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총 7개의 이야기 중 6번째로 등장하는 ‘일곱 번째 남자‘ 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소설에선 한 남자가 거친 비바람과 파도 등으로 인해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자신이 경험했던 악몽과도 같았던 순간에 대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밑줄친 문장에서 ‘태풍의 눈‘이라는 것에 대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용어를 얼핏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몰랐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통해 이 ‘태풍의 눈‘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여기서의 핵심은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면 잠깐 동안은 안전하지만 머지않아 굉장한 위기가 닥쳐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만간 화자가 경험하게 될 상황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지금 태풍의 눈 안에 있는 거야‘ 하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셨습니다. ‘잠깐 동안은, 아마 십오분이나 이십분 정도는 잠깐 쉬어가는 것처럼 이 고요함이 계속될 거야. 그런 다음엔 조금 전과 같은 폭풍우가 다시 몰아닥칠 거란다.‘ - P172

그것은 이유 없는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파도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파도는 확실히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파도는 그곳에 있는 내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제부터 나를 그 손바닥 안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꼭 거대한 육식동물이 나를 먹잇감으로 점찍고서, 그 날카로운 이빨로 나를 갈기갈기 찢어 먹는 꿈을 꾸며 초원의 어딘가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P176

파도란 절대 한 번만 왔다 가버리지 않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밀려오는 습성을 지녔다 - P181

혹시 나는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P193

내가 K의 표정에서 느꼈던 강한 증오의 빛은, 그 순간 나를 사로잡고 지배했던 깊은 공포의 투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P194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공포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 P198

"나는 지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시간은 앞으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설사 너무 늦었다고 해도, 마지막에 이렇게 구원받고 마침내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채 공포의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이 인생이 끝나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 P199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공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공포는 확실히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서 때로는 우리의 존재를 압도해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공포를 향해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무엇인가에 줘버리게 됩니다. 내 경우에는ㅡ그것은 파도였습니다." - P200

야마노테(고지대에 있는 주택이란 뜻으로 고급 주택이 많은, 이른바 부자 동네를 말함) - P207

"약간의 순서 차이가 큰 의미를 가져올 수도 있지. 간단히 포기해버리면 희망이 없잖아." - P211

"가장 괴로운 건 공포라는 거야. 실제 느끼는 아픔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아픔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싫고 두려워." - P212

해야 할 일 같은 건, 그 어디에도 단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만은, 있을 수가 없다. - P217

"장님 버드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지만, 뿌리는 땅속 깊은 곳까지 뻗어내리고 있어" 하고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자라면, 장님 버드나무는 더 이상 위로는 뻗어가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만 뻗어가는 거야. 마치 암흑을 양분으로 삼기라도 한 듯 말이야." - P225

암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살아가는 경향이 응축된 것이기도 하다 - P228

"어디나 대개는 같아." 사촌 동생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맥 빠진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검사를 한다고." - P229

"누구의 눈에나 다 보이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 P231

‘인디언을 보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인디언은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 P232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에. - P236

《렉싱턴의 유령》은 오컬트(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한 내용의 작품 일곱 가지를 담은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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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이후 일어난 바둑계의 지각변동에 대해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인공지능이 바둑 외의 다른 분야(저자가 속한 문학업계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도 조심스레 예상해보고 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바둑이라는 것이 그것을 두는 사람의 철학이 담긴 일종의 예술인지 아니면 냉정하게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지는데, 오랜기간 프로 바둑기사로 이름을 날렸던 유창혁 9단의 말은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게 만든다. 유 9단은 바둑을 예술이라기보다는 결국엔 승부를 겨뤄야 하는 스포츠라는 점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본문을 쭉 읽다보면 물론 모든 프로바둑기사들이 유 9단의 생각과 똑같진 않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기사들마다 각자 목표하거나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독자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덧붙여보자면, 유 9단 같이 승부를 중시하는 프로 기사들의 경우 물론 바둑에 담긴 어떤 철학이나 예술성 같은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돈을 받는 프로기사로서 어떤 결과물(예를 들면 대회 우승 같은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상당한 부와 명예를 좀 더 우선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바둑에는 철학과 예술이 담겨있다고 말하는 기사들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부와 명예같은 외적인 가치보다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나름대로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내적인 가치에 좀 더 우선순위를 두고 바둑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마다 성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결국에는 여기서 말하는 바둑이 됐든 바둑이 아닌 다른 어떤 분야가 됐든 간에 각자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거기에 맞게 매순간 의사결정을 해나가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바둑에 예술적인 부분도 있고 게임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승부죠. 우리가 어떤 작품을 발표하고 누구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승부를 통해 보여주는 거죠. 예술적으로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해도 승부에서 지고 패자가 되면 그 작품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런 걸 예술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죠. 승부에서 이기고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 거지, 그 전체를 예술이라고 하는 얘기는 좀 안 맞는 거 같아요." _유창혁 9단 - P151

