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책을 하나씩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검색하다가 새롭게 알게 된 책이다. 목차를 보니 이 책은 총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듯하다.

목차에 나온 제목들만 보고는 솔직히 어떤 내용들이 나올지 쉽사리 짐작이 되진 않는다. 다만 저자는 과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에세이에서 단편이라는 것이 장편을 쓰기 위한 준비단계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쓴 장편소설들 가운데 물론 이미 읽어본 것도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것도 적잖이 있기에, 이 단편을 통해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장편의 내용들이 무엇일지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 나온 이야기들이 장편으로 이어지는 것 없이 그냥 단편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 순수 단편은 또 그것만의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하루키가 쓴 글들을 읽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속된 말로 누가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저자가 쓰는 용어를 잠깐 빌려 표현하자면 놀라운 흡인력이 있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하루키가 쓴 글들이 각각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다들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떤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 분리된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씩 맞춰나가는 느낌이랄까. 물론 각각의 작품들마다 등장인물과 소설 속 각각의 배경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본질적인 무언가는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에 사용되는 소재라든가 특정한 주제(예를 들면 상실같은 것)가 반복되어 등장한다는 것도 독자인 내가 느끼는 것들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쓰다보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처음 밑줄친 내용들에 대해 언급하자면 핵심은 결국 모두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될 일은 무슨 짓을 해도 될 것이고 안 될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안 될 것이기에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내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렇게만 쓰고보니 내가 무슨 운명론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저자의 생각을 내가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내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선에서 무언가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내 역량이 어떤 것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욕심을 내어 그것을 취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크나큰 고통과 함께 좋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세상에는 옳지 않은 선택이 옳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옳은 선택이 옳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으니 - P9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고, 대체로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 P9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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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책이다. 본격적으로 읽기에 앞서 대략 살펴봤는데 기독교적인 색채가 비교적 강한 책인 듯하다. 아마도 저자가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많이 써왔던 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죽어도 기독교는 싫다는 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종교 자체에 대해 혹은 타 종교에 대해 딱히 배타적이지 않은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이기도 한데, 시작부터 뭔가 선과 악의 대결구도가 강렬하게 펼쳐질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 편지들을 읽는 여러분은 악마가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_C. S. 루이스 - P1

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 P2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 - P2

「믿음의 글들」은 평생, 혹은 가장 귀한 순간에 진리를 위하여 죽거나 죽기를 결단하는 참 믿는 이들의, 참 믿는 이들을 위한, 참 믿음의 글입니다. - P2

"성경말씀에 승복하지 않는 악마를 퇴치하려면,
비웃고 업신여기는 것이 상책이다.
악마는 경멸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_마르틴 루터 - P7

"오만한 영(靈), 악마는......
놀림감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_토마스 모어 - P7

악마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인류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서로 정반대이지만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인 오류들이지요.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악마를 믿되 불건전한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쏟는 것입니다. 악마들은 이 두 가지 오류를 똑같이 기뻐하며, 유물론자와 마술사를 가리지 않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 P11

스크루테이프가 하는 말 중에는 심지어 그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조차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들이 많습니다. - P12

스파이크 목사나 환자의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공정하게 그려졌다고 보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지구상에서 그런 것처럼 지옥에도 희망사항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 P12

악마들이 날짜를 매기는 방식이란 것이 지상의 시간과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 P12

유럽대륙의 전쟁사(戰爭史) 같은 문제는, 어쩌다가 한 인간의 영적 상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스크루테이프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 P12

웜우드Wormwood. ‘쑥‘이라는 뜻, 쑥은 쓴맛, 고난, 고뇌를 상징한다. 여기에서는 스크루테이프의 조카이자 신참 악마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 P15

환자patient. 각각의 악마들이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 - P15

악마의 입장에서 ‘원수‘ 는 그리스도이다. - P15

환자를 교회에서 멀리 떼어 놓기에 가장 좋은 협력자는 논증이 아니라 전문용어란 말이다. 유물론을 진리로 믿게 만들려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거라! 그보다는 유물론이야말로 힘차고 단호하면서도 용맹스러운 미래의 철학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해. 네 환자는 그런 데 더 신경을 많이 쓰는 족속이니까. - P16

