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부족할 때 사물들의 형상은 조금 기이해 보인다. 두뇌 회전이 둔해지는 대신, 정신이 멀쩡할 때는 모르고 지냈던 어떤 부위가 자극되며 낯설고 강렬한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 P9
라이프캐스팅이라면 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를테면 데드마스크를 뜨는 방식이다. - P11
나는 착각한 것이다. 저것은 석고상을 자른 형상이 아니었다. 저것은, 저 안에서 한 육체가 방금 빠져나온 형상이었다. 석고상의 바깥 면이라고 생각했던 거친 윤곽선은 육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었다. 윤곽 내부의 선이 부드럽고 섬세한 인체의 굴곡을 고스란히 도치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 P16
저것은 그 껍데기들을 감싸고 있던 또 하나의 껍데기였다.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 - P16
그의 눈에 어린 완전한 고요는 내면의 평화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 위로 덮어놓은 얇은 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 P22
왜 내 삶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가. - P30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이 기록은 결코 그 ‘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우리라는 것을. - P30
하얀 탈바가지. 웃고 있는, 딱딱한 탈바가지. - P37
사람이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 P43
조용한 말씨가 더 무서울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더 위력적이고, 더 잔인하다는 것을. - P47
나는 용기 있는 아이가 된 건가, 비겁한 아이가 된 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러나 그것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라면, 나 말고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령, 내가 오늘 밤 죽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어져버리는 것이 진실 아닌가? - P59
진실이란, 저렇게 추한 것이로구나. - P60
나는 머리의 피가 아래로 쏠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고모가 그랬듯이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들 중의 누구라 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나와 똑같이 비겁했을 뿐이다. 나와 똑같이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거짓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모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진실만을 환멸했다. 그 쓴 환멸을 나는 안경알 속에 숨겼다. - P61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 P62
누이의 참혹한 참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후 나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누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진실을 믿기 때문에 깊이 상처 입으며 쉽게 회복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나에게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나로 말하자면, 착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똑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 P63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 P67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거다. - P67
철저하게 안경 뒤로 나는 나를 가렸다. 가리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방되고 영원히 손가락질당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맨얼굴의 나를 보였다면, 미숙한 어린아이답게 행동했다면, 내가 정성과 지혜를 다해 빚은 탈 속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긴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사랑받거나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좋은 성적을 얻었고 순종적이었고 누구보다 야무졌다. 그 결과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았다. - P68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 P73
사무적인 얼굴의 장의사가 그의 몸을 염습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가락이 잘린 자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대대로 고이 물려받아온 보물이 실은 10원 한 장의 가치도 없는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나는 허전했다. - P74
속았다. 나도 속았고 그도 속았다. 대체 저게 뭐였단 말인가? 다만 잘린 손가락일 뿐인 것을 두고, 그는 침묵 속에서 그토록 결사적인 곡예를 펼쳤던가. - P74
손은 제2의 얼굴이다. 손의 생김새와 동작을 관찰하면 그 사람이 얼굴 뒤로 감춘 것들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마치 나름의 인격을 가진 독자적인 생명체처럼 손은 움직이고, 떨고, 감정을 발산한다. - P77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진실이 드러난다. 근본적인 조심성, 숨죽임, 떨림 같은 것. 그 떨림에서 나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감지했던 슬픔을 읽었다. 깊숙이 가라앉은, 그래서 일상 속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저 착한 마음으로만 읽힐 뿐인 고통의 흔적이었다. 짓눌림, 혹은 스스로 짓누르는 어떤 것. - P82
내가 남과 다르게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모두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집요하게 의심했고, 남들이 모두 만족하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남들이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를 풍기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의 안쪽을 꿰뚫어보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썼다. - P83
무엇인가가 내 감정의 전극을 건드릴 때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정신이 번쩍 들고, 혈관들이 살아나며, 때로 누선이 자극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같을 때보다 다를 때가 더 많았다. 이상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모두가 꺼리는 것일 때도 있었다. - P84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 P85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맞은 조소 시간에 내가 빚고 싶었던 형상은 손이었다. 거머쥔 주먹을 빚어, 죽음보다 더한 것이 찾아온다해도 그 안에 든 것을 드러내지 않을 강한 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결코 탄로나지 않는 비밀, 결코 진실이 새어나오지 않는 껍질이었다. - P86
조각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간단히, 손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두 손으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주무르는 순간만은, 모든 것의 껍질을 꿰뚫어보기 위한 집요한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열띤 신체적 몰입을 필요로 하는 그 예민한 작업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빚어내는 삼차원의 견고하고 육체적인 형태들을 통해서만 간신히 이 세상과 연결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들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마치 그것들을 체득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종의 최면요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88
손이 또 다른 얼굴, 또하나의 독립된 몸이라는 것을 그때쯤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손은 독자적으로 살아 있으며, 사람이 죽을 때 손은 손으로서 자신들의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 P88
수지침의 교재에서는 손이 인체의 축소판이라고 가르친다. 중지의 끝마디에 얼굴이 그려져 있고 손바닥에는 장기들의 부위가 표시돼 있다. 손등은 등허리, 손목 부위는 항문과 회음이다. - P89
혀와 눈이 달린 얼굴과는 달리 손은 정확한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하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리려 하지만 역시 다 가리지 못한다. 얼굴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얼굴보다 교묘한 탈이다.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얼버무릴 필요도 없다. 침묵하면 그만이다. 정지해 있으면 그만이다. - P89
나는, 만족한 표정과 제스처 뒤로 불안을 숨기고 있었다. - P89
내 작품들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배어 있었다. 최대한 절제하여 숨겼음에도 드러나는 나의 감정, 노력, 나의 개인사를 나는 읽었다. 그것은 마치 내 발치에 누운 내 시체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악몽과도 같았다. 누군가 그 손들을 일일이 펼쳐 내 손금을 읽을 것 같았다. 내 삶의 텅 빈 중심을 들여다보고 말 것 같았다. - P89
‘솜씨‘만으로 모든 것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리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가? 침묵하면 그만 아닌가. 손을 멈추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보여주면서도 집요하게 숨기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모순인가.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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