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서 갑자기 소설 속에 등장한 ‘그 소년‘과 ‘나‘ 사이에 기묘한 일들이 발생한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밑줄 그은 내용들을 참조하시면 될 듯 하다

책에 이 ‘소년‘과 관련하여 도서관 직원인 소에다 씨를 통해 설명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독자인 나의 어떤 직관적인(?) 느낌으로 봤을 때 갑자기 어느순간 소설 속에 등장한 이 ‘소년‘은 과거에 ‘그 도시에 있던 나‘ 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러 정황상 이러한 내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들을 독자인 내가 예상하면서 읽는 것이 때로는 머리를 피곤하게 하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저자가 독자들에게 원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로 해석의 여지를 줌으로써 비록 똑같은 글일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정답없는 방식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다지 나쁜것 같지는 않다. 소위 말하는 ‘열린 해석‘이 가능하기에 내게는 이 소설이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씨앗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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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논한 얘기와는 별개로 전체 줄거리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p.508에 폴 데즈먼드 라는 연주가에 대한 간략한 얘기들이 나온다. 독자인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 들어봤는데, 재즈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겐 이미 익숙한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뭐 하여튼 간에 중간중간 나오는 이러한 관련 정보들을 통해 내가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넓히고 더해갈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의 소소한 유익함이라면 유익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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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3에 밑줄 친 부분 중에 독서와 관련하여 비유적인 표현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꽃은 책을 상징하는 듯 하고, 나비는 책을 읽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유가 너무나도 멋지다고 생각되어 밑줄을 안 치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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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읽다 보면 p.529에 밑줄 친 부분 중에 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소리에 ‘나‘가 반응하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얼핏보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말했다고 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말했다는게 무슨 ‘성대모사‘를 한 것 같지는 않고, ‘나‘가 아닌 어떤 다른 영혼이 말을 했다는 거라고 생각하는게 맞는건지.. 도대체 뭐가 뭔지 단지 추측해볼 따름이다. 아예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제 3의 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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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부분 막판에 ‘나‘와 얘기를 나누던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그 도시‘를 경험해 봤던 ‘나‘는 소년에게 ‘나‘가 경험했던 ‘그 도시‘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얘기해주고 소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도시‘가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지만, 소년의 의지는 확고하다. 뒷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슬슬 궁금해진다.

그렇게 맥락 없고 단편적인 정보를 직소퍼즐처럼 끼워맞춰 지도의 형태로 완성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시각적인 사진기억력뿐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서번트 증후군에는 아무리 길고 복잡한 곡이라도 한 번 들으면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재현할 수 있는ㅡ연주하거나 사보할 수 있는ㅡ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 P494

그렇지만 내 기억이 나중에 변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앞뒤 순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소년이 그린 지도에 맞추어 내 기억이 미묘하게 바뀌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 - P494

내 주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막연한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떤 힘에 의해 어딘가로 조금씩 이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최근에 시작된 일인지, 아니면 제법 예전부터 서서히 이어져온 일인지는 알 수 없다. - P495

내가 가까스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아마도
‘저쪽‘과 ‘이쪽‘ 세계의 경계선 근처이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반지하 방과 마찬가지다.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니다. 흘러드는 빛은 엷고 흐릿하다. 나는 그렇듯 어슴푸레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장소에,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어느 쪽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 P495

그 지도가 내 마음을 미세하게 떨게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그것은 내 마음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덜덜 떨도록 만들었다. 지진이 멈추지 않는 땅 위의 젤리 상태 물체처럼. - P496

그 지도를 바라보는 사이, 내 마음은 알게 모르게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다. 눈을 감으면 나는 실제로 그곳을 흐르는강물의 소리를 듣고, 밤꾀꼬리의 애달픈 우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지기가 뿔피리를 불고, 단각수들의 발굽이 달각달각 돌길을 밟는 메마른 소리가 거리를 감쌌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소녀의 노란색 레인코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세계의 귀퉁이를 맞비비는 듯한 소리다. 현실이 내 주위에서 살짝 삐걱이며 미세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ㅡ만약 그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말이지만. - P496

