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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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라이프캐스팅‘(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여,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껍데기와 내면에 감추어진 진짜 모습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또한 겉과 속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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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지난번 포스팅으로 이 소설에 관한 포스팅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는데,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 나온 내용을 차마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어서 비록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기록을 남긴다.

비록 독자인 내가 작가님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밑줄친 문장들은 개인적으로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중 가장 생각해볼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 정녕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라이프캐스팅(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이라는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소재를 통해 작가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껍데기 혹은 껍질과 그 속에 담겨있는 진짜 알맹이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진짜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모습을 찾아나가고자 애쓰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만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몇몇 핵심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독자인 나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끌었던 인물은 실내 건축가로 등장하는 E라는 사람이었다. E는 이 소설 후반부에 그간 보여줬던 정리되고 정돈된 자신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던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화자인 장운형에게 털어놓는데, 그동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E의 내면에만 꼭꼭 숨겨져 있었던 이야기들을 쭉 읽어나가면서 사람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결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겉과 속이 물론 똑같은 경우도 아예 없진 않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완전히 똑같은 경우보다는 아예 상반되거나, 아예 상반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는 다른 경우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게,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무던히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간극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진짜로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나‘가 ‘진짜 나‘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고 ‘진짜 나‘를 잘 알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로 나왔던 L이라는 인물도 화자에게 ‘진짜 나‘가 행복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난 뒤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정리하자면, 독자인 나에게 이 소설은 껍데기나 껍질이 아닌 ‘진짜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는다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화자와 E가 느꼈던 밀도높은 친밀감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 P328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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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다보니 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3부에 이르렀다. 3부에선 화자는 그대로이나 그동안 안나왔었던 새로운 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P와 E라고 지칭되는 두 사람인데, P는 가구 디자이너이고, E는 실내 건축가라고 한다.

석고로 본을 뜨는 작업을 하는 화자 그리고 P와 E사이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 3부의 주된 흐름이다.

한편 앞선 2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L이라는 사람은 3부에선 한동안 잊혀져 있었는데, 어느순간 문득 화자의 집 앞에 나타난다. 독자인 나도 그간 L에 관해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았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났기에 읽으면서도 소설 속 화자처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과거에 L은 말하기 힘든 이유로 인해 폭식을 했다가 그로인해 자신의 외형이 볼품없게 되자 억지로 토악질을 하면서까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등 외적인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인물이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L이 화자에게 지난 1년간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보면서 하늘 아래 같은 세상에 살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복의 정도는 천차만별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있죠. 나 요즘...... 거울 잘 안 봐요. 저울에두 안 올라가요. 그냥, 그러구 싶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편해요. 이렇게 편한 걸, 전엔 몰랐어요. 저울에 나타나는 쬐그만 숫자 두 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내 전부라구만 생각했죠." - P265

"나・・・・・・ 과거는 생각 안 해요. 미래두 생각 안 해요. 상담 선생님도 그게 좋대요. 내 이빨,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내 청춘이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린 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두 생각 안 해요. 생각하려다가두 얼른 잊어버려요. 그냥, 순간순간 살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 P266

"......천국이 따로 없어요." - P266

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었던가? L의 몸을 떠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처 예기치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리라 믿었던가? 그것을 내 손으로 거머쥘 수 있으리라 여겼던가? 오산이었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한 조각이 남았을 뿐이었다. - P270

‘왜?‘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 P271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고." - P284

우동 정식을 먹는 동안,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으로 연이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녀가 국물을 마시는 소리, 우동을 씹는 소리, 단무지를 아삭아삭 베어무는 소리들이 견딜 수 없이 내 마음을 끌었다. 견딜 수 없이, 그것들은 진짜였다. - P285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와 개, 그리고 사람처럼." - P286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 P286

"나보다 더 큰 몸을 가진 여자를 떠서, 그 틀집 속으로 들어가 죽는 것. 그렇게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 P293

천천히 알게 됐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별수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 제목이 뭐더라. 다리가 불구인 남자가 나오는 서머셋 몸의 소설과 비슷한 얘기지. 내가 견디다 못해 헤어지자고 하면 언쟁 끝에 반드시 튀어나오지. 육손이 기집애.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내가 끝냈을 거야. 네 손을 만질 때마다 징그러웠어. - P296

