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다룬 것은 단순한 레코드판이 아니라 유리병 속에 넣어진 누군가의 연약한 영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 P17
솔직히 말해 난 그분이 도무지 좋아지지 않았다. 뭔가 구체적으로 기분 나빴던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은 늘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하지만 그분의 말투 속에는 약간의 초조감 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때때로 나를 불안하게 했다. - P18
그것은 정말이지 가슴 두근거릴 만한 일이었다. 나는 주위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정원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리스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듣는 것이란 인생의 한 단계 위로 나를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P19
무엇보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 곡은 과장되고, 기교적이고, 왠지 종잡을 수 없는 음악처럼 내 귀에 들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 듣다 보니 마치 희미한 영상이 점점 또렷해져가듯이, 그 음악은 내 의식 속에서 조금씩 형체를 지닌 것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의식을 집중시키면 그 음악의 울림 속에 몇 개인가의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의 소용돌이가 생겨나면 그 소용돌이로부터 또 다른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또다른 소용돌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소용돌이들은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소용돌이의 존재를 어떻게든 시마모토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정확히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좀 더 다른 종류의 말이 필요했지만 나는 그런 말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그런 것이 굳이 입으로 타인에게 전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 P20
‘고통스러울 때는 행복한 척해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 P21
‘여기에 있는 나는 이제껏 형제 없이 자라온 나고, 만일 형제가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형제가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 P23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 이만큼 와버렸으니 이제 와서 뒤로 되돌아갈 순 없잖아. 그렇지?" - P24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저런 일들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려. 시멘트가 양동이 안에서 굳어지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미 너라는 시멘트는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셈이니 지금의 네가 아닌 다른 너는 없다는 이야기잖아?" - P24
거기에는 뭔가 신비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 손가락 끝에서 투명하고 가느다란 실이 나와, 그것이 새로운 시간을 엮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감자 그 어둠 속으로 소용돌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몇 개의 소용돌이가 생겨나곤 소리도 없이 사라져갔다. - P25
어쩌면 우리는, 자신들이 둘 다 불완전한 존재며, 그 불완전한 점을 메우기 위해 우리 앞에, 새로운 후천적인 무엇인가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는 걸 서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새로운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서, 단둘이서, 10초 동안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 P30
내가 세상으로 다가간 것과 동시에 세상도 나에게 다가왔다 - P31
(이즈미는 일본어로 ‘샘‘을 뜻한다) - P34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을 만큼 깊은 고독에 사로잡혔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안경을 썼을 때처럼 나는 사물의 원근감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멀리 있는 것이 손에 닿을 듯이 보이고, 선명하게 보일 까닭이 없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 P37
나는 무턱대고 행복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토대가 무너져버린 탑과 같았다.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내려다보려고 할수록 내 마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P38
그녀는 지금 그녀 자신의 새로운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나 자신의 새로운 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 P38
이곳은 이미 새로운 세계고, 일찍이 존재했던 세계로 통하는 배후의 문은 벌써 닫혀버렸다. 나는 이 새로운 나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나를 확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38
내가 원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분명했다. - P39
세상의 사물이란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단계적으로 쌓아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 P40
아마도 스무 가지나 서른 가지쯤 되는 미묘한 결단이나 판단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 존재할 것이다. - P40
우리는 껍데기를 잃어버린 달팽이였고, 물갈퀴를 잃어버린 개구리였다. - P44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간이란 건 어떤 경우에는, 그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 P45
필요한 것은 작은 일들의 축적이다. 단순한 말이나 약속뿐만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정성껏 쌓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 P52
장소가 바뀐 것만으로 시간이나 감정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P59
이즈미가 나를 ‘외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을때 그녀는 응석받이로 자라 버릇없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나의 고립된 자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 P60
만일 오늘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아마 내일 일어날 것이다. - P61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녀를 납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녀를 납득시키지 못하느냐 하면, 그건 내가 내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P61