"사나홀, 그냥 조용히 누워 있는다."
"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 P498

실제로 충전과 비슷한 원리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능력(거의 인지를 초월한 능력이다)을 너무 활발히 가동한 나머지 신체 시스템의 용량을 넘어버린 건지도. 전력 과부하를 감지한 배전반 브레이커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것처림. 그러면 한동안 누워서 오버워크 상태의 열원을 식히고, 신체 기능의 자연 회복을 꾀할 필요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어쩌면(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 도시의 지도를 작성한 것이ㅡ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그 작업이ㅡ이번 시스템 다운의 원인 중 하나인지 모른다. - P498

나는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오전의 햇살이 흘러드는 밝은 도서관 카운터에서) 소에다 씨에게 서슴없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게 과연 타당한 행동인지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큰맘먹고 물어보기로 했다. 최대한 간결한 표현을 사용해서.
"저기, 소에다 씨는 그 두 사람이 고야스 씨가 돌아가신 후에도 만난 것 같습니까?" - P500

지도는 저쪽 세계에서 내가 보았던 정경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그 지도는 특수한 환각 장치처럼 내 기억을 활성화하며 세부를 정밀하고 입체적으로 발굴해갔다. 들이마신 공기의 질감, 희미하게 감돌던 냄새까지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 P502

아주 심플하게 그린 지도였지만 아무래도 거기에는 무언가특수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흘 내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도를 앞에 두고 이곳이 아닌 세계를 떠돌았다.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점점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깊이 그 환각 장치(같은 것)에 빠져 있었다. 순수한 환상을 얻기 위해 아편을 상용하는 18세기의 탐미주의 시인처럼. 내 손에 들런건 얇은 A4용지 한 장에 볼펜 같은 것으로 그린 간단한 지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 P502

의문은 많고 확실한 대답은 보이지 않는다. 의미를 모를 일 투성이다. 눈앞에 수없이 늘어선 수수께끼의 문, 그러나 열 수 있는 열쇠는 수중에 없다.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혹은 어렴풋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지도에 예사롭지 않은 특수한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는 점 정도다. 단지 내가 과거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수수께끼 같은 장소의 지도에 그치지 않고 다가올 세계의 지세를 보여주는 도면으로 기능하는 것 같기도 했다―지도를 보면 볼수록 나는 그 안에 개인적으로 의탁된 무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P503

어느 것이나 비교적 소소한 차이점이고 도시를 구성하는 큰 얼개에 연관된 것도 아니니 굳이 고칠 필요는 없을 테지만(게다가 내 기억이라는 것도 어디까지 맞을까?), 소년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잡아내어 정확하게 세부를 표현하는 걸 무엇보다 중시할 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또한 ‘어떠한 표현 행위에도 비평이 필요하다‘는 일반 원칙도 있다. 그에 더해 내게는 어떤 형태로든 소년과 접촉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쪽으로 서브된 공은 받아 쳐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다. - P503

"그런데 그애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던가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서간집이에요." 소에다 씨는 곧바로 대답했다.
"재밌을 것 같네요."
소에다 씨는 그 말에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눈썹을 살짝찡그렸을 뿐이다. 그녀는 말보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 P505

기묘한 표현인지 몰라도, 고야스 씨는 생각해보면 내 주위에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 내게 생생한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이 마을뿐 아니라 지금껏 내가 지내온 모든 장소를 통틀어. - P507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인생을ㅡ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ㅡ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
상당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 P507

늘 그렇듯 오래된 재즈가 작게 흘러나왔다. 폴 데즈먼드가 알토색소폰을 연주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곡에서도 데즈먼드가 솔로를 연주했다.
"유 고 투 마이 헤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508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도시에서는 음악을전혀 듣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허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음악을 듣고 싶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음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다. 어째서일까? - P509

요즘은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구글에서 검색하면 누구나 십초도 안 되어 간단히 알 수 있다. 소년은 그것을 단 일 초만에 알아맞힐 수 있다지만, 서부극의 결투도 아닌데 십 초와 일 초 사이에 얼마나 실리적인 차이가 있을까? 나는 소년을 위해, 그 사실을 조금 쓸쓸하게 여겼다. 이 세상은 날로 편리한, 그리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간다. - P512

