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고 있으면 때때로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 나는 말했다. "그 별은 무척 밝게 보이지. 하지만 그 빛은 몇만 년이나 이전에 보내진 빛이야. 그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천체의 빛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빛은 어떤 때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실적으로 보이지." - P250
"넌 지금 여기에 있어.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여. 하지만 넌 여기에 없는지도 몰라. 여기에 있는 건 네 그림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라. 진짜 너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고. 난 그걸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내가 손을 뻗어 확인하려 해도 넌 언제나 ‘아마도‘라든지 ‘한동안‘ 같은 말로 몸을 감추고 말지.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걸까?" - P251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그녀는 말했다. "뭐야? 그 태양의 서쪽이라는 건?" "그런 곳이 있어." 그녀는 말했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을 들어본 적 있니?" - P258
"시베리아에 사는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야. 상상해봐. 네가 농부고,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 있어. 그리고 매일매일 밭을 가는 거야.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북쪽에는 북쪽의 지평선이 있고, 동쪽에는 동쪽의 지평선이 있고, 남쪽에는 남쪽의 지평선이 있고, 서쪽에는 서쪽의 지평선이 있어. 그것뿐이야. 넌 매일 아침 동쪽의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태양이 바로 네 머리위로 오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그리고 서쪽의 지평선으로 태양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 자는 거야." - P259
"동쪽의 지평선에서 떠올라, 하늘의 정중앙을 지나, 서쪽의 지평선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매일매일 보고 있는 동안, 네 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져 죽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넌 땅바닥에다 괭이를 내던지고는 그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서쪽을 향해 걸어가는 거야. 태양의 서쪽을 향해.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이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해서 걷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아. 그게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야." - P260
"태양의 서쪽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데?"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몰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아니면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튼 그건 국경의 남쪽과는 좀 다른 곳이야." - P260
"두 번 다시 내가 어디에도 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넌 나를 모조리 가져야 해.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내가 끌고 가는 것이나, 내가 안고 있는 것 전부. 그리고 나도 분명 네 모든 걸 갖게 돼야겠지. 모든 걸 말이야. 넌 그걸 알고 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는 거야?" - P263
"가장 큰 문제는 내게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거야. 나라는 인간에게는, 내 인생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거야. 상실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그 부분은 언제나 굶주려 있고 메말라 있어. 그 부분은 아내도 메우지 못하고 애들도 메우지 못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너 한 사람밖에 없어. 너랑 있으면 난 그 부분이 충만해지는 걸 느끼거든.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 이제까지의 긴 세월 동안 내가 얼마나 굶주리고 메말라 있었던가 하는 걸 말이야. 난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어." - P264
"어떤 종류의 일은 두 번 다시 제자리로는 돌아가지 않아. 그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 P266
누구든 언젠가는 그 암흑의 근원 속으로, 공명을 잃은 침묵 속으로, 한없이 깊은 고독 속으로 떨어져가는 것이다. 나는 그 세계를 눈앞에 두고 숨이 막힐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 암흑의 구멍에는 바닥이라는 게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P271
시마모토는 또다시 내게서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는 아마도나 한동안도 없이. - P277
"즐기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좀 달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이 알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걸 당신이 정말로 안다고 생각해?" - P283
앞으로 시마모토와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거기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중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경의 남쪽에는 아마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의 서쪽에는 아마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P289
결국 모든 것이 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을 하나하나 소화해 왔다는 것뿐. 다른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기교만으로 종전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몹시 괴로웠다. - P292
모든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간단해서는 안 된다. - P292
환상은 늘 거기에 있었고, 그것은 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 P293
이를테면 어떤 사건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현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기억과 감각은 너무나도 불확실하며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우리가 사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실‘인가를 식별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현실로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것을 상대화할 또 다른 현실을ㅡ인접하는 현실을ㅡ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따로 인접해 있는 현실 역시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있게 상대화하기 위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즉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또 다른 인접한 현실이 있게 마련이다. 그와 같은 연쇄가 우리 의식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고,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이어지는 것으로 그들 연쇄가 유지되고,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가 성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어쩌다가 그 연결 고리가 끊겨버린다. 그렇게 되는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단절의 저쪽에 있는 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단절의 이쪽에 있는 것이 진짜 현실인지. - P297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란 게 없었다. 아니,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어쩌면 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박탈되어 있었다, 라고. - P299
