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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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22)
모든 기원에는 기원이 있는 법이야. 살면서 일어난 많은 일은 한쪽 구석에 쌓여만 있는 듯싶다가도 때가 오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법이야.(57)
임신이란 말이야. 타인의 생명이 네 배에 달라붙는 거야. 고통 끝에 겨우 뱃속에서 떼어냈다 싶을 테지만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더 구속할 거야. 태어나자마자 널 밧줄처럼 옭아맬 거야. 아이를 낳으면 너는 더 이상 네 인생의 주인이 아닌 거야.(323)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98)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411)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445)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495)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정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생각보다 두꺼운 책 두께에 겁먹다가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책두께는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페이지 터너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해야할요까. 그리고 1권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2권을 찾아서 읽게 됩니다. 2권 읽으면 당연하게도 3권으로 이어지고요. 마치 주술에 홀린 사람처럼 다음 책을 찾아서 읽게 되는 현상을 경험한 저로서는 확실히 나폴리 4부작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그 힘을.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나폴리 4부작의 3편입니다. 첫편에서 유년기를 지나 성장하는 두 여인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가 그려졌고, 2편에서는 어른이 된 두 여인의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삶이 펼쳐졌다면, 3편에서는 중년이 된 두 여인의 삶이 그려집니다. 특히 강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릴라에게 강하게 엮여 있던 고향을 '떠나간 자' 레누가, 릴라와의 끈을 상당부분 끊어내고 타지에서 자신만의 삶을 사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중심입니다. 하지만 레누의 삶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릴라라는 자신과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간직한 친구와 멀리 떨어진 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만 나폴리의 가난한 계급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부유하고 지적인 가문 출신의 남편을 둔 삶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68혁명이라는 거대한 혁명의 물길과 그 뒤를 이어 벌어진 반동적인 파시스트들의 테러가 벌어지는 1960,1970년대 이탈리아의 불안한 현실까지 더해져 불안한 중년의 나날들을 보냅니다. 지적이고 선하지만 자신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남편과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삶들, 자기자신으로 살지못하는 여성의 서글픔도 더해지고요. 작가는 그 모든 것들을 매혹적인 이야기의 방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내며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의 장을 열어두고, 비슷한 걸 이미 경험한 이들에게는 공감의 장을 열어내죠. 저의 경우에는, 제가 겪은 일이 아님에도 마치 내가 레누나 릴라가 된 것처럼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잘 읽히고 인간의 마음을 잘 파고드는 소설의 힘을 느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여성의 삶을 삶 그 자체로서 경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소위 여성의 삶을 이론화했을 때 통계나 이론으로만 축소되어 삶의 진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통계나 이론없이 여성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 퉁퉁 부어오른 젖무덤, 남편의 무관심 같은. 이론이나 통계가 보여주지 못하는 삶의 디테일이 묘사될 때 우리는 여성의 삶을 체화하며 공감하게 됩니다. 저는 이게 소설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론이나 숫자로만 표시되는 통계와는 달리, 소설은 삶을 그 자체로서 독자에게 공감할 수 있게 그리며 삶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죠.

나폴리의 가난하고 폭력적인 삶과는 멀리 떨어진 채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레누와 나폴리의 힘겨운 삶의 조건속에서도 살아남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릴라의 삶을 허겁지겁 들여다보니 소설이 끝나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다음편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갈망은 오직 책으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제 다음편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로 넘어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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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가 내세우는 출산 장려 정책은 여성의 삶을 구속하고 통제하는 근시안적 발상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에게 자녀를 낳으라고 강요합니다. 요즘은 기혼 남성도 양육 및 가사노동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집안일을 전담하고 건 여성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8-06-06 22:59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