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버릴 만큼 좋아." - P375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건 무섭도록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걷고, 호흡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 P379
온갖 일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진실하다면 누구도 미궁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 자신을 가져. - P380
연애란 원래 그런거야.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것도 하나의 성실한 모습이니까. - P380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며, 은행 예금처럼 그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나갈 순 없어. - P381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넓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마. 놔둬도 만사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받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마련이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 P381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봐. 나(레이코)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고.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해봐. - P381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 - P381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며, 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었다 - P383
돈이 떨어져가면 나는 사나흘 막노동을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를 가도 뭔가 할 일거리는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하나씩 이동해갔다. 세상은 넓고, 어디를 가든 이상한 일이나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 P384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끊임없이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서,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선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하고. - P386
나는 그런 장소에서는 슬픔이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봐, 걱정하지 마, 난 여기 있잖아? 하고 나오코는 수줍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내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치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구나, 하고. 그래, 죽음이란 건 별거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 어둠에 싸인 파도 소리 사이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 P386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P387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P387
어이, 기즈키. 너는 오래전에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지. 그리고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린 거야. 때때로 난 나 자신이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 P390
고텐바(후지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관광 도시) - P392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당신 덕분이야.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곳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번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거길 나온 거야.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 P393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 P395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거지. - P399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 P404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남아 있는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어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야." - P404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느끼면 돼. 그래서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에서 뭔가 배우면 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 당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잖아.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지라고.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요양원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棺같은 전철을 타고서." - P406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당신도." - P406
"좋아,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생각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하고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 멋있었지?" - P409
"편지 같은 건 그저 종이일 뿐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 P413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P413
"내 몫과 나오코의 몫까지 합친 만큼 행복해야 돼." - P413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14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 P419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 P419
‘숲[森]‘이라는 회의문자會意文字는 분명히 나무 ‘목木‘이라는 상형문자 세 개를 조합한 것. - P419
흔들거리는 세 그루의 나무. 그것은 나무‘숲[森]‘이라는 한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으면, 나무(木) 한 그루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데 호응해서, 같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또 한 그루의 나무. 그러면 또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 한 그루도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그런 숲[森]의 나무(木) 세 그루를 조합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은 삼각관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 있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한마디로, ‘나‘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형의 ‘사랑‘ 의 갈등을 그린 것 - P420
예로부터 연애소설이란 대개 ‘삼각관계‘를 둘러싼 끝이 없는 ‘도도메구리(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사나 불당의 주위를 도는 것)‘ 라고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만남, 진전, 예상 밖의 사태, 갈등, 파국, 추억,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짜맞추는 것으로서, 하루키는 ‘순도 100퍼센트의 연애소설‘을 써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100퍼센트 삼각관계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설사 두 사람만이 마주 보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의 눈 속에 비치는 또 하나의 ‘나‘를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420
인간은 두 사람만으로는 상대를 끝까지 떠받쳐줄 수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떠받쳐주기보다는 함께 쓰러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 P421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쓰러지려는 나무를 그 양편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는 구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상실의 시대》의 기본 틀이랄까, 원형이라고 할 뼈대를 이루고 있다. - P421
두 개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 있지만, 화살 세 개가 합쳐지면 부러뜨릴 수 없다 - P421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나가사와와 하쓰미라는 이상적인 커플조차도 마지막에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둘만의 마주 보는 관계는 결국 그 어느 쪽인가를 상처 입히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22
애절함과 자살이 이 소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있어서 다름 아닌 관계의 좌절이랄까, 서로가 공유하는 환상의 차질이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그것은 ‘연애‘나 ‘성애性愛‘라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는 해결도 해소도 안 된다. 그런 두 사람의 ‘이각관계‘ 자체가 그런 마음의 병을 낳는 원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4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단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제삼자라고 할 만한 존재인 것은 본래부터 아니다. 그것은 삼각의 형태로 만들어진 사람들끼리 관계 맺는 그물코가 차례차례 이어져가는 네트워크의 일부이며, 그와 같은 삼각형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 P422
정신을 앓는 것과 자살한다는 것은, 그러한 ‘숲‘ 속에서 갑자기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삼각의 그물코가 터진 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꿰매지 않고서는 고칠 수가 없다. - P422
불완전한 삼각관계야말로 나오코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세 발 달린 솥의 발 하나가 떨어져나가게 됨으로써 솥은 기울어져 넘어져버렸던 것이다. - P424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삶‘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직선을 더듬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령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어떤 역방향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진 것이 아닐까 - P424
갖가지 모양으로 서로 얽혀있는 다양한 것이 ‘삶‘이라는 모양을 짜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이라는 다양한 무늬 속에 수많은 삼각형이 묻혀 있듯이, 서로서로 삼각형의 한 변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424
‘나‘는 마지막엔 두 사람의 죽은 자를 ‘생‘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한 변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삶과 죽음의 양쪽 세계에 걸친 삼각관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삶은 죽음을 각각 빛 속의 그늘, 그늘 속의 빛처럼 서로 엇갈리며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 P424
멋있고 예쁜 그녀라는 존재도 혼잡스런 도시 속의 희미한 반딧불이처럼 바로 사라지고 마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 P425
울창한 숲 속에서 마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고독. - P425
이 소설이 애절한 감상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애인이 죽고,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모든 애절하고 가슴을 저미는 추억이, 마치 꿈속에서 빚어진 일이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말기 때문이다. - P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