논증을 동원할 경우 우리의 투쟁 전체가 오히려 원수의 확고한 기반이 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원수도 논리에 강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 P16

논증이라는 행위는 잠자고 있는 환자의 이성을 흔들어 깨우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야. - P17

그때 그때 드는 생각들이야 어떻게든 그 흐름을 비틀어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 있지만, 네 환자는 그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찰나적인 감각적 경혐의 흐름에서 눈을 돌려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치명적인 버릇을 들이게 될 게다. 그러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붙들어 두어야 해. 그것이야말로 ‘실제의 삶‘이라고 믿도록 가르치되, ‘실제‘ 가 무슨 뜻인지는 절대 묻지 못하게 하거라. - P17

네 환자는 너처럼 순전한 영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너는 한 번도 인간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불쾌하게도 원수는 이 점에서 우리보다 유리하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범속한 것의 압력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는지 실감하기 힘들 게다. - P17

네가 맡은 환자만 해도 어려서부터 수십 가지의 상충되는 철학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게야. 그래서 어떤 교리를 보아도 ‘참‘이냐 ‘거짓‘이냐를 먼저 따지기보다는 ‘학문적‘이냐 ‘실용적‘이냐, ‘케케묵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인습적‘인 것이냐 ‘과감한‘ 것이냐를 따지게 되어 있지. - P16

‘실제의 삶‘ 앞에 ‘그 따위 관념‘ 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 P18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현실의 체감이야말로 혐오스러운 일개 논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궁극적 안전장치" - P19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 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일상성을 환자한테 주입해야 해. - P19

꼭 한 가지만 명심해 두거라. 기독교에 대해 방어를 하겠답시고 과학(그러니까 진짜 과학)을 활용하려 들면 절대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과학은 결국 네 환자를 부추겨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사색하게 만들고 말 게다. 현대 물리학자들 가운데 그런 애석한 사례가 많이 있었지. - P19

만일 환자가 계속 과학을 가지고 장난치려 들거든, 경제학과 사회학을 들이게 하거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의 소중한 ‘실제의 삶‘에서 멀어지는 것만큼은 용납하면 안 돼. 뭐니뭐니해도 제일 좋은 방법은 과학서적 따위는 아예 읽지 못하게 하면서 ‘그런 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그럴듯하고 막연한 느낌만 심어 주는 거지. 어쩌다 주워들은 이야기나 이런저런 쪼가리 독서에서 얻은 것들이야말로 이른바 ‘현대과학의 부단한 탐구가 성취한 결실‘이라고 믿게 만들거라. - P20

너의 임무는 환자의 곁을 지키며 그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요즘 네 또래 젊은 악마놈들 하는 말만 들으면, 우리 일이 선생질인 줄 알겠더라!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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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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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저자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난 뒤 읽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중 주목해서 봐야 하는 인물은 주인공인 하지메를 비롯해 시마모토, 이즈미, 유키코 이렇게 4명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하지메는 12살이 되던 해에 시마모토라는 여학생과 사귀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시마모토는 전학생이었는데, 그녀는 하지메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등하교를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둘 다 외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책을 읽거나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등 취미도 엇비슷했기에 그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들 정도로 굉장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 둘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물리적 거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한편 이즈미라는 인물은 하지메가 고등학교 때 새롭게 알게 된 친구인데, 하지메는 이즈미와 사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3살 연상인 이즈미의 사촌 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즈미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만다. 결국 나중에는 하지메 본인도 이때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지만 이즈미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굉장한 트라우마로 남고 만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하지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사촌 언니가 죽고나자 하지메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통보하여 그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소설이 끝날때까지 이즈미는 이때 받은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다. 불행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이즈미라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유키코는 하지메가 서른이 되던 해에 결혼한 여자인데, 그녀의 아버지는 중견 건설회사 사장으로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다. 하지메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째즈바를 운영하게 된다. 하지메는 그간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2호점을 낼 정도로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고 월간지에 인터뷰가 수록되기도 한다.