난 오랫동안 노력했어.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어. 얼굴과 복장이 사람을 사로잡아버리면 다른 것은 잘 안 보인다는 걸 알게 됐지.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키나 몸집이 어땠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수도 있다는 걸. - P297

내 원칙은 이랬어. 얼굴에 빛을 가질 것, 미적미적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당당하고 명쾌할 것.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밝은 얼굴을 하는 거지. 설득력 있는 얼굴, 호감을 주는 얼굴. 마음을 끄는 얼굴. - P298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아직 어리석었어. 그것・・・・・・ 잘라내버린 그 손가락이 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 뒤에 감춰진 진짜 나란 생각 말이야. 사랑을 한다면, 그걸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 P298

하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줄곧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고민은 이 전공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였어. 어떻게든 손가락이 노출되기 쉬운 직업이니까. 하지만 역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그것이 가려진다는 걸 난 알고 있었지. - P299

다행히 나에겐 재능이 있었어. 조롱하는 아이들을 피해 정육점집 뒷방에서 혼자 뒹굴며 키웠던 상상력, 뻘뻘 땀 흘리며 베개를 향해 주먹을 날렸던 오기………… 뜻하지 않게, 그런 것들이 내 힘이 돼주더군. - P299

지금까지도 나한텐 밤새워 상상하는 버릇이 있어. 설계 중인 집에 내가 살고 있는 상상이지. 진짜의 내가 아니라ㅡ어차피 그게 누군지는 영원히 모르게 됐으니ㅡ 클라이언트들의 몸과 마음. 직업과 취향을 가진 내가 일상을 살고 있는 거야. 그 상상을 완벽하게 현실화시켜주는 건, 틈을 보이지 않는 내 오랜 근성이지. 일을 150퍼센트까지 마무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습관...... 내 직업에 꼭 들어맞는 기질들이지. - P300

이제, 내가 떠벌리지 않는 한, 내 과거를 나에게 되살려줄만한 사람들은 내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셈이지. 그 소읍의 꾸덕꾸덕한 머리칼을 한 여자애가 나라는 걸 알아볼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여자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 - P300

・・・・・・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끔찍하게 비어 있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는지. - P300

나는 사람들의 돈을 받아서 그들이 사는 곳을 새것으로 만들어주지. 새것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중고품들과 벼룩시장, 재활용품 따위를 난 증오해. 그 물건들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시간, 기억, 때와 먼지와 흠. 흉터, 낡아간 흔적들……… 지긋지긋해. 새것은 달라. 깨끗하고 아름답지. 아직 제 쓰임대로 쓰여본 적 없는 물건들을 나는 좋아해. 커버를 뜯지 않은 침대와 소파, 상표를 뜯지 않은 옷들. 아직 물에 헹궈본 적 없는 접시들……………거기 배어 있는 약품 냄새, 반들반들한 광택을 사랑해. 내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해놓고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야.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행복이지. - P301

내 클라이언트들은 이따금 내 이미지를 기억할 거야. 그리고 자신들이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청결하게, 우아하게, 당당하게...... 그리고 만족하겠지. 어쨌건 그들의 생활은 좀더 깨끗한 것, 좀더 쾌적한 것. 좀더 고급스러운 것이 되었을 테니까. 최대한 그들의 취향에 맞춰주었으니,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는 공주처럼 자신의 취향에 하루하루 반하곤 하겠지. - P301

내 취향? 웃기지 말아. 사람들은 내 취향이 미니멀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볼까. 난 다만 그게 오래 지속될 영향력 있는 스타일이라는 걸 알 뿐이야. - P301

그래, 솔직히 말하지. 어느 순간에는, 가끔은,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도 있어. 내가 극도로 냉정하게 느껴질 때, 또는 내가 극도로 동물적으로 느껴질 때. 오래전부터 나는 내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았지. 내 웃음을, 눈물을, 내 혀를 나는 믿지 않아. - P301

물론 난 타인 역시 믿지 않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 해도 거기엔 조건이 있는 거지. 내 예절과 호의, 외모와 지위, 흔히 인간성이나 마음씀씀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난 뒤에도 그들이 날 좋아할까? 천만에.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없어. - P301