우리는 인간 예술가와 완전히 무관한 풍경을 보면서도 ‘예술이네‘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풍경 자체를 예술작품이라고 진지하게 여기면 곤란하다. - P151

최선을 다한 바둑은 다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_이희성 9단 - P152

"바둑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승부에 임하는 기사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더 중요해요. 바둑의 예술성은 대국자들에게 달려있는 거죠. 똑같은 그림이라도 혼신의 힘을 바쳐 성의 있게 그린 사람과 그걸 보고 베낀 모작의 작품성이 같지는 않잖아요. 기보가 작품이 된다 해도 거기에는 기사들의 서사가 있어야 해요." _김찬우 7단 - P163

"승부는 그걸로 끝나는 거고, 예술은 그 과정을 중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에요. 그리고 예술은 당사자가 아닌 남이 평가하는 면이 중요한 것 같고요." _최명훈 9단 - P163

신분이 바뀌었다고 인식까지 한순간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많은 프로기사가 ‘지원금 때문에 스포츠라고 말은 한다만 그래도 바둑은 예술이고 나는 예술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바둑은 스포츠‘라는 생각은 서서히, 확고하게 퍼졌다.‘ - P165

"다들 바둑을 스포츠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AI의 영향이 있다고 봐요. 예전에는 답이 없는 걸 연구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답이 나온걸 누가 더 잘하느냐로 바뀌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_이하진 4단 - P166

"예술은 정답이 없고, 그래서 우열을 가릴 수 없고, 예술가의 의도가 중요하죠. 스포츠는 우열을 가리는 대신에 참여자들이 최선을 다하면서 치열함을 보여줄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요." _정두호 4단 - P169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의 작품을 모방할 때, 그리고 문학 AI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할 때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점수화한다. 숫자가 되고 나면 순위가 갈리며 경쟁이 벌어진다. - P170

숫자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면, 인간 시인과 소설가가 자신의 점수를 높이기 위해 경쟁하게 되면, 문학은 스포츠에 가까워진다. - P170

미술사에서 인상주의는 사진 기술에 대한 미술가들의 대응이었다. - P171

AI 시대 이후의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 때문에 바둑이 단조로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독특했다. 그가 보기에는 초반은 바둑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진서 9단은 "바둑의 꽃은 중반"이라며 "중반이 가장 재미있고 치열해요. 초반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다 하더라도 중반은 결국 재미있는 바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바둑의 매력에 대한 감각이 변하는 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73

예술과 스포츠라는 개념, 그리고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 P173

어떤 행위의 성격을 정의하는 일은 다음 세대의 가치관을 규정하는 일이 된다 - P173

"당신은 평생 해온 게임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른다" _야구 선수 미키 찰스 맨틀 - P173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 P173

인센티브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 P174

"많은 이들이 경제적 인센티브는 뿌리칠 수 있지만 문화적, 집단적 인센티브는 더 뿌리치기 힘들다" _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 - P174

예술가들을 움직이는 인센티브에는 경제적 보상도 있지만, 그들은 뭔가 고상한 것, 의미 있는 것,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인정받는 것에도 강하게 끌린다. 새로운 기술이 그 인정 욕구를 위협할 때 예술가들은 예술을 재정의해야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 P174