"좀 신경쓰이는데,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수심이가득하다는 얘기, 설마 정말로 그런 건 아니겠죠?"
"괜찮아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나는 말했다. 확실히 보장할 순 없지만, 아마도. - P513

입은 옷이 달라져도 행동 패턴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항상 앉는 열람실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건 활짝 핀 꽃에서 한 방들도 남김없이 꿀을 빨아들이려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꽃에게나 나비에게나, 서로 유익한 행위다. 나비는 영양을 얻고 꽃은 교배에 도움을 받는다. 공존공영,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훌륭한 점 중 하나다. - P513

그렇다. 소년이 그린 도시 지도에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자극하는ㅡ혹은 혼란스럽게 하는ㅡ특수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A4용지에 검은색 볼펜으로 그린 단순한 지도만은 아니었다. 보는 이의 마음속(평소에는 안쪽에 잘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기동력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은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이쪽 세계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ㅡ아마 ‘현실 세계‘라고 불러야 할 곳에. 그럼에도 내 시선은 알게 모르게, 새어드는 바람에 한데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책상 위에 놓인 그 커다란 서류봉투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 P514

이따금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머리를 식혔다. 바다거북이나 고래가 호흡을 위해 주기적으로 수면에 얼굴을 내밀듯이. 그러나 이렇게 추운 겨울날ㅡ 게다가 방안도 전혀 따뜻하지 않은데ㅡ왜 바깥공기까지 맞으며 머리를 식혀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겐 꼭 필요한 행위였다. 내가 지금 ‘이쪽 세계‘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 P515

손을 뻗어 머핀을 집어들더니 그대로 크게 베어물었다. 포크도 쓰지 않았다.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접시를 받치지도 않았다. 당연히 가루가 부슬부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소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청소하면 그만이다. - P521

입가에 푸른 얼룩이 묻었지만 그것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렴 페인트가 묻은 것도 아니다. 그저 블루베리 과즙이다. 나중에 티슈로 닦으면 그만이다. - P521

어쨌거나 나는 전부 그대로 두었다. 이 소년 앞에서는 뭐든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블루베리 머핀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손으로 들고 먹어준 것만으로도, 나와 그의 관계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P522

"머핀이 꽤 맛있지?" 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입술에 묻은 블루베리를 혀로능숙하게 핥았을 뿐이다. 고양이들이 식후에 흔히 그러듯이. - P522

소년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몫의 빈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홀로 데크에 서서 해가 떨어진 뒤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고독한 선객처럼. - P523

지금 책상 위에 놓인 건 지도가 든 봉투뿐이었다. 마침 고야스 씨가 항상 남색 베레모를 내려놓던 자리다. - P523

"네가 그린 지도를 봤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 "무척 정확하더구나. 거의 실물 그대로야. 감탄했어..... 아니, 솔직히 놀랐어. 내가 거의라고 한전, 정확한 진짜 형태는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건 물론 네 탓이 아니지." - P524

"나는 말했다. "한때 그 도시에 살았어. 이 지도에 그려진 도시 말이야. 그곳에서도 역시 도서관에서 일했어. 하지만 그도서관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지. 단 한 권도. 과거에 도서관이었던 곳・・・・・・ 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내게 주어진 일은, 책 대신 서고에 쌓인 ‘오래된 꿈‘을 매일 밤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이었어. ‘오래된 꿈‘은 큰 달걀 같은 모양이야. 그리고 하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지. 크기는 대략 이 정도."
나는 양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보였다. 소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정보로서 수집했을 뿐이다. - P524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살았는지는 나도 몰라. 계절이 바뀌긴 했지만 그곳에서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별개로 흘렀던 기분이 들어. 어쨌거나 그곳에서 시간은 전혀 의미가 없어. 아무튼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매일 그 도서관을 오가며 ‘오래된 꿈‘을 읽었어. 얼마나 많은 ‘오래된 꿈‘을 읽었는지 정확한 수를 기억하진 못해. 하지만 숫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왜냐하면 오래된 꿈은 거의 무한히 있는 것 같았거든. 내가 일하는 시간은 해가 진 뒤였어. 해질녘에 시작해서 대개 자정이 못 되어 작업을 마쳤지. 정확한 시간은 몰라. 그 도시에는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P525

