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신장재편판 9 - 북산 vs. 해남대 부속 2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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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이 9권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강백호였다. 8권에서 해남과의 전반전이 끝나고 9권에서는 전반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후반전이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체력이 떨어진 북산에서 유일하게 넘치는 에너지 레벨을 가지고 승부를 끝까지 긴장감있게 끌고 간 사람이 바로 강백호였기 때문이다. 비록 마지막에 약간 아쉬운 장면이 나오긴 했지만 강백호의 열정만큼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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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은 해남과 치열한 명승부를 펼치며 끝까지 따라갔지만, 강백호가 경기 종료 5초전 리바운드를 한 뒤 센터인 채치수에게 패스한다는 것이 그만 채치수와 생김새가 비슷한 해남 선수인 고민구에게 가는 바람에 너무나도 아쉽게 2점차로 패배하고 만다. 너무나도 아쉬웠던지라 경기후 다음날 농구부원들이 의기소침해진 상태로 다시 체육관에 모이는데, 3학년 선배인 정대만을 중심으로 다시 의기투합하여 파이팅을 불어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패한 경기는 결승리그의 총 3경기 중 첫 경기였기에 남은 두 경기를 모조리 잡아내면 상위 두 팀에게 주어지는 전국대회 티켓을 충분히 따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포기를 모르는 남자인 정대만도 파이팅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선배인 정대만의 파이팅 불어넣는 말을 들은 송태섭이 그에 응답하며 결의를 다지는 말이다. 그의 말과 눈빛에서 강렬한 패기가 느껴졌다.

한편 강백호는 자신의 패스미스를 자책하면서 몇 일간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백호가 걱정 됐는지 소연이는 백호를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건낸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비록 지기는 했지만 강백호는 슬램덩크를 실전에서 처음으로 성공시켰었는데, 소연이는 의기소침해져있던 강백호에게 이 슬램덩크를 칭찬하면서 강백호가 다시 예전의 자신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농구부로 돌아온 강백호는 락커룸에서 서태웅과 마주치게 되는데, 서태웅은 강백호가 기대 이상으로 잘했다고 치켜새워주는 척 하면서 네 실력이 아직 그것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은근 강백호를 무시한다. 그러면서 경기에 진 것은 강백호 때문이 아니라 농구 실력이 좋은 자신의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강백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요즘 용어로 하자면 제대로 긁혔고) 급기야 서태웅과 주먹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강백호와 서태웅이 주먹다짐을 한 다음날 정대만과 송태섭이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들은 강백호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만다. 1학년인 강백호가 그간 길었던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체육관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백호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 때문에 지난 경기에서 진 거라고 고백함과 동시에 삭발을 통해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패배는 한 번으로 충분해요. - P333

절체절명 - P333

아직도 그 패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그 바보가... - P336

어떤 천재에게도 실수는 있는 법이야!! - P342

저 녀석말야.... 윤대협이 인정한 녀석이야... - P348

나 때문에 진 거야.... 나 때문에... - P353

뭐 하고 있냐? 멍청아. - P353

네가 실수를 범할 건 처음부터 계산에 들어있었다.
별로 놀라운 게 아니지. 네 실력은 아직 그 정도니까. 네 실수가 승패를 좌우하거나 하진 않아. - P357

이 녀석을 한주먹에 날려보낸다 해도 의미가 없어ㅡ!! 이 녀석을 농구로 날려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 P358

진 건 내 책임이다... 내 체력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더라면... 어젠 이겼을거야. - P360

네 녀석이야말로 웃기지마라!! - P360

나 때문에 진 거니까.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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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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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라이프캐스팅‘(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여,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껍데기와 내면에 감추어진 진짜 모습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또한 겉과 속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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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지난번 포스팅으로 이 소설에 관한 포스팅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는데,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 나온 내용을 차마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어서 비록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기록을 남긴다.