인간의 감정은 코끼리이며 이성은 자기가 그 코끼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기수에 불과하다. 코끼리가 방향을 정하고 기수는 그 방향을 합리화한다. _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 P174

어떤 예술 장르의 정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고,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니까. - P174

절대다수의 사람은 돈을 잃기보다는 벌기를 바라며, 불안해지기보다 안전해지기를 원하고, 미움받기보다 사랑받기를, 무시받기보다 인정받기를 소망한다. 신기술은 그런 개별 욕망의 방향을 뒤집는다기보다는 각각에 기대할 수 있는 인센티브의 크기를 바꾸는데, 어떤 인센티브가 압도적으로 커지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 P175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자극하는 인센티브는 수익성 강화다. 인공지능은 수익성 강화의 도구로 널리 보급될 것이다. 많은 경우 이것은 대중성 강화를 의미한다 (이는 몇몇 분야의 스포츠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 P175

빠르게 변화하는 초창기 신기술 앞에서 여러 주체는 서로 다른 단기 인센티브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한번 내린 선택은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여러 선택이 뭉치고 엮인 결과는, 멀리서 조망하면 전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선택들은 기술 발전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단단히 묶여 ‘기술-환경‘을 만든다. - P176

바둑과 달리 예술에는 명확한 규칙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당수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예술가를 매우 불편해한다. 일종의 반칙 행위로 보는 듯하다. - P182

나는 오히려 AI 이미지의 수준이 낮지 않고 사람이 그린 것 혹은 진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적대감이 전보다 커졌다고 생각한다. - P186

내게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의 중요한 토템을 모욕당해 화를내는 원주민처럼 보였다. - P186

그 그림(생성형 AI로 만든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는 것은 인간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창조 행위‘를 훼손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 P187

그것(죽은 배우를 AI 기술로 되살린 것)은 어떤 사람이 고유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말하는 사람을 되찾을 수 없다는 기존의 믿음을 훼손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 P187

결국은 사람들이 인식을 바꿀 것이다. 어떤 기술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인식을 지닌 후손들은 과거의 인식을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러면 옛 토템은 하나둘 무너진다. 그 토템이 보호하던 가치도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 P187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변하고 뒤바뀐다. 나를 둘러싼 기술-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그 영향을 받는다. - P187

내가 수렵채집인으로서 성스럽게 여기는 나무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베어 내면 나는 화가 날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하는 방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 P188

어떤 기술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기술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고, 공동체에 새로운 금기와 규칙을 만든다. 그 규칙들은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되고, 그 질서에 따라 새로운 계급과 문화를 지닌 새로운 사회구조가 탄생한다. - P188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오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술이 존재한다. 강인공지능뿐 아니라 약인공지능도 그런 기술이다. - P189

한 세대 뒤면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인공지능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중략)... 2020년대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토템 몇 가지는 그때는 이미 무너져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창의성이라든가 고유성, 혹은 다른 개념들이 완전히 부서지거나, 기묘하게 왜곡되거나, 균열이 나 있을 것이다. - P189

"스포츠 경기에는 스코어가 항상 있는데, 바둑도 스포츠로 간 마당에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당연히 알려줘야죠." - P193

알파고 이전에는 인간 최강자끼리 바둑을 두는 동안 그 대국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두 대국자가 가장 잘 알았다. 알파고 이후에는 자신이 두는 바둑의 형세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 두 대국자다. 해설을 맡은 프로기사나 그 해설을 듣는 시청자들은 인공지능 덕분에 실시간 형세와 다음에 두어야 할 수를 훨씬 더 정확히 안다. - P194

내가 운전을 할 때 늘 내비게이션이 제안하는 경로를 따라간다면, 나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는 걸까, 내비게이션의 명령을 받는 걸까? - P197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매번 인공지능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다면,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걸까? - P197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실제 세계를 상당한 정도로 추상화 · 범주화해서 이해한다. 그리고 거기에 언어는 큰 도구가 된다. 바닷가에 나가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모래알이 있고, 그 모래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르게 생겼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래알 각각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냥 모래알이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그 모래알들을 모두 구분하려 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다 (보르헤스가 그런 상황을 소재로 「기억의 천재 푸네스」 라는 매력적인 단편소설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어떤 대상은 그런 추상화 · 범주화가 언어로는 잘되지 않는다. - P200