뭐 이정도면 솔직히 무슨 재벌급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 법도 한데, 소설 속 하지메에게 참기 힘든 유혹이 찾아온다. 그건 바로 첫사랑이었던 시마모토였다. 시마모토는 월간지에 실린 하지메의 인터뷰를 보고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 그녀가 찾아왔을 때 하지메는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를 알아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금 발동하고 만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하지메의 혼돈과 방황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메는 아내인 유키코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첫사랑이었던 시마모토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현모양처인 유키코 대신 본능적으로 더 끌리는 시마모토와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게 된다.

이후 유키코는 하지메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그와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 부분에서 예상과 달리 유키코는 감정적으로 화를 내기보다는 다소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지메에게 물어보는데 독자인 나는 이러한 유키코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분노할 수 있음에도 굉장히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모습에선 진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중간중간 생략하거나 빼먹은 부분들이 조금씩 있긴 하겠지만, 대략적인 스토리의 흐름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에서 핵심이라고 언급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캐릭터를 하나 꼽자면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이 시마모토라고 답할 것이다. 위에서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는 하지메와 재회하고 난 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밝히지 않는다. 하지메는 그녀가 현재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독자인 나는 이러한 시마모토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해지려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조금씩 감춘 채로 서로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페르소나persona(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은 철저히 감추되 자랑할만하거나 드러내고 싶은 것은 철저히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라고 섣불리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어쩌면 이러한 페르소나도 각자의 생존 방식의 일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때까지 시마모토의 자세한 근황에 대해 알 수 없었던 점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막상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게 아쉬워 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근황에 대해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딱히 그럴 필요도 없다. 각자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소설의 스토리를 전반적으로 이끌고 있는 하지메의 모습을 보면서는 개인적으로 첫사랑은 그냥 추억으로 남기고 거기서 끝내야지 그 선을 넘어서 다시 나타난 과거의 연인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파고들다보면 현재의 행복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하지메가 미혼인 상태였다면 얘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한 번 헤어졌던 연인이라면 그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기에 웬만해선 한 번 헤어졌던 인연을 굳이 다시 붙잡으려 하지 않는 게 나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즈미와 유키코라는 캐릭터에 대해선 위에서 살짝 언급한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정리차원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해 보겠다.

이즈미의 경우 물론 그녀가 받은 상처나 트라우마가 결코 가벼운 것이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자신이 받은 상처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거기에만 매몰되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행의 블랙홀에 빠뜨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과거와는 가급적 빨리 절연하고 현재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보여진다. 아쉽게도 소설 속 이즈미는 이렇게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만큼은 이즈미와 반대의 길을 걸어갔으면 한다.

이즈미와는 반대로 유키코는 자신의 배우자인 하지메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모습인데, 그녀의 성숙한 태도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는 데 정말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유키코도 앞서 언급한 이즈미와 비슷한 정도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유키코는 이즈미처럼 그 상처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상처를 뛰어넘는 용서를 통해 자신도 살고, 하지메도 살고 궁극적으로 두 딸이 있는 자신의 가족까지 살린다. 개인적으로는 용서의 힘이 이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용서라는 건 결국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살리는 선택인 것이다. 글을 쓰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써 제안된 방법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되었다.


리뷰를 쓰다보니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쓰게 되었는데, 이외에도 소설 속 곳곳에 등장하는 째즈음악 혹은 클래식 음악 등도 일부 만나볼 수 있다. 특별히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본문에 등장했던 음악 혹은 해당 뮤지션들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으니 한 번 쭉 읽어보면서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음악들을 유튜브 등에 검색하여 들으면서 본문을 읽어나가기도 했었는데 특정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음악이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소설의 제목에 나온 '국경의 남쪽'은 냇 킹 콜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양의 서쪽'이라는 말은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스토리가 본문에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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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서문에 나온 작가의 말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을 완성하면서 작가로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에 덧붙여 좋은 이야기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도 지면을 통해 피력한다.

