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들은 어디로부터도 들어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 P28
"나는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난 상태 속에 있었어. 다만 이번엔 아버지의 잠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이었지." - P38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아버지와 난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어. 그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아버지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끝없는 잠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어. 마치 혈통을 잇는 특별한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이야." - P38
"나는 자고 자고 자고...... 시간이 썩어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잤어. 얼마든지 끝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란 거야. 그때의 나에겐 잠의 세계가 진짜 세계고, 현실 세계는 덧없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건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지.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아버지가 느끼셨을 심정을, 그때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거지." - P39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 P39
무엇을 보든 이제 넌 아무 소용이 없어. 너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란 존재는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 거야. 그러자 짐승의 눈마저 허공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밤의 어둠만이 소리 없이 방 안에 가득 찼다. - P52
"내가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때리는 거나 맞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건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으면,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권투는ㅡ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ㅡ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오르면 때때로 나 자신이 깊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끔찍하게도 깊은 구덩이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볼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고독합니다. 하지만 슬프진 않습니다." - P61
"한마디로 고독이라고 말했지만 고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듯 쓰리고 아픈 고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고독도 있습니다. 그런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깎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그만큼 돌아옵니다. 그것이 내가 권투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 P61
"잊어버리고 싶은 건 절대로 잊히지 않죠." - P61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일생에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지는 일 말이에요. 나는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런 상대가 있더군요.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경우, 상대방도 이쪽과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거죠." - P62
어떤 부류의 인간은 성장도 후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할 뿐이지요. - P72
처음에 때릴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꼴 한번 좋구나 하면서 엄청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점점 언짢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 P84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말없이 참는 것뿐이었어요. - P85
‘정말 이 정도의 일로 사람은 의기양양해지거나 승리했다고 우쭐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정도의 일로 이 녀석은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 녀석(아오키)은 아마도 진짜 기쁨이나 진짜 자존심 같은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저 조용한 떨림을, 이 녀석은 절대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을 거라고. - P88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음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한테 그 깊음이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깊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오키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공허하고, 변화가 없고 단조롭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목해준다고 한들, 아무리 겉으로 으스댄다고 한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 P88
충분히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겐 아직 자부심이란 게 남아 있었거든요. 아오키 같은 인간에게 이대로 질질 끌려갈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 P89
권투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상대방의 눈의 움직임에 민감해지죠. 아오키의 눈은 다리를 꼼짝할 수 없게 된 권투 선수의 눈 같았습니다.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거죠. 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발은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깨를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펀치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런 눈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왜 그런지 본인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 P89
인생 그 자체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 자신이 경멸하고 모멸하는 상대에게 간단히 짓눌려 찌부러질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지요. - P90
나는 틀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린 거다, 하고 자신을 계속 다독였지요. - P90
기회가 올 때까지 줄곧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낚아채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교묘하게 잡아쥐고 선동하는 능력ㅡ그런 건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런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능력이란 건 인정합니다. - P93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 P94
"침묵이 차가운 물처럼 모든 것에 조금씩 스며들어갑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거고 저거고 모든 것이 질척하게 녹아버리고 말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속으로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 P94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걸 내가 어떻게 읽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하고 얼음사나이는 말했다. 마치 투명한 얼음 속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렇게 가만히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에 관한 것이 환히 보인답니다. - P103
나는 미래라는 것에 전혀 흥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게는 미래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얼음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음 속에는 과거만이 단단하게 봉해져 있을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거기에 꽁꽁 가둬져 있는 겁니다. 얼음이란 건 많은 것들을 그런식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아주 깨끗이, 아주 선명하게 있는 그대로 말이죠. 그것이 얼음의 소임이고 본질입니다. - P104
나는 과거란 것을 갖고 있지 않아. 세상의 모든 과거를 알고는 있어. 그리고 모든 과거를 봉인하고 있지. 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겐 과거라는 것이 없어. - P105
얼음사나이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이 순간의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의 얼음사나이를 사랑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 P105
결혼이란 건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는 거야. - P106
얼음사나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얼음사나이는 단지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혹시 주위가 따뜻해지더라도 그 때문에 녹아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차가움은 확실히 얼음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얼음과는 다르다. 분명히 엄청 차갑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체온을 빼앗아갈 정도로 차갑지는 않다. - P106
나 자신이 시시각각 과거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다. 그저 과거를 쌓아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들은 과거를 보고 있다. 나는 뒤쪽으로 스쳐 사라져가는 광경인 것이다. - P114
꿈은 과거에서 오는 거야. 미래에서 오는게 아니지. 꿈은 당신을 속박하거나 하지 않아. 당신이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지. 알겠어? - P114
나는 이제부터 여행을 떠난다는 흥분이나 기쁨 같은건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하기로 한 일을 어김없이 진행할 뿐이었다. - P115
남극에 있는 이 나의 남편은 예전의 나의 남편은 아닌 것이다. - P118
얼음사나이는, 스키장의 호텔에서 만났던 그 얼음사나이와는 다른 얼음사나이라는 것을. - P118
영원한 과거가, 그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가, 우리의 발목을 꽉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덫을 뿌리칠 수 없게 된 것이다. - P119
어디서인지 불어닥친 바람이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말을 과거로 과거로 계속 날려버린다. - P120
대단한 능력도 때로는 예기치 않게 뒤틀릴 수 있다. - P126
어차피 사람이란 언젠가는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 P128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어찌 됐든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이상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128
외롭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금은 이상한 상황이었다. 고독하지 않게 됨으로써 다시 또 고독해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42
그저, 그저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다. - P147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가 없다. 몸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P148
말하자면 나는 주변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시기가 내겐 필요하다. - P151
그 옷들은 그에게 아내가 남기고 간 그림자처럼 보였다. 7사이즈의 아내 그림자들이 켜켜이 몇 줄로 열을 지어 옷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무한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샘플들을 몇 개 모아 매달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 P155
그 그림자들은 예전에는 아내의 몸에 찰싹 붙어서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상실한 채 시시각각으로 말라비틀어져가는, 볼품없는 그림자 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그저 낡고 바랜 옷일 뿐이었다. - P155
고독이 미적지근한 어둠의 진액처럼 다시 그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미 모두 끝난 일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한다해도 모든 것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 P156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모습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의,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손에 만져지듯 느껴지는 것이라곤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상실감뿐이었다. - P159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거기에, 꼭 걸맞은 무게를 지닌 채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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