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비참함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호함과 강요된 시늉" 때문에,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참하다. - P224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유형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게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 P224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쌓게 하고 다시 원래 장소로 옮기게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인간은 그 무의미함과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 P225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 P225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 P225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 P225
‘인간의 바둑‘은 바둑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그저 좋아서 바둑을 두는 아마추어의 활동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아마추어 수준에서 바둑을 즐기는 데 인공지능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는 전망은 비교적 쉽게 납득할 수 있다. - P229
"누구나 어떤 일에서 당대 최고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항상 최첨단에서 무언가를 할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기계가 더 잘한다고 해서 왜 인간이 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_남치형 교수 - P231
"어떤 일을 남한테 권할 때는 권하는 이유를 말해줘야 하죠. 그런 때 그 일을 하면 돈을 번다든가, 건강이 좋아진다든가. 그런데 그런 말들은 진짜 이유가 못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을 하면 어떤 유용성이 있다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정말 재미있어, 내 시간을 거기에 낭비할 만해‘ 이런 말들이야말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해요." _남치형 교수 - P231
재미있다는 것은 당사자의 주관적 효용이고, 그 효용에 대해 타인이 깎아내리기 어렵다 ...(중략)... 그러나 그 주관적 효용이 외부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 P232
재미는 맥락에 좌우된다. ...(중략)... 어떤 일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바뀌며, 그 일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도 바뀔 것 같다. 재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 P233
재미는 바둑이나 소설 쓰기, 혹은 다른 활동이 제공하는 여러 가치 중 하나로서 다른 가치들과 경합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한다. - P233
재미있지만 의미는 없는 일도 있고, 의미 있지만 재미없는일도 많다. 많은 일에서 재미와 의미가 섞여 있는데, 어떤 일은 재미있기 때문에 더 의미 있고 어떤 일은 의미가 있어서 더 재미있다. - P233
어떤 일의 의미가 훼손되면 재미도 변할 수 있다. - P233
한 분야에서 초보자 때는 재미있었던 일이 기량이 성장하면 시시하게 느껴지고, 반대로 초보자 때는 존재조차 몰랐던 재미를 숙련자가 되어서 느끼는 일도 흔하다. - P233
사람들이 어떤 일에 능숙해지면서 다른 차원의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일방향이다. 실력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는 것이지, 예전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 일부러 자기 실력을 퇴보시키는 사람은 없고 설사 그런 시도를 한들 예전의 재미를 느낄 수도 없다. 그런 재미에는 처음 발견하는 감각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감,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 P234
미래에 대한 보잘것없는 희망이라도 현재에 큰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그 희망에 영향을 미친다. - P234
인간에게는 우월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는 대부분 같은 인간을 상대로만 발휘된다. - P235
인간은 다른 인간 앞에서 각성하고 흥분한다. - P236
우리의 굴욕감, 질투심, 승부욕 같은 감정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 사람이 적이든 친구든 관객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 격렬한 감정은 2차적인 감정 반응도 이끌어 낸다. 타인의 격렬한 감정 앞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흥분하게 된다.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게임이나 스포츠를 더 재미있게 한다. 어쩌면 예술도. 그러니 바둑도 소설도 인공지능은 일으킬 수 없는 그런 감정적 반응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아닐까? - P236
"승부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승부하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보여준다고 할 때 보여줄 수 있는 바둑의 외연도 더 넓어진다" ...(중략)... "바둑판 위의 승부뿐 아니라 그 안팎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의 구축은 절대필요조건" _바둑 칼럼니스트 손종수 시인 - P236
"프로기사들이 너무 인간적인 실수를 하고, 그걸 극복하고, 그렇게 역전이 거듭되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는거죠." _홍민표 9단 - P237
두 번째로 접어야 하는 기대는 ‘기술 진보가 우리 삶을 안락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다. 바둑 AI 프로그램이 바둑의 수준을 높이고, 프로기사들의 실력을 상향평준화시키긴 했다. 그런데 그건 전체 프로기사의 삶의 질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다. AI 포석과 AI 공부법에 잘 적응한 기사들이 유리해졌지만, 그런 기술 우위는 곧 사라진다. 인간 기사들의 노동 강도는 다른 인간 기사들과의 경쟁에 달려 있다. 바둑이 만드는 가치의 근원이 그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어떤 신기술이 인간 기사들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낫게 만들 거라는 희망은 품지 말아야 한다. - P240