자신이 어떤 일에 대단한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 남들보다 나은 결과물을 내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과정은 영적 체험처럼 느껴진다. - P204

자신이 정상급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빨리 파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건지도 모른다. - P211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정답까지 가는 추론 과정을 검증하는 식으로 수업 방식이 바뀌었어요." _김만수 8단 - P212

"뭔가 변화하면 거기에 맞게 사람도 변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길을 찾아서 더 좋게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_이희성 9단 - P213

"AI가 왜 이런 수를 제시하는지 생각하라" _한종진 9단 - P214

나는 소설을 쓸 때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안다. 아무리 옆에서 누군가가 ‘당신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해도, 내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존재가 아닌 거다. - P221

"스스로 불쉿(bullshit job) 직업에 종사한다고 믿는 이들의 생각은 대체로 옳다". _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 P222

불쉿 직업은 힘들고 보수와 처우가 형편없어서 인기 없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것은 ‘쉿 직업(shit jobs)‘인데, 그런 쉿 직업들은 불쉿 직업과 반대로 사회적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종사자들이 사라지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환경미화원이나 건설 현장의 잡부가 대표적 사례다. 반대로 보수와 처우가 괜찮고 노동 강도가 높지 않은데도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불쉿 직업이다. 그레이버는 인사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홍보 조사원, 금융 전략가, "불필요한 위원회의 문제를 처리할 직원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일상 업무로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그 예로 들었다. - P222

인공지능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를 없애버린다. - P223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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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 - 3rd Edition ㅣ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로버트 다이머리 엮음, 토니 비스콘티 서문, 이문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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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럽 뿐만아니라 우리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지역(중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팝송을 원없이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나온 음악들을 너튜브에 하나하나 검색해가며 들어보았는데, 이를 통해 음악의 세계가 정말로 넓디넓다는 것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음악을 들으면서 곡에 관한 이런저런 설명들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그냥 음악만 들었을 때는 알기 힘든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새롭게 알게 되어서 해당 곡이나 뮤지션에 대해 좀 더 심도있는 이해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뭐랄까...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작품이나 각종 전시품들을 이야기를 곁들여 설명해주는 일종의 도슨트같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북도슨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록된 곡이 굉장히 많다보니 간혹 귀에 익숙한 멜로디들을 들어볼 수도 있었는데,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러한 곡들의 제목과 해당 뮤지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알게 된 곡들을 즐겨찾기 혹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등록해두었다가 듣고 싶을 때 찾아들어보는 것도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느끼게 되는 이런저런 스트레스들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전세계의 다양한 곡들이 담겨있는 만큼 곡의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었다. 비교적 잔잔한 곡도 있고 심장을 쾅쾅 울리는 듯한 곡도 있으며 가벼운 리듬감이 느껴지는 곡도 있었는데, 하나씩 들어보면서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곡들을 골라보는 재미도 느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책의 구성상 과거에 출시된 곡들부터 10년 단위로 챕터를 나눠서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곡들까지 폭넓게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의 페이지 수가 960쪽에 이를정도로 굉장히 두꺼운 편이다보니 개인적으로는 그 양에 압도된 나머지,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아 역으로 맨 뒤에서부터 한 곡씩 읽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 곡 한 곡 듣고 읽고 하다보니 어느덧 맨 앞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보통 소설책 같은 건 스토리 전개상 그럴 수 없는데, 이 책같은 경우 그냥 백과사전식으로 편집이 되어 있다보니 이러한 방식으로 읽는 게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독자분들의 성향이나 취향에 맞게 순서에 상관없이 각자 읽고 싶은 부분부터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적잖은 시간동안 이 책을 완독(完讀) 그리고 완청(完聽)하느라 애쓴 스스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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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Johnnie Ray & The Four Lads가 부른 Cry 라는 곡을 처음 들어봤다. 보컬이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애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처음 밑줄친 문장처럼 울고싶을 땐 마음놓고 찐하게 울어야 그 응어리졌던 감정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괜히 어설프게 울었다가는 나중에 뭔가 해소되지 못한 일말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 남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So let your hair down and go right on and cry(그러니 모든 걸 털어놓고, 주저 말고 울어버려)" - P51