다만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야. 호기심과 의심에 사로잡힌 인간들ㅡ처음엔 너도 그 부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ㅡ그리고 날 시기하고 선망하는 사람들. 그런 치들은 적당히 견제하는 동시에 지치지 않는 호의를 퍼부어서, 나를 이용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도록 내 편으로 만들어두지. 만일 남자라면 하룻밤쯤 자줘. 그게 뒤탈이 없으니까. - P302

처음 널 봤을 때, 날 보는 눈이 끔찍하다고 느꼈어. 뼈까지 투시되는 듯한 악몽이었지. 한데, 동시에 네가 싫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쯤 이런 이야기를 미친 듯이 지껄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란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 - P302

네가 원하는 건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어. 네가 나에게서 뭔가를 집요하게 찾아내려 한다고 느꼈으니까. 내 사라진 손가락의 희미한 흔적………… 그것이 전부인가? 생각할수록 어려워지더군. 내가 감추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손가락을 감추려고 했지. 그 다음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감춰야 했지. 그것을 감춘다는 것을 또다시 은폐해야 했고...... - P302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 P302

그래.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이 양파 껍질들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어. 끝까지 벗겨낸다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 - P302

네가 혼란을 느꼈다면, 진짜 나를 알고 싶었다면, 이제 알아둬. 내 화장, 내 몸놀림, 내 표정.... 그래, 네가 뜨고 싶어했던 내 얼굴, 그게 나야. 가끔 나는 발가벗은 채 전신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있어. 최고급 향수를 바르고, 속옷부터 한 겹 한 겹 최고의 옷을 입지. 가장 훌륭한 화장을 하고, 가장 훌륭한 웃음을 짓지. 내 학력과 경력, 내가 설계한 공간들, 썩 괜찮은 은행 잔고, 그 동안 읽은 책과 잡지, 신문들, 지식과 교양,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 그외의 것은 없어. 그래. 찬사가 아니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겠지. - P303

어쩌면 난 분홍신을 신고 춤추는 학예회의 무희였던 것 같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생동감 있게 춤추는 아이. 그러나 죽도록 지쳐 헐떡이는 아이. 정작 갖고 싶었던 건 발을 조이는 토슈즈가 아니라. 커다랗고 붉은 권투 장갑 한 켤레였던 계집애. - P303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유쾌한 장난인지, 과한 농담인지, 진심인지, 단순한 폭력인지, 제어할 수 없는 광기인지 나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것을 알 수 없는 한 어떤 행동도 불가능했다. 만일 그녀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면, 좀 전에 내 입술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힘으로 나이프를 꽂는다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소름이 일어섰다. - P305

그녀의 흰 석고 가면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침착하고 사교적인 표정. 그 아름다운 껍데기 뒤의 얼굴을 나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손을 보았다. 좀 전에 끌에 찢겼다가 검붉은 피딱지가 엉긴 오른손과, 20여 년 전 외과 수술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왼손을 나는 확인했다. 다만 그뿐, 다른 어떤 식별할 수 있는 표정도 그 손들에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 P306

"재미있군. 정작 네 몸은 처음이라니." - P306

진실로 잔인한 것은 흥분이나 격노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순간만큼 그것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 P307

"이제부터 네 껍질을 벗겨줄게." - P308

그녀가 내 오른손을 잡고 하나하나의 손가락을 떼어내는 동안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 내 얼굴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그것이 없다면 이미 나는 없는 것이나 같은 것. - P310

"이제 다 끝났어." - P311

나는 고개를 들어, 금이 간 사물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업실 바닥에는 이제 그녀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는 육체의 자잘한 파편들이 피와 땀, 바닥의 먼지로 얼룩진 채 흩어져 있었다. - P312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 P313

"아마 그게...... 내 통로인 것 같아."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무엇으로 이어지는?"
"내 존재 뒤에 있는 것…………… 죽음도 삶도 아닌 것. 심연 같은 것, 까마득히 깊은." - P314

"네가 아까 날 꺼냈을 때."
그녀는 구두 두 짝을 벗고 맨발이 되었다. 두 팔로 젖가슴을 싸안은 채 나에게로 자박자박 다가왔다.
"정말 꺼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 P315