개인적으로 약 3년 전에 동저자의 작품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책과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책이 살짝 다른 듯하면서도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도 서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약 3년 전,《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한 다른 독자님들의 리뷰를 읽었던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면 그 책과 오늘 시작하는 이 책의 내용이 얼추 비슷하게 전개된다는 글들을 적잖이 봤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당시 독자인 나는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라 저자인 하루키는 물론이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요근래에 하루키의 책들에 꽂혀서 그가 쓴 작품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던 와중에 어느덧 이 작품(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읽기에 이르렀다.

저자가 좋은 이야기라고 자신있게 말하는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혹 마케팅적인 이유로 그냥 미사여구를 갖다붙이는 경우들도 물론 있겠지만 하루키라는 작가의 특성상 그렇게 과장된 표현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작가의 말을 한 번 믿고 읽어보고자 한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나, 자발적이며 좋은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언어의 차이를 넘어, 자발적이며 좋은 힘을 발휘하는 법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P7

태양은 왜 지금도 빛나지
새들은 왜 또 노래하고
그들은 모르나
세계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 P12

깊은 강은 고요하게 흐르는 법이다. - P14

행동의 반복 없이,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편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 P17

나는 나 자신이 세계의 다양한 현상과 사물의 형상, 존재를 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편의적인 성격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라ㅡ물론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ㅡ만사를 편의적으로 파악하는 편이 정통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본질의 이해에 근접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18

예를 들어서 지구가 공처럼 둥그런 물체가 아니라 거대한 커피 테이블 같다고 생각한다 한들, 일상생활 수준에서 얼마나 큰 불편이 있을까? 물론 이는 상당히 극단적인 예일 뿐, 모든 것을 그렇게 자의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구가 거대한 커피 테이블이라는 편의적인 생각이,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유의 사소한 문제ㅡ예를 들면 인력과 날짜 변경선과 적도처럼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ㅡ를 말끔하게 배제해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주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 적도 문제와 관계할 일이 평생에 몇 번이나 있단 말인가. - P19

세계의 존재 양식에는 실로 다양한, 더 분명하게 말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개개인은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응축된 가능성으로 만들어진 커피 테이블이다. - P19

끊임없는 연습이 따라야 능력이 향상되고, 양식이 세련되어 진다. - P19

특수한 현실 안에서 비특수성은 역설적 특수성으로 편의상 배제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 P20

나는 그저 주어진 정당한 직무를 다하기 위해 여기에 왔을 뿐이다. 겁먹을 일도 전혀 없고, 긴장할 필요도 없다. - P22

물론 문이 열린다는 건 그때껏 그 문 때문에 연속성을 박탈당했던 두 공간이 연결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탄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 P23

혼란스러워진다는 것과 싫어한다는 건 같은 뜻이 아니다. - P27

혼란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통상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결과가 주어진다. 물론 그렇게 멋지게 흘러가지 않는 일도 있다. - P27

인간이 살찐 형태는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무수하다. - P27

간혹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면, 그 호감을 슬쩍 시험해 보고 싶어진다. 그것이 진짜 호감인지 어떤지, 그리고 만약 진짜 호감이라면 어떤 식으로 기능하게 될지 그런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진다. - P28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과 똑같은 거야." - P39

대지에 흐르는 어마어마한 피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 P42

같은 하양이라도 품위 있는 하양과 천박한 하양은 내력 자체가 다르다. - P43

폭포라는 것은 그 폭포에 어울리는 음량을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 - P56

"세상은 참 다양합니다. 그래서 재미있지." - P62

"과학의 악용은 과학의 선용과 나란히 현대 문명을 위기 상황에 빠뜨리고 있어요. 나는 과학이란 과학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 P63

주어진 수치를 우뇌에 입력해서 전혀 다른 기호로 전환한 다음 좌뇌로 옮기고, 좌뇌로 옮긴 것을 처음 숫자와 전혀 다른 숫자로 꺼내서, 그걸 용지에 타이핑한다. 브레인 워시란 간단히 말하면 그런 작업이다. - P68