비록 독자인 내가 작가님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밑줄친 문장들은 개인적으로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중 가장 생각해볼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 정녕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라이프캐스팅(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이라는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소재를 통해 작가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껍데기 혹은 껍질과 그 속에 담겨있는 진짜 알맹이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진짜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모습을 찾아나가고자 애쓰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만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몇몇 핵심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독자인 나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끌었던 인물은 실내 건축가로 등장하는 E라는 사람이었다. E는 이 소설 후반부에 그간 보여줬던 정리되고 정돈된 자신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던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화자인 장운형에게 털어놓는데, 그동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E의 내면에만 꼭꼭 숨겨져 있었던 이야기들을 쭉 읽어나가면서 사람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결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겉과 속이 물론 똑같은 경우도 아예 없진 않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완전히 똑같은 경우보다는 아예 상반되거나, 아예 상반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는 다른 경우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게,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무던히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간극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진짜로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나‘가 ‘진짜 나‘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고 ‘진짜 나‘를 잘 알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로 나왔던 L이라는 인물도 화자에게 ‘진짜 나‘가 행복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난 뒤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정리하자면, 독자인 나에게 이 소설은 껍데기나 껍질이 아닌 ‘진짜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는다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화자와 E가 느꼈던 밀도높은 친밀감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 P328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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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다보니 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3부에 이르렀다. 3부에선 화자는 그대로이나 그동안 안나왔었던 새로운 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P와 E라고 지칭되는 두 사람인데, P는 가구 디자이너이고, E는 실내 건축가라고 한다.

석고로 본을 뜨는 작업을 하는 화자 그리고 P와 E사이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 3부의 주된 흐름이다.

한편 앞선 2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L이라는 사람은 3부에선 한동안 잊혀져 있었는데, 어느순간 문득 화자의 집 앞에 나타난다. 독자인 나도 그간 L에 관해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았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났기에 읽으면서도 소설 속 화자처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과거에 L은 말하기 힘든 이유로 인해 폭식을 했다가 그로인해 자신의 외형이 볼품없게 되자 억지로 토악질을 하면서까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등 외적인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인물이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L이 화자에게 지난 1년간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보면서 하늘 아래 같은 세상에 살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복의 정도는 천차만별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있죠. 나 요즘...... 거울 잘 안 봐요. 저울에두 안 올라가요. 그냥, 그러구 싶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편해요. 이렇게 편한 걸, 전엔 몰랐어요. 저울에 나타나는 쬐그만 숫자 두 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내 전부라구만 생각했죠." - P265

"나・・・・・・ 과거는 생각 안 해요. 미래두 생각 안 해요. 상담 선생님도 그게 좋대요. 내 이빨,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내 청춘이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린 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두 생각 안 해요. 생각하려다가두 얼른 잊어버려요. 그냥, 순간순간 살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 P266

"......천국이 따로 없어요." - P266

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었던가? L의 몸을 떠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처 예기치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리라 믿었던가? 그것을 내 손으로 거머쥘 수 있으리라 여겼던가? 오산이었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한 조각이 남았을 뿐이었다. - P270

‘왜?‘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 P271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고." - P284

우동 정식을 먹는 동안,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으로 연이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녀가 국물을 마시는 소리, 우동을 씹는 소리, 단무지를 아삭아삭 베어무는 소리들이 견딜 수 없이 내 마음을 끌었다. 견딜 수 없이, 그것들은 진짜였다. - P285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와 개, 그리고 사람처럼." - P286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 P286

"나보다 더 큰 몸을 가진 여자를 떠서, 그 틀집 속으로 들어가 죽는 것. 그렇게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 P293

천천히 알게 됐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별수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 제목이 뭐더라. 다리가 불구인 남자가 나오는 서머셋 몸의 소설과 비슷한 얘기지. 내가 견디다 못해 헤어지자고 하면 언쟁 끝에 반드시 튀어나오지. 육손이 기집애.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내가 끝냈을 거야. 네 손을 만질 때마다 징그러웠어. - P296

난 오랫동안 노력했어.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어. 얼굴과 복장이 사람을 사로잡아버리면 다른 것은 잘 안 보인다는 걸 알게 됐지.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키나 몸집이 어땠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수도 있다는 걸. - P297

내 원칙은 이랬어. 얼굴에 빛을 가질 것, 미적미적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당당하고 명쾌할 것.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밝은 얼굴을 하는 거지. 설득력 있는 얼굴, 호감을 주는 얼굴. 마음을 끄는 얼굴. - P298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아직 어리석었어. 그것・・・・・・ 잘라내버린 그 손가락이 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 뒤에 감춰진 진짜 나란 생각 말이야. 사랑을 한다면, 그걸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 P298