"네가 날 꺼냈고...... 또 난 널 꺼낸 건가?" - P315

"만일 우리가 꺼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다시 들어갈 수 없다면...... 저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 P315

"따뜻해."
그녀는 숨차게 속삭였다.
"따뜻한 손이야." - P317

그녀의 입술에 웃음이 물렸다. 마치 처음 웃는 아기처럼 그 웃음은 불가사의했다. - P317

몸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 P319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비춰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 P320

예기치 못했던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거리에 나오면, 이 사회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영의 소형 승용차 뒷좌석에 실려 병원과 병원을 옮겨다니는 동안 내가 차창 밖으로 본 것은 다른 행성의 삶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여자들, 청바지 차림의 대학생들, 햇빛, 상점들. 횡단 보도, 버스들과 전철역, 그 모든 것들이 외계의 것이다. - P320

어찌 됐든 당대의 작품은 당대에 의미있는 거 아닙니까?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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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낯설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는지 진도가 잘 나간다. 책 표지에서 어느정도 예상해볼 수 있긴 했는데, 석고로 본을 뜨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온다. 내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에 전문 용어로 이걸 뭐라고 지칭하는지 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이야기를 쭉 따라 읽어나가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정도 적응이 된 건지 익숙해진 느낌이다.

이 책에 나오는 화자는 이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하는 미술가(?) 혹은 예술가(?) 라고 할 수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L이라는 인물은 이 석고 본뜨기 작업의 대상으로 나온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L이라는 인물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의 외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L은 날때부터 뚱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식욕이 갑작스럽게 폭증하여 뚱뚱해진 사람이었다. 반면 L과 함께 다니는 O라는 친구는 외모가 나름대로 괜찮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L은 O와 함께 다니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교를 많이 당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마음의 상처가 많아보였다.

이러한 L에게 화자는 묘한 매력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L의 손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고 나중에는 L의 전신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까지도 하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해 L과 화자는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L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화자에게 말하면서 이제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더이상 화자와 석고 본뜨는 작업을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홀연히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L은 몇 년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화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간 그래도 다이어트를 하긴 했는지 살이 빠지긴 했지만, 예전에 화자가 봤던 L의 행복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무언가 불행해보였다는게 화자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L은 다이어트를 할 때 자신이 먹은 것들을 억지로 토해내어 속을 게워내는 식으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방식으로 진행해야지, L처럼 몸을 무리하게 하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요요가 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L은 자신이 요요가 왔다고 화자에게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L과 화자가 대화하던 중에 나온 말인데, 일상 생활 상식으로라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밑줄쳐보았다.

토한 다음에 바로 이 닦으면 안 된대. 뭐라더라. 위산이 치약하고 합쳐져서 이빨이 상한다나. - P155

"내가 먹는 게 아니구, 음식이 날 먹는 것 같아요. 난 그냥 정신없이, 미친 듯이 삼켜지는 거예요. 머리가 날아가버리고 없는 것 같아. 다 사서 먹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구, 두 시간도 걸려요. 어떨땐 대낮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약속 장소로 갈 때까지 길거리에서 먹은 적도 있었어요." - P155

참을성을 다해 굶다가, 무서운 식욕이 덮쳐오면 먹구 토했죠. 위액이 나올 때까지 완전하게 토하니까 살이 빠졌어요. - P159

기대할 필요 없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 P160

"시작이란 말이 난 무서웠어. 차라리 끝이란 말이 더 가깝고 편했어요, 나한텐." - P162

"너한테는 타인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 없이 내가 살 수 있어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 P164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봐. 네가 태어나면서 이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잖니. 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거지."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죽어두,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갈거잖아요."
"그러니까, 너 없이 돌아갈 그 세상이라는 게 너한테 무슨 의미라는 거지?"
"내 참!" - P164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기름지고 단 음식에 대한 갈망과 거부감, 죄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폭식 충동이 몰아닥칠 때면 오히려 그런 음식들만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하루는 그런 음식들을 마음껏, 즐겁게, 천천히 먹어준다면 폭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 그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ㅡ그때쯤 그녀의 증세는 그만큼 이성적이었다ㅡ. - P165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 P168