나는 단지 빈 껍질이었고 몸 안에서는 공허한 소리만이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난 내가 정말로 텅 비어버린 걸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몸속에 남아 있었을 것들이 죄다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 P301
그때 나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정말로 문자 그대로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동안 내가 누구인지조차 나는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마치 나라는 인간의 형체가 소멸해서 흐물흐물한 액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 P300
그녀는 분명 어딘가에서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의 길모퉁이에서, 어딘가의 창문 안에서, 그녀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을 뿐이다. - P302
내가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멜로디를 들을 때마다 시마모토가 생각나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 곡은 이제 예전만큼 내 마음에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 내가 그 음악 속에서 발견했던 특별한 무엇인가는, 이미 거기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그 음악에 계속 의지해왔던 어떤 종류의 감정 같은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변함없이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무엇인가의 유골과도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듣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P304
"자격 같은 건 잊어. 그 누구에게도 자격 같은 건 없을 테니까." - P306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어떻게든 다른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나는 늘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곤 했어. 거기에서 새로운 인격을 갖추려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러기를 되풀이해왔어.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성장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인격의 가면을 교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 하지만 어쨌든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으로서 이제까지 내가 안고 있던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러길 원했고,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어. 하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었던 거 같아.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안고 있던 뭔가 빠지고 모자란 결핍은 어디까지나 변함없이 똑같은 결핍일 뿐이었지. 아무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톤이 바뀌어도 나는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내 속에는 늘 똑같은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고, 그 결핍은 내게 격렬한 굶주림과 갈증을 가져다주었어. 나는 줄곧 그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했고,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할 거야. 어떤 의미로는 그 결핍 그 자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지. 난 그걸 알 수 있어." - P308
"나는 지금 당신을 위해 가능하다면 새로운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리고 아마 난 그럴 수 있을 거야.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난 노력해서 어떻게든 새로운 나를 성취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 똑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게 되면, 나는 또다시 똑같은 짓을 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또다시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몰라. 난 당신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어. 내가 말하는 자격이란 그런 거야. 나는 그 힘을 물리쳐낼 수 있다는 자신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어." "당신은 이제까지 그 힘으로부터 줄곧 도망치려 했던 거지?" "아마 그런 거 같아." - P308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 존재하는 거야. 그건 예를 들면, 생각 같은 것이고, 가능성 같은 거야. 그것은 어딘가로부터 배어 나오기도 하고 자아내기도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있어. 그건 나 자신의 힘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하거나 할 수 없는 거야." - P309
"당신은 정말로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내가 어떻게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 P310
"하지만 아무튼 내가 죽지 않은 건, 내가 아무튼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건, 만약에 당신이 언젠가 내 곁으로 돌아온다면, 결국은 내가 당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죽지 않았던 거야. 그것은 자격이라든지 옳다든지 옳지 않다든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형편없는 인간일지도 몰라. 가치 없는 인간일지도 몰라. 당신은 내게 또다시 상처를 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 P310
"그리고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물으려 하지 않았어." - P310
"자격이라는 건 당신이 앞으로 만들어가는 거야. 혹은 우리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는지도 몰라.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많은 것을 만들어온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아마도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나도 순조로웠던거야. 아마도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P311
"무엇인가에 쫓기는 건 당신만이 아니야. 무엇인가를 버리고, 무엇인가를 잃는 건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 P312
"당신은 언젠가 또다시 내게 상처를 줄지도 몰라. 그때 내가 어떻게 될지 그것 역시 난 몰라. 어쩌면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 뭔가를 약속한다는 건 아무도 할 수 없는 거야. 나도 할 수 없고 당신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아무튼 나는 당신을 좋아해. 그뿐이야." - P312
눈을 감고 내 몸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나는 변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313
환상은 더 이상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위해 꿈을 빚어내주지 않았다. 공백은 어디까지나 공백 그대로였다. 나는 그 공백 속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 공백에 내 몸을 익숙하게 하려 했다. 이것이 결국 내가 다다른 장소인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의미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P313
아마 이번엔,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환상을 빚어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게 요구되고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런 환상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는 존재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나는 힘이 미치는 한 그 작업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아마도. - P315