하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줄곧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고민은 이 전공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였어. 어떻게든 손가락이 노출되기 쉬운 직업이니까. 하지만 역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그것이 가려진다는 걸 난 알고 있었지. - P299

다행히 나에겐 재능이 있었어. 조롱하는 아이들을 피해 정육점집 뒷방에서 혼자 뒹굴며 키웠던 상상력, 뻘뻘 땀 흘리며 베개를 향해 주먹을 날렸던 오기………… 뜻하지 않게, 그런 것들이 내 힘이 돼주더군. - P299

지금까지도 나한텐 밤새워 상상하는 버릇이 있어. 설계 중인 집에 내가 살고 있는 상상이지. 진짜의 내가 아니라ㅡ어차피 그게 누군지는 영원히 모르게 됐으니ㅡ 클라이언트들의 몸과 마음. 직업과 취향을 가진 내가 일상을 살고 있는 거야. 그 상상을 완벽하게 현실화시켜주는 건, 틈을 보이지 않는 내 오랜 근성이지. 일을 150퍼센트까지 마무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습관...... 내 직업에 꼭 들어맞는 기질들이지. - P300

이제, 내가 떠벌리지 않는 한, 내 과거를 나에게 되살려줄만한 사람들은 내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셈이지. 그 소읍의 꾸덕꾸덕한 머리칼을 한 여자애가 나라는 걸 알아볼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여자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 - P300

・・・・・・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끔찍하게 비어 있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는지. - P300

나는 사람들의 돈을 받아서 그들이 사는 곳을 새것으로 만들어주지. 새것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중고품들과 벼룩시장, 재활용품 따위를 난 증오해. 그 물건들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시간, 기억, 때와 먼지와 흠. 흉터, 낡아간 흔적들……… 지긋지긋해. 새것은 달라. 깨끗하고 아름답지. 아직 제 쓰임대로 쓰여본 적 없는 물건들을 나는 좋아해. 커버를 뜯지 않은 침대와 소파, 상표를 뜯지 않은 옷들. 아직 물에 헹궈본 적 없는 접시들……………거기 배어 있는 약품 냄새, 반들반들한 광택을 사랑해. 내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해놓고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야.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행복이지. - P301

내 클라이언트들은 이따금 내 이미지를 기억할 거야. 그리고 자신들이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청결하게, 우아하게, 당당하게...... 그리고 만족하겠지. 어쨌건 그들의 생활은 좀더 깨끗한 것, 좀더 쾌적한 것. 좀더 고급스러운 것이 되었을 테니까. 최대한 그들의 취향에 맞춰주었으니,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는 공주처럼 자신의 취향에 하루하루 반하곤 하겠지. - P301

내 취향? 웃기지 말아. 사람들은 내 취향이 미니멀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볼까. 난 다만 그게 오래 지속될 영향력 있는 스타일이라는 걸 알 뿐이야. - P301

그래, 솔직히 말하지. 어느 순간에는, 가끔은,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도 있어. 내가 극도로 냉정하게 느껴질 때, 또는 내가 극도로 동물적으로 느껴질 때. 오래전부터 나는 내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았지. 내 웃음을, 눈물을, 내 혀를 나는 믿지 않아. - P301

물론 난 타인 역시 믿지 않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 해도 거기엔 조건이 있는 거지. 내 예절과 호의, 외모와 지위, 흔히 인간성이나 마음씀씀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난 뒤에도 그들이 날 좋아할까? 천만에.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없어. - P301

다만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야. 호기심과 의심에 사로잡힌 인간들ㅡ처음엔 너도 그 부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ㅡ그리고 날 시기하고 선망하는 사람들. 그런 치들은 적당히 견제하는 동시에 지치지 않는 호의를 퍼부어서, 나를 이용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도록 내 편으로 만들어두지. 만일 남자라면 하룻밤쯤 자줘. 그게 뒤탈이 없으니까. - P302

처음 널 봤을 때, 날 보는 눈이 끔찍하다고 느꼈어. 뼈까지 투시되는 듯한 악몽이었지. 한데, 동시에 네가 싫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쯤 이런 이야기를 미친 듯이 지껄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란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 - P302