소년은 반사적으로 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각이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에게 시간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모양이었다. - P525

"‘꿈 읽는 이‘가 되려면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했고, 도시에 들어갈 때 문지기가 그 처치를 해주었지." - P525

역병을 막기 위해 - P526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입을 다문 채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건 지금 여기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테다. - P526

"하지만 역병은 언젠가 끝났을 텐데."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어떤 역병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아. 그런데도 벽은 변할없이 엄중하게 폐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아무도 안에 들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아. 그 이유는 뭘까?" - P527

"끝나지 않는 역병."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게 대체 뭐길래?"
역시 대답은 없다. 나는 스스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수수께끼 문답을 하는 기분이다. 심지어 매우 어려운 수수께끼다. 문제의 심오함에 비해 힌트가 턱없이 부족하다. 어쨌거나 서브된 공은 상대편 코트로 쳐내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만약 이걸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 P528

"혹시, 영혼이 앓는 역병 같은 것일까?"
소년이 다시 끄덕였다. 꾸벅, 하고 확실하게. - P528

소년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스도 노도 아니다. - P529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큰 소리는 아니다. 메마르고 간결한 소리ㅡ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소리. 두 번, 조금 뜸을 들이고 다시 두 번.
"네."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 P529

그 도시에 가야 해요 - P530

"너는 그 도시에 가기를 원하는구나." 나는 확인하듯 말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사람들에게 그림자가 없고, 도서관에는 한 권의 책도 없는 그 도시에."
소년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처럼. - P531

"만약 그쪽에 가면 이쪽에는 있을 수 없게 되어도?"
소년이 다시 한번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소년이 문을 통과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곳은 아마 소년에게 ‘페퍼랜드‘일 것이다. 영화 <옐로 서브마린>에 나오는 컬러풀한 이상향, 페퍼랜드. 이 열여섯 살 소년은 자신을 받아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보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세계로 이행하기를 원한다ㅡ마음속 깊은 곳에서, 더없이 진지하게. 소년과 마주앉아 있자니 얼마나 진지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 P531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저는 그럴 수 있어요."
소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너는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소년의 말을 자동적으로 되풀이했다.
"그곳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언제까지나." - P532

그렇다. 이 소년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도서관에서 매일 행하는 일과와 거의 똑같은 생활이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그 도서관 안쪽에는 그가 읽어야 할 ‘오래된 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높게 쌓여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마도 무한히. 또한 그 제각각의 모든 꿈은 세계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도시에 가야 해요." 소년은 아까보다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 P532

그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페퍼랜드가아니다. 페퍼랜드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생활을 한다. 즐거운 음악이 흐르고 컬러한 꽃이 만발했다. 1960년대 드러그 컬처의 냄새가 어렴풋이 감도는 한때의 몽상 속 세계다. 그러나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그렇지 않다. - P533

그곳에서는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짐승들이연이어 목숨을 잃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난하고 과묵하게살아간다. 간소하고 적은 식사에 만족하며, 의복은 낡고 해질때까지 입는다. 책도 없고 음악도 없다. 운하는 말라붙었고,
많은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사는 공동주택은 어두컴컴하고 다 쓰러져간다. 개도 고양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생물이라면 벽 위를 넘나들 수 있는 새 정도다. 이상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세계다. 소년은 그 도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 P534

나는 그 얘기를 소년에게 자세히 해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아마 그런 사정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감수하더라도 그 도시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면밀히 고심한 끝에 내린, 변경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다. 소년의 망설임 없는 얼굴을 보니 그 결의가 얼마나 굳은지 알 수 있었다. - P534

"그 도시에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해. 그 두 가지가 문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이야. 떨어져 나간 그림자는 머지않아 목숨을 잃을 테고, 그림자가 죽으면 넌 다시는 그 도시에서 나올 수 없어. 그래도 상관없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세계의 누구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소년은 소리 내어 말했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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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샤드 나폴리탄 다크 72 초콜릿 - 132g