"아침 식전에 유산소 운동을 해야 지방이 분해된대요." - P169

"배가 고프다는 게 이렇게 기분좋은 건지 몰랐어요." - P169

대략 석 달쯤이, 기형적인 대사 작용이 정상화되는 데 필요한 시간인 모양이었다. - P169

미치는 게 얼마나 간단한 건지 사람들은 몰라. - P177

"내가 진짜 참을 수 없는 건, 그 새끼가 아니야. 지금까지두 그새낄 못 잊고 있는 엄마도 아니야. 내가 정말로 증오하는 건, 내 병신 같은 모습...... 그렇게 병신같이 당하구 있었던, 나중엔 반항도 안 하구, 다 포기하구, 어디 신고할 생각도 못 하구, 비겁하게 가출도 못 하구...... 그래요, 내가 진짜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몇백 번을 당해도 쌌던...... 나." - P177

넌 단지 어렸을 뿐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을 뿐이다. - P177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187

"글쎄...... 성스러운 건 재미없는 건가?" - P190

석고 FRP는 잘 깨진다. - P192

"인간의 몸에서 가장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기관이 바로 손 아닐까? 우리가 먹고 만지고 뭔가 만들어내고 섹스하는 모든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기관이잖아. 즉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상징일 수 있는 거지." - P194

클라이언트들의 심리가 가격이 높을수록 신뢰감을 가지게 마련이니까요. - P196

너무 맑은 물에도 고기가 안 논다는 거 몰라? 외로움을 자초하지 말라구. 흐느적흐느적 살기에도 끔찍이 외로운 세상이야. - P197

"그리고 어차피 ......"
그녀는 미소를 보였다.
"모든 건 사라지잖아요? 우리도 그렇고, 우리가 만든 작품도 그렇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P209

"단지 저는."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단지 위안으로서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P209

뭔가 있다.
분명히 있다.
그녀의 태연한 얼굴을 벗기고, 그 안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거울 같은 두 눈동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꿰뚫어보고 싶었다. - P212

"상상력을 동원하는 거예요. 모든 일상사를 상상하면서.... 가장 말끔하게 행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거죠. 사람들은 우아해지고 싶어하니까...... 똑같이 물건을 꺼내더라도 엉덩이를 쳐들고 땀을 흘리면서 꺼내는 게 아니라, 주르륵 레일을 타고 나온 것을 가볍게 들어올리고 싶어하니까." - P217

"나도 카모마일을 좋아해요. 잠이 안 올 때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 P218

누군가에게 ‘뭔가 있다‘고 느낄 때면, 그 숨겨진 비밀이 손에 잡히지 않을수록 더더욱, 나는 그 사람을 향한 호감과 일종의 몰입을 경험하곤 했다. - P228

한때, 저것들이 내 삶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그 작업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L이 떠났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한 시절이 지나간 것이다. 거기 불어넣을 수 있을 만큼의 내 에너지와 시간이 모두 소진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지긋지긋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 P231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 P233

"정 미안하면... 대신 당신이 모델이 되어주면 어떻습니까?" - P233

그거였군.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게 그거였어. - P233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평소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 P236

빛이 들어오는 창 아래의 작업대 앞에서 P는 톱질에 열중해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더러운 면장갑을 낀 그의 팔뚝에는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왔으며, 두 눈은 진지하게 번쩍였다. 저것이 저 사람이 혼자 있을 때의 표정인 것이다. 농담과 사교적인 웃음, 정치적인 언사와 비꼬기, 자기 연민의 과장된 포즈따위가 모두 생략된, 지극히 단순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 P236

나는 그 의자에 앉아, P가 방금 꺼내 썼던 얼굴을 벗는 것을.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그 벗어놓았던 얼굴을 잠시 후 다시 걸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 P236

넌 그게 문제야. 도대체 폐 끼치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거..… - P237

"커피뿐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곤 하지. 어차피 요리도 상상력이니까. 안 그래?" - P237

장소를 바꾸면 사람은 좀 달라진다. 특히 자신이 먹고 잠자는 집이나, 반대로 완벽하게 낯선 장소에서는 평소와 다른 모습,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 P238

