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
우치다 타츠루 &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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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5.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2)

두 달 넘어 처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너무도 익숙한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옛사랑을 다시 찾은 기분과 비슷하달까.^^;; 오버하는 듯한 느낌은 있는데, 오버만은 아닙니다. 사용하지 않고 버려두었던 내 뇌의 독서회로가 맹렬할게 돌아가면서 생겨난, 일종의 쾌락작용이 저를 그런 기분에 젖게 만드니까요. 노스텔지어, 향수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두 달 동안 느끼지 않았던 예전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되니까요.

글쓰기에 관해서는 조금 다릅니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서활동을 통해서 받아들였던 인풋에 비해서, 글로서 표현되는 아웃풋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이 제 독서와 글쓰기의 지나간 과정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슬플 것 같아서요. 인풋과 아웃풋의 불균형으로 뇌에 무리가 생겨났던(잡생각이 너무 많아진다는 부작용이랄까^^;;) 지난날이 되풀이된다는 것의 슬픔. 그래서 이번에는 달라져보려고 합니다. 반드시 달라진다고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달라지려는 몸부림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몸부림은 칠 예정인데, 이 몸부림 자체도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몸부림만 계속 친다면, 예전처럼 지겹거나 권태를 느껴서 떨어져 나갈 테니까요. '어떤 몸부림을 쳐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야합니다. 고민해 봅니다. 제 글쓰기에 관한 몸부림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민 끝에 저만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음... 저만 쓸 수 있는 글은 도대체 뭐지요? '저만 쓸 수 있는 글'에 대한 정의가 궁금해집니다. 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고민 끝에 저만 쓸 수 있는 글은 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장난 치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고 고민만 계속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저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만 쓸 수 있는 글이란 게 뭔지 저도 알 수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물어보고 고민하면서 글을 쓸 수 밖에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어쩌면 저만 쓸 수 있는 글 이라는 말 자체가 환상일지 모릅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나 혼자서 스스로 나만의 글쓰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읽은 책, 제가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형성된 생각과 사고, 내가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나만의 삶의 길, 나와 관계된 타인의 생각, 내가 살아온 사회와 문화의 힘 등이 내게 영향을 미친 상태에서 제가 글을 쓰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만의 완벽한 오리지날리티로 구성된 글이란 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잘 섞어내는지가 중요할 겁니다. 섞어내는 방식에서 제 글쓰기의 독창성이 나타나는 것이죠. 말은 쉽게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독창성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길이 없으니까요.

독창성, 독창성 하다 독창성이라는 생각은 멀리 날아가버립니다. 대신에 이상한 경험이 떠오르네요. 두 달 넘어서 처음으로 도서관에 갔다 집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가방 안에는 새롭게 읽은 책들이 들어있습니다. 가슴은 책을 새롭게 읽는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릅니다. 버스 안의 의자에 앉아 폰을 검색해봅니다. 온라인 독서 모임의 첫 책으로 읽게 될 <다시 자본을 읽자>라는 책을. 구글로 검색하는데, 실수로 '다시 자본을 읽자'가 아니라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검색하게 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제 손이 왜 '다시 자본을 읽자'가 아니라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눌렀을까요? 구글의 자동검색 기능에 따른 실수라지만 실수치고는 너무 오묘합니다. 이왕 실수한 김에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노래를 들어봅니다. 오랜만에 듣지만 노래는 좋네요. 가사가 마음에 팍팍 와닿습니다. 가사를 파고 들어보니 이게 내 마음과 똑같습니다. 마치 제 마음을 노랫말로 만든 것처럼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

널 기다리는게

나에게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책을 다시 만난 저의 자세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의 가사와 비슷합니다. 헤어진 옛사랑을 다시 만나서 기뻐하는 모습, 잃어버린 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느낌. 책이라는 옛연인을 다시 만나서 기뻐하는 제 모습을 노랫말로 새긴 것처럼. 어쩌면 '다시 자본을 읽자'는 저의 행동에 따라 저의 마음 속에서 '다시 책을 읽자'가 되고, 그게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로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도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는 일본에서 청년들이 마르크스의 책을 읽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이 지나서 청년들이 마르크스의 책을 읽지 않은 시절이 되자, 마르크스의 책을 읽던 시절을 보낸 저자들이 나서서 마르크스의 책을 읽자고 외치는 책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지나간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사랑의 힘을 현재의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옛사랑의 힘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들의 말에 동의합니다. 마르크스의 비판정신, 주어진 상황 그대로를 주어진 상황 그대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파악하면서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수사학,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관념을 가지는지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과 사상은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합니다. 주어진 그대로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넘어서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만드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지금의 삶에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살피며 마르크스의 사상의 변화과정을 살피는 방식으로, 아직도 유효한, 아직도 필요한, 옛사랑의 힘을 쉽고 재미있으며 지적인 방식으로 이 책은 읊조리고 있습니다. 저 또한 두 번째 읽지만, 책을 안 읽은 시간 탓인지, 새롭고도 익숙하게 마르크스라는 옛 사랑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가 다시 떠오르네요.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있었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괜한 우려였는지

서먹한 내가 되려 어색했을까

어제 나의 전활 받고서

밤새 한숨도 못 자 엉망이라며

수줍게 웃는 얼굴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일까

그땐 우리 너무 어렸었다며

지난 얘기들로 웃음짓다가

아직 혼자라는 너의 그 말에

불쑥 나도 몰래 가슴이 시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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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김동률에서 빵 터졌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쓰셔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글 많이많이 올려주시길 기대할께요!

짜라투스트라 2021-04-22 14:2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