컨트리 음악은 오랫동안 ‘기술‘과 ‘고백‘, 그리고 ‘예술성‘과 ‘신실성‘을 별개로 치는 원칙을 따라왔다. 하지만 어느 날 행크 윌리엄스가 등장했고, 그는 극과 극을 한데 묶는 데 성공한다. 윌리엄스는 작곡 기술에 숙련된 대가였고, 재능있는 싱어였다. 그 이전에 활동했던 그 어떤 컨트리 싱어보다 더, 그는 자신의 노래에 자신의 삶을 깊이 새겨 넣을 줄 알았고, - P44

미국 음악계는 인종에 따라 분열되어 있어서 흑인 재즈에서 백인 팝으로 ‘크로스오버‘해 대중의 호응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 P43

"God bless the child that‘s got his own (가진 것이 있는 아이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것)" - P36

홀리데이는 마태복음 25:29과 관련이 있는 듯한 말로 곡의 첫 마디를 시작한다: "Them that‘s got shall get /Them that‘s not shall lose (돈은 친구를 부르지만 / 가난은 친구를 떠나가게 한다." 그러나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서 있는 신의 자녀는 운명의 변덕에도 끄떡없고, 진정 축복받은 존재이다. - P36

"빌리 홀리데이는 노래 한 마디 한 마디에 담은 의도와 내용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설령 음정과 톤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_조니 미첼 - P36

팝 뮤직은 허구를 먹고 산다. - P35

"Would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내가 당신을 뒤따라간다 하면 그들이 화를 낼까요)?" - P35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남쪽 나무에는 이상한 과일이 열려 있네)" - P30

(로버트)존슨은 블루스의 명인이 되는 대가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 P29

"Mal Hombre"(나쁜 남자) - P28

지쳐버린,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의 간절함 - P26

"Lagrimas negras (검은 눈물)" - P22

"라파예트으로 가자(Allons a Lafayette)" - P22

"Ma man‘s got a heart like a rock cast in da sea(내 사랑은 바다를 내던진 바위 같은 마음을 가졌지)" - P20

하바네라 리듬ㅡ"스페인적 빛깔(Spanish Tinge)"로 알려진, 박자에 불규칙으로 악센트를 주는 것 - P20

찰리 패튼과 로버트 존슨이 미시시피 델타 지역을 전 세계에 알렸듯, 엔리코 카루소는 자신의 고향 나폴리에 이태리의 총애 받는 도시인 로마와 피렌체조차 넘보지 못할 높은 지위를 선사했다. - P20

카루소는 ‘칸초네 나폴레타나(canzone napoletana-나폴리의 노래)‘의 위대한 아이콘이며, 대중 가요와 오페라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킨 발라드 대작 "O sole mio"는 변함없는 나폴리의 성가로 남아 있다. 칸초네 나폴레타나의 대가들은 시나트라/마틴이 주축을 이루는 계보의 선조 격이다. 실제로 카루소는 모든 남성 발라드 싱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든 "O sole mio" 버전은 위대한 나폴리적 색채가 살아 숨 쉰다. 카루소가 오페라 계에서 가장 탁월한 테너 중 하나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청중은 그를 자신의 고향 나폴리의 성가를 부른 가수로 기억하고 있다. - P20

"오 나의 태양"으로 해석할 수 있는 "O sole mio"는 햇살 따스한 날을 향한 찬미에서 시작해 위대한 사랑 노래로 전개해간다. - P20

여정을 밟아가며 독자는 재즈와 블루스가 성장해온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될 것이며, R&B와 웨스턴 스윙이 로큰롤로 진화해간 발자취를 더듬어보게 될 것이다. - P10

