대한 내 감정을 쓴다고. 그런데 <공리주의> 서평을 쓰다보니 처음에 쓴 글에 책 내용은 거의 없고 제 감정만 잔뜩 썼네요.^^;; 역시 저는 제 마음대로 어떤 형식에 관계없이 글을 쓰나봅니다. 제가 한 말에 비추어보면, 이제는 책 내용을 담은 글을 써야하는데, 제대로 될지 알 수 없네요. 그래도 어쨌든 써야 하기에 꾸역꾸역 적어 봅니다.
제가 공리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정의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전에도 다른 책에서 벤담이나 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단편적으론 공리주의를 알긴 했지만, 관심의 정도는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의 가장 앞 부분에 공리주의가 언급되고, 그걸 마이클 샌델이 비판하면서 저는 궁금했습니다. 공리주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벤담의 말대로 개인의 행복이 수량화가 되는지도 궁금했고. 그런데 <공리주의>를 보니, 밀은 벤담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계량화에서 이어지는 '양적 공리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벤담이 부정한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합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우월하다면서.
적어놓고 보니 '공리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군요.^^;; '공리주의'는 쉽게 말해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연결시키는 사상입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으로. 벤담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죠. 여기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공리'입니다. 이 '공리'의 한문을 잘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공리주의'의 '공리'가 '공공이익'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한자가 다르더군요. '공리주의'의 '공리'는 '公利'가 아니라 '功利'였습니다. 한자말과 책의 내용을 써서 풀이해보면, '공리주의'의 '공리'는 '공공이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 ' 정도로 쓸 수 있습니다. 공리의 원어인 'utility''에도 이 뜻이 더 잘 맞는 것 같고요.
어쨌거나 벤담처럼 밀도 공리주의자로서 개인의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를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밀은 벤담처럼 수량화된 행복은 거부했습니다. 그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우리가 육체적인 쾌락 보다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도적적 규범과 의무, 지적인 욕망을 더 높고 고귀한 행복의 추구와 연결시키는 듯한 이 주장은, 밀이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공리주의' 안에 품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적고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네요. 이제 제가 할 말을 하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유튜브를 보고 세상을 배우는 이 시대에 <공리주의>라는 윤리학 책을 읽는 것이 어쩌면 낡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윤리학이나 도덕철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사고하는 것이 고색창연한 빛을 지니게 된다고 해서, 그 빛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건재하다면, 인간 삶의 기본적인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들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공리주의>는 그렇게 시대를 흐르면서 지속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의 한 버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일이란, 우리 시대의 도덕적 윤리적 논의, 우리 시대의 공리주의적인 논쟁을 지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