못을 빼도 못 자국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야, 다 극복했다 해도 그 자린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지. - P240

"......여기가 내 천국이야." - P246

가만히 앉아서 지루하게 들여다보는 것보다. 이렇게 걸어가다가 마주치는 게 더 인상적인 법이니까. - P248

"이 집에 살 사람들이, 내가 상상한 대로 살아주진 않을 거예요. 사람에 따라선 취향대로 개조해버리기도 하니까. 난 그래서, 내가 설계한 집엔 다시 안 가요. 갈 일도 없지만, 어차피 그 사람들 거잖아. 처음부터 내게 아니지. 내가 주인이 돼보는 건 오늘 하룻밤뿐이야.." - P251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보는 것들을 얘기하지 않는 버릇이 있죠. - P253

"당신에게 뭔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P254

"처음엔 차가울 거고, 다음엔 발열감이 있을 겁니다. 마치 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조이는 느낌이 뒤따를 겁니다."
개어놓은 석고액을 이마부터 바르기 시작하며 나는 설명했다. - P255

"석고가 굳을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 겁니다. 석고를 떼어낼 때도 아플 테고..... 하지만 맨얼굴이 아니니까, 조금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55

그 내부를 나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 P259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L이었다. - P261

"화날 겨를이 어디 있었나." - P262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그러나 그것들을 이겨낼 만큼의 결백한 용기 - P264

"난・・・・・・ 남의 눈에 비친 나 말구는 내가 없는 것처럼 살았어요.
만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그렇게 학대했다면 진작 감옥 갔을 거야. 그렇게 굶기구. 한꺼번에 먹이구, 손을 집어넣어서 토하게하구...... 감옥에 갇힌 죄인이래두 그렇게 다룰 순 없는 거잖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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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년 초 무렵에 유현준 작가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좀 흐른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책은 저자가 그나마 가장 최근에 새롭게 내놓은 것이다. 물론 출간 날짜 상으로는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예전부터 저자의 생각이 또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마음때문에 읽고 싶은 책에 담아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드디어 처음 시작해볼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대략적인 목차들을 살펴본 바로는 예전에 내가 읽었던 내용들이 다소 중복되는 것도 꽤나 있어 보이지만, 마지막 챕터인 17장에 나오는 스마트 시티 같은 것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저자가 추가한 내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더라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들을 다시금 회상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본다.

건축은 관계를 디자인한다 - P5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은 DNA라는 설계도로 만들어진다. 그 다양한 DNA는 모두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이라는 네 가지 종류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A, T, G, C 네 가지 염기의 조합 순서와 패턴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동안 엄청나게 다양한 건축물이 있어 왔지만, 이들은 모두 벽, 창, 문, 바닥, 지붕,
계단 같은 몇 개 안 되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요소들의 크기와 재료와 조합의 패턴이 다를 뿐 기본 구성 요소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렇게 요소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P6

벽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창문은 사람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며, 문이나 계단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만든다. 또한 기울어진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고, 평평한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고, 지붕은 지붕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 건축은 이렇게 ‘관계의 망‘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더 확장되어 건물 내부 사람과 건물 외부 사람들의 관계도 포함하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규정한다. 스케일이 더 커지면 도시 속사람들의 관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결정한다. 건축은 그렇게 사회를 구성해 왔다. 이 책은 건축 공간이 만드는 관계가 어떻게 사회를 진화시켜 왔는지 보여 줄 것이다. - P6

한자로 인간은 ‘人(사람인)‘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공간은 ‘空(빌 공)‘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 P6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 그렇게 인류는 공간과 함께 ‘공진화共進化‘해 왔다. - P7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 P7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로퀜스‘라고 부른다. ...(중략)... 직립 보행하는 인류를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른다. ...(중략)...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라고 부른다. ...(중략)... 놀이와 유희를 즐기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부른다. ...(중략)... ‘공간‘을 잘 이용해서 발전하고 진화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스파티움Homo spátium‘이다. ‘스파티움‘은 공간을 뜻하는 라틴어다. ‘호모 스파티움‘을 번역한 ‘공간 인간‘이 이 책의 제목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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