네가 원하는 건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어. 네가 나에게서 뭔가를 집요하게 찾아내려 한다고 느꼈으니까. 내 사라진 손가락의 희미한 흔적………… 그것이 전부인가? 생각할수록 어려워지더군. 내가 감추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손가락을 감추려고 했지. 그 다음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감춰야 했지. 그것을 감춘다는 것을 또다시 은폐해야 했고...... - P302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 P302

그래.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이 양파 껍질들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어. 끝까지 벗겨낸다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 - P302

네가 혼란을 느꼈다면, 진짜 나를 알고 싶었다면, 이제 알아둬. 내 화장, 내 몸놀림, 내 표정.... 그래, 네가 뜨고 싶어했던 내 얼굴, 그게 나야. 가끔 나는 발가벗은 채 전신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있어. 최고급 향수를 바르고, 속옷부터 한 겹 한 겹 최고의 옷을 입지. 가장 훌륭한 화장을 하고, 가장 훌륭한 웃음을 짓지. 내 학력과 경력, 내가 설계한 공간들, 썩 괜찮은 은행 잔고, 그 동안 읽은 책과 잡지, 신문들, 지식과 교양,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 그외의 것은 없어. 그래. 찬사가 아니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겠지. - P303

어쩌면 난 분홍신을 신고 춤추는 학예회의 무희였던 것 같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생동감 있게 춤추는 아이. 그러나 죽도록 지쳐 헐떡이는 아이. 정작 갖고 싶었던 건 발을 조이는 토슈즈가 아니라. 커다랗고 붉은 권투 장갑 한 켤레였던 계집애. - P303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유쾌한 장난인지, 과한 농담인지, 진심인지, 단순한 폭력인지, 제어할 수 없는 광기인지 나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것을 알 수 없는 한 어떤 행동도 불가능했다. 만일 그녀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면, 좀 전에 내 입술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힘으로 나이프를 꽂는다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소름이 일어섰다. - P305

그녀의 흰 석고 가면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침착하고 사교적인 표정. 그 아름다운 껍데기 뒤의 얼굴을 나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손을 보았다. 좀 전에 끌에 찢겼다가 검붉은 피딱지가 엉긴 오른손과, 20여 년 전 외과 수술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왼손을 나는 확인했다. 다만 그뿐, 다른 어떤 식별할 수 있는 표정도 그 손들에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 P306

"재미있군. 정작 네 몸은 처음이라니." - P306

진실로 잔인한 것은 흥분이나 격노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순간만큼 그것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 P307

"이제부터 네 껍질을 벗겨줄게." - P308

그녀가 내 오른손을 잡고 하나하나의 손가락을 떼어내는 동안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 내 얼굴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그것이 없다면 이미 나는 없는 것이나 같은 것. - P310

"이제 다 끝났어." - P311

나는 고개를 들어, 금이 간 사물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업실 바닥에는 이제 그녀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육체의 자잘한 파편들이 피와 땀, 바닥의 먼지로 얼룩진 채 흩어져 있었다. - P312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 P313

"아마 그게...... 내 통로인 것 같아."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무엇으로 이어지는?"
"내 존재 뒤에 있는 것…………… 죽음도 삶도 아닌 것. 심연 같은 것, 까마득히 깊은." - P314

"네가 아까 날 꺼냈을 때."
그녀는 구두 두 짝을 벗고 맨발이 되었다. 두 팔로 젖가슴을 싸안은 채 나에게로 자박자박 다가왔다.
"정말 꺼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 P315

"네가 날 꺼냈고...... 또 난 널 꺼낸 건가?" - P315

"만일 우리가 꺼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다시 들어갈 수 없다면...... 저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 P315

"따뜻해."
그녀는 숨차게 속삭였다.
"따뜻한 손이야." - P317

그녀의 입술에 웃음이 물렸다. 마치 처음 웃는 아기처럼 그 웃음은 불가사의했다. - P317

몸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 P319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비춰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 P320

예기치 못했던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거리에 나오면, 이 사회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영의 소형 승용차 뒷좌석에 실려 병원과 병원을 옮겨다니는 동안 내가 차창 밖으로 본 것은 다른 행성의 삶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여자들, 청바지 차림의 대학생들, 햇빛, 상점들. 횡단 보도, 버스들과 전철역, 그 모든 것들이 외계의 것이다. - P320

어찌 됐든 당대의 작품은 당대에 의미있는 거 아닙니까?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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