우리가 그 기술을 고도화하면 그들도 그에 대적하는 기술을 고도화한다. 우리는 자료를 지키고, 그들은 자료를 훔친다. 고전적인 형태의 경찰과 도둑 패턴이다. - P69

정보는 깔끔하면서도 돈이 된다. - P71

입을 움직여 무슨 말이든 하는 것이 뇌의 피로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71

"소리 뽑기는 발성과 청각 양쪽에서 가능해요." 노인이 말했다. "다시 말해서 아까처럼 물소리만 청각에서 소거하는 것도 가능하고, 또는 아예 발성을 소거하는 것도 가능하지. 더욱이 발성은 개인적인 것이라서 백 퍼센트 소거가 가능해요." - P73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타인에게 왜 알리겠나. 내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하고 있는데." - P73

"오래된 꿈이 오래된 꿈이지 뭐겠나. 도서관에 가면 아주 지긋지긋할 만큼 있어. 마음껏 들어 보고 바라보라고." - P78

"당신이 뭘 질문하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대답을 하고 말고는 내 자유야." - P78

"아무튼 당신은 앞으로 매일,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꿈을 읽어. 그게 당신의 일이니까. 저녁 6시에 도서관에 가서, 10시나 11시까지 꿈을 읽도록. 저녁은 여자가 준비해 줄 거야. 나머지 시간은 당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아. 아무 제한이 없어. 알겠나?" - P78

"그런데 그 일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죠?"
"글쎄, 언제까지 계속될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만 둘 시기가 올 때까지겠지." - P79

시간에 신경을 쓰면 계산하기가 껄끄러워진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내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 계산을 시작할 때가 일의 시작이며, 계산을 끝낼 때가 일의 끝이다. 시간에 관해 필요한 것은 1시간ㅡ30분ㅡ1시간ㅡ30분 이라는 사이클뿐이다. - P89

나는 평소 소파를 고르는 안목에 그 사람의 품위가 드러나는 법ㅡ아마 편견이겠지만ㅡ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소파란 모름지기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확고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좋은 소파에 앉으며 자란 인간밖에 알지 못한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소파는 또 다른 좋은 소파를 낳고, 나쁜 소파는 또 다른 나쁜 소파를 낳는다. 그런 것이다. - P89

고급 차를 몰고 다니면서 집에는 2, 3급 소파를 놓고 사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비싼 차에는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그래 봐야 그저 비싼 차에 지나지 않는다. 돈만 지불하면 누구든 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파를 사려면 나름의 식견과 경험과 철학이 필요하다. 돈도 필요하지만, 돈만 내면 그만이 아니다. 소파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 없이는 좋은 소파를 가질 수 없다. - P90

"성욕은 바람직한 방식으로 해소해야 해요." - P94

"성욕이란 것은 정당한 에너지예요. 이건 확실해요. 성욕을 해소하지 못한 채 쌓아 두면 두뇌도 명석함을 잃고, 몸의 균형도 무너지지.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야. 여자의 경우는 생리가 불규칙해지고, 생리가 불규칙해지면 정신의 안정도 잃게 되지." - P94

"진화란 그런 것이에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그리고 슬퍼요. 즐거운 진화는 있을 수 없지." - P97

"늦든 빠르든 자네도 알게 될 테지만, 진화란 가혹한 것이지. 가장 가혹한 게 뭘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시죠." 하고 나는 말했다.
"선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진화를 선별할 수 없지. 홍수나 지진이나 눈사태 같은 거예요.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일단 닥치면 저항할 수 없으니까." - P99

나는 문제의 대부분은 모호한 말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P99

추측은 추측이 적성에 맞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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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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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전반적인 틀 자체만 놓고보면 《상실의 시대》에서 한 단계 진화한 듯한 느낌의 소설이다. 주인공인 하지메는 과거 첫사랑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런저런 방황들을 많이 하는데,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하고 방황할 순 있겠지만 결국에는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 외에도 이것저것 생각해볼만한 포인트들이 소설 곳곳에 담겨있는데 각자의 필요에 따라 찾아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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