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저자의 작품인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 총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먼저 수록된 ‘반딧불이‘는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이름만 3인칭으로 대체되었을 뿐 《상실의 시대》와 99% 동일한 스토리였다. 개인적으론 《상실의 시대》를 최근에 읽었던 터라 마치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는 듯한 느낌으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굳이 다시 읽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놓치고 지나간 세부적인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읽어보았다. 하지만 딱히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뒤이어 등장하는 ‘헛간을 태우다‘ 부터가 본격적으로 새롭게 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어떤 거창한 것보다는 그냥 이야기 중간중간에 저자가 심어놓은 메시지나 교훈 같은 것들을 잘 캐치해낼 수 있길 바래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의 핵심은 단순함과 복잡함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에 끌리는 경향이라든지 혹은 자신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본능과도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러한 본능이 왜 생겨나는 것인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내 생각엔 상반되는 두 가지가 만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시너지‘같은 게 발생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 개방적이고 천진난만한 단순함이 모종의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단순함과 직면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문득 그곳에다 끼워맞춰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 P52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 P54
"아냐, 안 돼. 돈을 모아서 다시 와. 그러면"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 P64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 P68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이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즉 자네가 헛간을 태우는 건 도덕적으로 마땅한 행위라는 뜻인가?" "정확하게는 아니죠. 그건 도덕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 P69
나는 내 몸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관념으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동시 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하는 내가 있고, 그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 시간은 매우 정밀하게 폴리리듬을 새기고 있었다. - P70
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낡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 - P75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84
"시계는 비싸다고 정확한 게 아니구나." - P85
"진짜 아픔보다 아픈 걸 상상하는 게 더 고통스러워." - P97
"그래, 아픔이라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니까." - P98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 P99
암이란 요컨대 그 사람이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이 응축된 거야 - P120
"의사들은 모두 똑같아. 어느 병원이고 다. 원인을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지 남한테 떠넘겨, 귓속을 살펴보고 엑스레이를 찍고 반응을 측정하고 뇌파를 살펴보고, 그래도 별 이상이 없으면 결국은 모두 내 탓으로 돌려버려. 귀에는 결함이 없으니 내 쪽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태껏 그래왔어. 그래서 모두 나를 비난하게 된 거야." - P121
‘괜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실제로 인디언이 없다는 얘기니까요.‘ - P125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가." - P125
"그럴까?"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귀 때문에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때마다 난 언제나 그 영화(리오그란데의 요새)의 장면을 떠올려. ‘인디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디언이 없다는 얘깁니다‘라고 말하는." - P125
"정해져 있거든." 난쟁이는 말했다. "이제 누구도 그걸 바꿀수는 없어. 그러니까 너랑 나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 P137
"모두 나이를 먹어. 자네도 역시 곧 나처럼 될 거야. 기대하게나." - P145
하긴 뭐, 꿈속에서는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 P157
"가르쳐줄 수도 있지." 난쟁이가 말했다. "하지만 하루이틀 배워봐야 소용없어. 매일 꼬박 배워도 최소한 반년은 해야 해. 그정도 연습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춤을 출 수 없어." - P158
만약 내가 하나의 꿈을 위해 다른 꿈을 이용하고 있는거라면, 진정한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 P164
그러나 극히 한순간의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원래의 아름다운 여자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 P169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 P204
책 제목을 짓는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 P211
내게 단편이라는 포맷은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점검하고 시도해보기 위한, 이른바 테스트 코스같은 장이었다. - P212
단편소설이란 아무리 용을 써도 장편은 되지 못할 소재를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혹은 짧은 형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심상 등을 나타내기 위한 그릇이기도 하다. 그래서 숨가쁘게 장편을 하나 써내고 나면 한동안은 느긋하게 단편을 쓰고 싶어진다. 장편에서 채 쓰지 못한 것을 단편으로 써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 P212
미국인이 헛간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은 크고 위풍당당한 헛간barn이다. 그러나 내가 헛간이라는 말에서 떠올린 것은 밭 한구석에 서 있는 작고 허름한 가건물이다. 포크너가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로 표현한, 하늘까지 불길을 뻗치는 장려한 배덕감이 여기서는 남들 몰래 헛간을 태워 없애는 조용한 음산함에 그친다. 마음 한구석에서 가만히 타오르다 무너져버리는 그런 헛간이다. - P215
내 기억에 따르면 우선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나더러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했다‘라는 한 줄을 쓰면서 시작된 것 같다. 즉 피아니스트가 도입부 네 소절을 피아노 건반으로 통통 쳐보다가 하나의 곡으로 발전해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 P216
독일이라는 나라에는 확실히 뭔가 농후한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흩트리는 어떤 것.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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