어떤 일의 가치가 우월성을 놓고 겨루는 인간 사이의 경쟁에서 나온다면, 어떤 기술이 등장해도 경쟁의 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손에 든 무기가 돌도끼든 최신 저격소총이든 간에 상대와 내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다면, 이기기 위해선 자신을 극한의 스트레스 상태에 밀어 넣어야 한다. 상대방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신기술을 사용하는 쪽이 잠시 느긋해질 수 있겠지만, 유용한 신기술은 곧 전파되어 흔한 기술이 된다. 그런 분야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기술 개발이라는 이름의 항시적인 군비 경쟁을 벌여야 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의 처지처럼,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기술을 개발하고 거기에 적응하려 애쓰지만 그들 사이의 상대적인 거리는 변함이 없다. 이 상황에서 기술이 어떤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는가? - P240
내게는 그것(자기계발)이 수입이 없는 노동처럼 느껴진다. - P242
인공지능이 우리를 귀찮은 잡무에서 해방시켜 주고 덕분에 우리가 여가시간을 고상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은 설득력이 없다. 지난 95년 동안 등장한 수많은 신기술은 우리 사회에 그런 식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방향을 의도하고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 P242
‘인간의 바둑‘은 인간 기사들이 만들어 내는 서사에 바둑계가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인공지능은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서사는 인물의 감정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주인공은 역경을 겪으며, 그 역경을 겪는 동안 두려움, 불안, 좌절감 같은 감정들을 느낀다. 우리는 그런 감정에 빨려 들어가서, 주인공을 우리와 동일시하며 그를 응원한다. - P243
"주인공이 내면의 힘을 짜내어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적수를 KO시킬 수 있는 충격을 줄 수 있다." _서사 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작가 제임스 스콧 벨 - P244
거의 결말에 이르러 독자들이 "주인공이 싸울까 아니면 도망칠까? 적수가 주인공이 대적하기엔 너무 강한 것이 아닐까?"라고 묻게 만들어야 한다 _제임스 스콧 벨 - P244
낸시 크레스는 소설에서 "어떤 인물이 진짜 감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진짜 감정을 숨기거나, 또 진짜 감정때문에 상처받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은 ‘좌절감‘이다‘ - P244
스포츠는 아주 훌륭한 서사의 재료이며, 사실 이것이 오늘날 프로스포츠 산업의 핵심이다. 오늘날 많은 스포츠 팬은 그 스포츠 활동 자체를 직접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선수들이 그 스포츠를 통해 만들어 내는 서사를 즐기는 사람이다. - P245
‘인간의 바둑‘은 내가 닮고 싶고 응원하거나 숭배하고 싶은 존재인 다른 인간이 둔다는 점을 강조하는 바둑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바둑 산업이 팬덤 비즈니스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다. - P254
최근 20년간 우리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우상(idol)으로 섬기고, 그의 팬을 자처하는 명분에는 사실상 제한이 없음을 알게 됐다. 인플루언서는 온갖 이유로 인플루언서가 된다. 얼굴이 잘생겨서, 노래를 잘 불러서, 운동을 잘해서, 연기를 잘해서, 그림을 잘 그려서, 글을 잘 써서, 말을 잘해서, 옷을 잘 입어서, 놀라운 주장을 해서, 인플루언서의 가족이라서, 돈이 많아서, 너무 많이 먹어서, 범죄 피해자라서, 아는 게 많아서, 아는 게 없어서, 행실이 훌륭해서, 행실이 막돼먹어서... - P255
유명인이 되면 추종자에게 영향력(influence)을 행사할 수 있고, 여기서 수익이 발생한다. 광고를 할 수도 있고,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 수도 있고, 유명 브랜드와 협업을 해서 자기 이름을 딴 제품을 만들 수도 있고,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고, 유튜브나 다른 플랫폼에서 돈을 받을 수도 있고, 오프라인 만남 티켓을 팔 수도 있고, 오프라인 만남 티켓을 경품으로 내걸어 물건을 팔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스포츠 스타에게 가장 큰 수입은 대회 상금이나 연봉이 아니라 광고 혹은 스폰서십 계약에서 온다. - P255
광적인 팬(fanatic)들은 탁월함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이돌이 형편없는 신곡을 발표하면 팬들은 ‘우리 아티스트에게 형편없는 곡을 줬다‘라며 소속사를 비난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앨범을 구매해서 아티스트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나선다. 일단 어떤 계기로든 유명해져서 팬덤을 얻고 나면 그다음에는 자신이 탁월하게 해내지 못하는 일로도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팬들은 아이돌의 스토리를 좋아하지만, 팬덤 스스로가 굉장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지니고 있다. 팬덤을 만드는 게 어렵지, 일단 팬덤을 확보하면 그들과 함께 스토리를 생산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지 않다. 팬덤은 사진 몇 장으로도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내니까. 그들이 꼭 우호적인 스토리만 만드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언론과 파파라치도 그 스토리 작가 군단의 일원이다. - P255
‘팬이 중요하다, 팬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 P256
‘팬들이 가장 중요하다, 팬들이 없으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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