나는 더 이상 이 조용하고 고상한 고장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와 나와의 관계를 끝내는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만일 이곳에 남는다면 내 안의 무엇인가는 분명히 상실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실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막막한 꿈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열기가 있고 통증이 있었다. 그것은 십 대 후반의 한정된 시기에만 품을 수 있는 종류의 꿈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즈미가 이해할 수 없는 꿈이었다. 그 무렵의 그녀가 좇고 있었던 건, 내 꿈과는 다른 형태의 꿈이었고, 다른 장소에 있을 세계였다. - P62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조건도 없었다. 원인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도 없고, ‘만약‘도 없었다. - P63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거기에 있었던 소소하고 구체적인 사물의 이미지뿐이다. - P67
상대를 사랑하고 안 하고는 그 당시의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했던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인가에 격렬하게 휩쓸려 있고, 그 무엇인가 안에는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 P69
만일 그것이 올바른 일이었다면 속일 필요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 P71
나는 알고 있었다. 만일 다시 한번 똑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역시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리라는 것을. - P73
몇 년이 지난 뒤, 새삼스럽게 돌이켜보니 그 체험으로부터 내가 체득한 것은 단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뿐이었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고자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동기나 생각이 어떻든, 나는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일 수 있었고, 잔혹해질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소중히 해야 할 상대에게조차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인간이었다. - P73
결국 나는 역시 나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했고, 변함없이 남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리고 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 P74
나는 몇몇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향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몹시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 P74
사람은 참으로 한정된 가능성 속에서만 살고 있다 - P101
고독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침묵은 나를 초조하게 했다. - P102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방법이라는 것이 있어. 월급쟁이 생활이나 하고 있으면 백년이 지나도 이렇게 쉽게 성공하긴 힘들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행운도 필요하고 머리도 좋아야 해. 그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무엇보다도 자금이 필요하지. 충분한 자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수법을 아는 거야. 수법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 - P107
그가 말하는 수법이라는 것은, 그가 이제까지 쌓아 올린 시스템을 뜻했다. 유용한 정보를 빨아들이고, 인적 네트워크를 뿌리내리고, 투자하고, 수익을 올리기 위한 까다롭고 복잡한 시스템을 뜻했다. 수익금은 때로는 다양한 법률이나 세금의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형태를 바꾸기도 하며 증식되어간다. 그는 그런 시스템의 의미를 나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 P107
"세월이라는 건 말이지, 사람을 다양한 모습으로 바꿔놓는다고." - P121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군가의 인생인거야. 네가 그 누군가를 대신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거라고. 여기는 사막 같은 곳이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야." - P121
"비가 내리면 꽃이 피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꽃은 시들어버린다고. 벌레는 도마뱀에게 잡아먹히고, 도마뱀은 새에게 먹히지. 그러다 언젠가는 모두 죽지. 죽고 나서 텅 비게 되는 거라고. 한 세대가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그게 세상사의 이치야. 모두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 죽는 방법도 제각기 다르고.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남는 건 사막뿐이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은 사막뿐이라고." - P121
모두 점점 사라져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것은 끊어져 버린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떤 것은 시간을 두고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사막뿐이다. - P122
어쩌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놀리는 것이 두려워, 뭐든 개의치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을 손에 들고 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23
나는 예전에 내가 있었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떠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 P124
내 경험에 비추어, 정말 예쁜 여자는 절대로 혼자서 술을 마시러 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즐거운 일도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런 것들이 단지 성가실 뿐이다. - P126
나는 딱히 복장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필요이상으로 옷에 돈을 들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청바지와 스웨터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내게는 나름의 작은 철학이 있었다. 가게의 경영자라면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되도록이면 이런 차림을 하고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차림을 본인 스스로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손님이나 종업원에게도 그나름의 긴장감 같은 것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게에 얼굴을 내밀 때에는 의식적으로 비싼 양복을 입고 반드시 넥타이를 맸다. - P127
늘 그렇듯이 밤이 깊어갈수록 연주는 점점 분위기에 녹아들어 친밀하게 다가온다. - P133
한 번 뭔가가 잘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잘되지 않은 일이 다른 잘 안 되는 일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상황은 끝도 없이 나빠지고 만다.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곳에서 꺼내주기까지. - P138
어떤 종류의 말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마음속 깊이 남는 법이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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