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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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1.핀치콘티니가의 정원-조르조 바사니

미콜 머리 위쪽의 새파란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여름 하늘이었다. 그 하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실로 그 무엇에도 변함이 없었다.(63)

사물들도 죽어, 친구. 그러니까 사물들도 죽어야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죽게 놔두는 게 더 나아.(146)

가장 증오할 만한 반유대주의는 이런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불평하다가, 또 반대로 그들이 주변 환경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평균적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다.(208)

언제든 내 편에서 마음대로 현재를 사랑하고 응시할 수 있기에 현재가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나의 불안감은, 그녀의 불안감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악습이었다. 즉 앞으로 나아가면서 항상 고개는 뒤를 향해 있는 것.(276)

그녀는 미래를 증오했고 미래보다는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오늘"을, 그리고 과거를, 친근하고 달콤하고 성스러운 과거를 훨씬 더 사랑했으니.(367)

문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저는 지금까지 서평을 쓰면서, 독서모임에 나가면서 이 질문에 대한 백가지 서로 다른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 글을 통해 문학에 대한 백 한번째 다른 정의를 내려보겠습니다. 문학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거나(여기에는 SF나 판타지 문학이 속하겠죠.), 과거에 존재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이나 잊혀져버린 것들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개인적으로 저는 어려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언어로 '부재의 현전'을 만드는 예술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 뜬금없이 '부재의 현전'이라는 어려운 말로 문학의 정의를 내린 것일까요? 그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때문입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라는 소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부재의 현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죠. 이 소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반의 이탈리아 도시 페라라의 유대인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현존하지 않는 그 때의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내기 위해, 작가인 조르조 바사니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재가 현전하는 소설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부재의 현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로 들어가서 참혹하게 죽었거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이탈리아 페라라의 유대인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작가는 이렇듯 생생하게 되살려낸 부재의 현전으로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고립되어 가고, 어떻게 몰락해가는지를. 그 중심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와 핀치콘티니 가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자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인물인 '나'는, 유대인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오면서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은 부유한 유대인 가문으로서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거대한 저택을 짓고 거기에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살아온 이들입니다. 1938년에 '인종법'이 이탈리아에서 발표되며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차별을 받기 시작하자, 페라라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도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다른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고, 그 때에 그들 가문과 교류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나'가 있습니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가문이 외부의 강제적 고립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으로 도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교류를 선택한 것이죠. '인종법' 이후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던 '나'는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과 교류하며 외부 상황에서 겪는 불만족이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고민들을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핀치콘티니가의 공간은, 자신의 불만과 고민이 해소되는 공간이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게 만드는 꿈과 희망이 깃든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가문의 딸인 미콜은 나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의 정수처럼 보이는 인물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죠. 이상은 이상일 뿐이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랑이 실패하고, 자신이 이상처럼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더 나아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도 파악하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나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죠. '현실의 직시'는 나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현실의 직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유대인 차별과 2차 대전이라는 현실. 그 현실 앞에서 가문의 사람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습니다. 내 눈앞의 현실에서 시대적 현실이라는 더 거대한 현실로의 상황 변화. 소설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나'가 전쟁이 끝나고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첫 부분에서 시작된 과거 회상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른이 된 '나'가 자신이 어른이 된 과정을 회상하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가장 독특하게 느꼈던 것은 이 소설의 담담함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가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고립으로 몰아넣는 시대적, 정치적 상황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이룹니다. 마치 공기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은 그런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상황을 하나의 배경처럼 쓰며,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중점을 둡니다. 등장인물은 자신들을 차별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나갑니다. 저자는 '피해자로서의 유대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 저자가 유대인들이 피해자로서 시대에 차별받고 희생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비록 차별받고 피해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문학적인 인간성의 복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시대적,정치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지만, 조르조 바사니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그의 펜 끝에서 페라리의 유대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말다툼하고, 서로 존중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오직 희생자의 틀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조르조 바사니의 <핀치콘티니가 정원>은 그래서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됩니다. 홀로코스트 문학이 시대적,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증언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인간적인 양상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문학적 자산으로. <핀치콘티니가 정원>이 알려주는 그 아름답고 슬픈 문학적인 진실 앞에서 저는 그저 감탄, 또 감탄을 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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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9-11-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짜라투스트라 2019-11-11 13: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