인간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결핍의 존재다. 그러나 결핍이란 채우려고 서둘수록 더 멀어지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다. 신기루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닌 죽음이요, 텅 빈 사막이기 때문이다. - P318
"아마도 ‘국경의 남쪽‘에는 무엇인가 커다랗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 거야." - P318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울 때, 우리는 부드럽고 따스한 잠자리를 찾는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을 찾는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있기에 우리는 어둠의 결핍을 포근한 휴식으로 대치한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농부에게 그런 휴식은 없다. 어디를 보아도 막막한 지평선인 대지 위에서 외롭게 서 있다 보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죽어가고 냉기가 자리 잡는다. 이즈미의 차가운 얼굴처럼 열정이 사라진 냉기는 태양의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죽음의 길이다. ‘서쪽‘은 내일의 ‘국경의 남쪽‘이라는 상상력이 사라져버린, 이즈미와 같은 냉기를 지닌, 사막과 같은 고독의 삶을 의미한다. - P318
결핍은 생존의 조건이지만 지나친 결핍이 가져오는 고독은 오아시스를 볼 수 있는 열정을 앗아가기에 위험하다. 반대로 지나친 완벽함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시마모토는 지나친 완벽함을 추구하고, 이즈미는 결핍의 동굴에 침잠한 냉기의 사막이다. 둘은 극과 극이지만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쌍둥이였고, 하지메의 삶을 위협하는 떠나지 않는 그림자들이다. - P319
이마고(Imago, 어렸을 때의 사랑의 대상이 이상화된 것) - P319
어릴 적에 형성되는 이마고는 사춘기 이후의 삶에서 결핍을 충족해줄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연인상이 된다. 그 이미지는 삶을 지배하는 엄연한 현실이면서도 잡으면 저 멀리 도망치는 신기루일 뿐이다. - P320
닮은꼴은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는 의미다. - P320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본능은 함정의 유혹 - P321
인간의 내부에는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사악함이 있다 - P321
이성의 경계를 넘어 그(하지메)의 행동을 지배한 강렬한 ‘흡인력‘은 프로이트가 말한 본능이다. 리비도는 죽음충동이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국경의 남쪽‘을 꿈꿀 때만이 죽음은 삶이 된다. 본능은 사막과 같아서 본질은 텅 빈 죽음이지만, 그 안에 꿈틀거리는 생명의 씨앗이 묻혀 있고, 그것이 승화되어 꿈이 된다. 그러므로 강렬한 ‘흡인력‘이란 삶과 죽음을 낳은 동인이다. - P322
실상 우리 주위에 그렇게 평탄하고 성공적인 삶은 흔치 않다. 우리는 늘 완벽함을 갈망하지만, 막상 그런 삶이 이루어지면, 그 삶이 주는 평화를 참지 못하는 이상한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P323
이성과 의식의 투명한 경계선 너머에는 국경을 무너트리려는 강렬한 무의식이 있다. 아니 이미 그것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의 서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뿐, 밀려드는 어둠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 P323
완벽해 보이는 삶이란 언제나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 P323
삶이 우연과 본능에 의해 계획과 달리 빗나가며 인간은 오류에 의해 성장한다 - P324
증오와 사랑이 하나의 리비도고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의해 죽음과 삶이 갈라진다 - P324
남을 용서하는 것은 곧 자신을 용서하는 것 - P324
그녀(시마모토)의 역할은 완벽함을 가로막는 또 다른 완벽함 - P324
완벽함이란 인간이 지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어떤 것‘이다. - P325
엇갈리는 사랑이 있기에 삶은 우회하고 환상은 지속된다. - P325
중간이 없다는 것은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이란 뜻이다. 오아시스는 죽음을 미루고 삶을 연장시키는 중간자의 역할을 한다. - P327
중간이 없으면 곧장 태양의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 P328
중간이 없는 삶은 유혹이다. 강렬한 성적충동이다. 에로스는 그 경계를 넘는 것을 의미한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죽고 싶은 죽음충동이기에 곧장 국경을 넘어 태양의 서쪽으로 치닫는 타나토스(Thanatos, 자기를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환원시키려는 죽음의 본능)의 유혹이다. - P328
시마모토는 결국 하지메가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거대한 괴물을 볼 수 있도록 해준 미학적 장치인 셈이다. - P329
시마모토는 하지메의 무의식이었다. - P329
현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과거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고, 하지메 부부가 화해와 재생의 다짐을 하는 데서, 그 구원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P330
시마모토처럼 공허한 삶을 살아도 안 되고, 이즈미처럼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완고한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 P330
삶의 현실은 그 순수했던 기억을 돌이킬 수 없다 - P330
유키코처럼 배반의 아픔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성숙된 힘을 기르고, 하지메처럼 자신의 내부에 사악함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삶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P330
어떤 때는 그의 현재란 그의 과거에 의하여 여지없이 지배당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과거‘라고 하는 구름이 떠 있다. 그가 어디를 가든 그 구름은 언제나 그의 머리 위에 있고, 그의 어깨 위에 그 작고 딱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는 자기 존재의 적지 않은 부분을 과거라는 영역에서 나오는 것으로 구축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 P341
작품이란 어디까지나 개별성을 부각하는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다. - P342
(에도 시대. 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 가운데 1603~1867년의 시기. 봉건 사회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며, 쇼군將軍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지배하던 시기) - P343
나는 대체로 소설을 쓸 때 결론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고쳐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긴 소설을 쓰고 있으면, 작가로서 이것저것 갈피를 못 잡고 헤맬 여지도 없이, 결론이란 게 스스로 나버리기 때문이다. 결론이란 그렇게 가만히 놔두어도 저절로 저쪽에서 찾아와서 제자리를 알고 슬꺽 앉아버린다. 그런데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만은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까 하고 여러 차례 헤매고 또 망설였다. - P344
사람이 사는 일상의 세계를 암시하는 ‘국경의 남쪽‘과, 환상의 세계, 혹은 비현실적인 죽음의 세계를 암시하는 ‘태양의 서쪽‘ - P346
결국 과거라는 이름의 덫에서 벗어나는 길은, 망각과 현실긍정밖에 없다 - P347
나는 개인적으로 섹스란 인간과 인간이 깊이 서로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생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강간과 같은 부정적인 예는 제외하고 _무라카미 하루키 - P349
나는 성을 정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은 육체와 정신을 결부시키는 통로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_무라카미 하루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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