이 책의 진미 중 하나는 여기 담겨 있는 흥미진진한 일화들이라 할 수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폭로의 이야기들은 주로 여기 실린 작품들을 직접 불러 이름을 떨치게 된 유명인들보다는 그 배후에서 일했던 이들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 P11

이 노래들은 세계를 바꿔놓았다. 그 이유를 발견하고 이 곡들을 직접 들어보시길 바란다. - P11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독자는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한 또 다른 긴 곡목 리스트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열거된 곡의 가짓수는 10,001곡에 달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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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소설의 서두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꿨을뿐 그 밖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스턴에 살던 시절 한 건축가와 알고 지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케이시이고 그와 함께 거주하는 제레미라는 사람은 피아노 조율사라고 한다. 케이시의 아버지는 과거 열렬한 재즈 팬이었던지라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다수 소장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부모를 여읜 케이시는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소유했던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재즈를 좋아하는 저자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시는 출장으로 인해 집을 비우게 되었고 때마침 함께 있던 제레미 역시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본가로 돌아가게 되면서 케이시의 집은 부재중이 된다. 근데 케이시의 집에는 마일스라는 개가 있어서 개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케이시는 저자에게 자기 집을 봐주면서 좋아하는 재즈 음악도 마음껏 들으라고 말한다. 저자도 때마침 여러 상황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케이시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다.

이렇게 저자는 케이시의 집에 마일스(개)와 단 둘이 있게 되는데, 아래쪽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린다. ‘렉싱턴의 유령‘ 이야기는 누군가가 아래층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뭔가 긴장감이 조금씩 느껴진다.

누군가가 아래층에 있다. - P22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 P24

--저건 유령인 것이다. - P27

그러니까 그들은 어디로부터도 들어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 P28

"나는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난 상태 속에 있었어. 다만 이번엔 아버지의 잠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었지." - P38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아버지와 난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어. 그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아버지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끝없는 잠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어. 마치 혈통을 잇는 특별한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이야." - P38

"나는 자고 자고 자고...... 시간이 썩어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잤어. 얼마든지 끝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란 거야. 그때의 나에겐 잠의 세계가 진짜 세계고, 현실 세계는 덧없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건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지.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아버지가 느끼셨을 심정을, 그때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거지." - P39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 P39

무엇을 보든 이제 넌 아무 소용이 없어. 너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란 존재는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 거야. 그러자 짐승의 눈마저 허공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밤의 어둠만이 소리 없이 방 안에 가득 찼다. - P52

"내가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때리는 거나 맞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건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으면,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권투는ㅡ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ㅡ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오르면 때때로 나 자신이 깊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끔찍하게도 깊은 구덩이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볼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고독합니다. 하지만 슬프진 않습니다." - P61

"한마디로 고독이라고 말했지만 고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듯 쓰리고 아픈 고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고독도 있습니다. 그런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깎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그만큼 돌아옵니다. 그것이 내가 권투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 P61

"잊어버리고 싶은 건 절대로 잊히지 않죠." - P61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일생에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지는 일 말이에요. 나는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런 상대가 있더군요.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경우, 상대방도 이쪽과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거죠." - P62

어떤 부류의 인간은 성장도 후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할 뿐이지요. - P72

처음에 때릴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꼴 한번 좋구나 하면서 엄청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점점 언짢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 P84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말없이 참는 것뿐이었어요. - P85

‘정말 이 정도의 일로 사람은 의기양양해지거나 승리했다고 우쭐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정도의 일로 이 녀석은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녀석(아오키)은 아마도 진짜 기쁨이나 진짜 자존심 같은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저 조용한 떨림을, 이 녀석은 절대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을 거라고. - P88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음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한테 그 깊음이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깊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오키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공허하고, 변화가 없고 단조롭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목해준다고 한들, 아무리 겉으로 으스댄다고 한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 P88

충분히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겐 아직 자부심이란 게 남아 있었거든요. 아오키 같은 인간에게 이대로 질질 끌려갈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 P89

권투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상대방의 눈의 움직임에 민감해지죠. 아오키의 눈은 다리를 꼼짝할 수 없게 된 권투 선수의 눈 같았습니다.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거죠.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발은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깨를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펀치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런 눈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왜 그런지 본인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 P89

인생 그 자체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 자신이 경멸하고 모멸하는 상대에게 간단히 짓눌려 찌부러질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지요. - P90

나는 틀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린 거다, 하고 자신을 계속 다독였지요. - P90

기회가 올 때까지 줄곧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낚아채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교묘하게 잡아쥐고 선동하는 능력ㅡ그런 건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런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능력이란 건 인정합니다. - P93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 P94

"침묵이 차가운 물처럼 모든 것에 조금씩 스며들어갑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거고 저거고 모든 것이 질척하게 녹아버리고 말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속으로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 P94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걸 내가 어떻게 읽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하고 얼음사나이는 말했다. 마치 투명한 얼음 속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렇게 가만히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에 관한 것이 환히 보인답니다. - P103

나는 미래라는 것에 전혀 흥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게는 미래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얼음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음 속에는 과거만이 단단하게 봉해져 있을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거기에 꽁꽁 가둬져 있는 겁니다. 얼음이란 건 많은 것들을 그런식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아주 깨끗이, 아주 선명하게 있는 그대로 말이죠. 그것이 얼음의 소임이고 본질입니다. - P104

나는 과거란 것을 갖고 있지 않아. 세상의 모든 과거를 알고는 있어. 그리고 모든 과거를 봉인하고 있지. 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겐 과거라는 것이 없어. - P105

얼음사나이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이 순간의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의 얼음사나이를 사랑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 P105

결혼이란 건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는 거야. - P106

얼음사나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얼음사나이는 단지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혹시 주위가 따뜻해지더라도 그 때문에 녹아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차가움은 확실히 얼음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얼음과는 다르다. 분명히 엄청 차갑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체온을 빼앗아갈 정도로 차갑지는 않다. - P106

나 자신이 시시각각 과거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다. 그저 과거를 쌓아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들은 과거를 보고 있다. 나는 뒤쪽으로 스쳐 사라져가는 광경인 것이다. - P114

꿈은 과거에서 오는 거야. 미래에서 오는게 아니지. 꿈은 당신을 속박하거나 하지 않아. 당신이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지. 알겠어? - P114

나는 이제부터 여행을 떠난다는 흥분이나 기쁨 같은건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하기로 한 일을 어김없이 진행할 뿐이었다. - P115

남극에 있는 이 나의 남편은 예전의 나의 남편은 아닌 것이다. - P118

얼음사나이는, 스키장의 호텔에서 만났던 그 얼음사나이와는 다른 얼음사나이라는 것을. - P118

영원한 과거가, 그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가, 우리의 발목을 꽉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덫을 뿌리칠 수 없게 된 것이다. - P119

어디서인지 불어닥친 바람이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말을 과거로 과거로 계속 날려버린다. - P120

대단한 능력도 때로는 예기치 않게 뒤틀릴 수 있다. - P126

어차피 사람이란 언젠가는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 P128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어찌 됐든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이상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128

외롭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금은 이상한 상황이었다. 고독하지 않게 됨으로써 다시 또 고독해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42

그저, 그저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다. - P147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가 없다. 몸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P148

말하자면 나는 주변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시기가 내겐 필요하다. - P151

그 옷들은 그에게 아내가 남기고 간 그림자처럼 보였다. 7사이즈의 아내 그림자들이 켜켜이 몇 줄로 열을 지어 옷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무한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샘플들을 몇 개 모아 매달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 P155

그 그림자들은 예전에는 아내의 몸에 찰싹 붙어서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상실한 채 시시각각으로 말라비틀어져가는, 볼품없는 그림자 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그저 낡고 바랜 옷일 뿐이었다. - P155

고독이 미적지근한 어둠의 진액처럼 다시 그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미 모두 끝난 일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한다해도 모든 것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 P156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모습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의,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손에 만져지듯 느껴지는 것이라곤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상실감뿐이었다. - P159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거기에, 꼭 걸맞은 무게를 지닌 채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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