평점 :
절판


이번에 먹어본 다크 초콜릿은 지난번에 먹어본 카라멜&씨솔트에 비해 달달함은 확실히 덜하지만 너무 달달한 초콜릿보다는 좀 담백한(?) 맛을 원하시는 분들이 좋아할만한 초콜릿이다. 오히려 건강적인 측면을 생각한다면 이 초콜릿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무난한 초콜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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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2023-12-23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콜릿이지만 너무 달기만 하면 전 별로더라구요 ㅋㅋ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23 09:41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면 아마도 이 초콜릿이 홍합님 취향에 딱 맞으실듯 합니다!
 

암호같이 되어있는 문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협력하는 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가 풀려나가는데, 이런 것들의 특징이 다들 그렇듯 알고나면 별 것도 아닌데, 알기 전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각해보고 추정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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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은하수와 성진, 소희 부부 이렇게 세 사람의 대화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역사 이야기에 대한 어떤 관점의 차이(?)같은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역사학자들을 추가로 더 만나본 은하수는 역사학계의 완고한 태도에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은하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생각에 조금씩 색을 입혀나갔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취합해 하나의 가설을 세운 뒤 논리를 발전시켜 답을 찾아내는 끈기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은하수는 스스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 변화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형연.
그와 만나고서부터 그녀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옳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신령의 키워드는 역사, 역사의 은어인 셈이지."

"하지만 이건 은어야. 대놓고 저주를 내릴 장소가 어디인지 드러난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까 이 은어 안에 실체를 숨긴거지."

"그래. 대단한 게 아니었어. 나이파이한필베마냥 주문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말이지. 우리는 다이이치가 주는 무게감에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서 멀리 돌아왔어."
"회와 신."

알고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한 일에 영 닿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더 말해 볼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회와 선으로 시작하는 지명들을 검색했어. 당장 가까운 회기동 신설동부터 시작해서 회현동, 회현리, 회령군, 신철원, 신포, 신의주 등 회와 신으로 시작하는 남북한의 모든 지명을 다 찾아냈어."

"모든 지명의 짝을 지어 회신이라는 합성어를 계속 만들어 보던 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전에 얘기했었지. 다이이치의 명을 받은 이케다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면 반드시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에다 무슨 짓이든 했을거라고."

수백 개의 빨간색 가위표 사이에 파란 동그라미 두개.
"회양군과 신고산면."
회양은 함경남도 안변과 맞붙은 강원도 최북단의 지역이고 신고산은 고산의 신시가지로 철도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지명이었다.

"그래. 그 두 곳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바로 험한 고개가 하나 나오더라."
"철령."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철령집 만축고선."
"형연아?"
"철령에 매어놓아라 고려와조선이 영원히 줄어들도록."

"철령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나오는 그 철령위? 교과서에서 본 거 같은데."

정해져 있는 코스를 따라가는 일과 아무 단서도 없는 백지에 토대를 쌓아 나가는 일에 소모되는 정신력의 차이는 차원이 달랐다.

"철령은 어디지?"
"함경남도, 강원도 사이 야, 너!"

"네 장점은 논리야. 합리에 어긋나는 건 받아들이지않지. 그런 네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있는지 잘 생각해봐. 왜 평소처럼 그 뛰어난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지?"

"은하수. 이케다와 조선사편수회를기억해. 다이이치가 저주를 내려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생각해."

"그래 철령은 뒤바뀐거야. 두 개의 같은 지명이 있었고 북서쪽의 철령은 동남쪽의 철령으로 둔갑해버렸지. 바로 다이이치와 조선사편수회에 의해서."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繁萬縮高鮮. 고려와 조선의 국경을 철령에 잡아매어 영토를 줄여라, 요통의 철령을 강원도의 철령으로 잡아매어 역사로 가르쳐라!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제강점기였으니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아니 오히려 일본인 학자 밑에서 그들의 연구를 도왔어. 따르지 않으면 파멸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해방 이후 그들이 우리 역사학계의 거목이 된거야."

"그게 80년 넘게 이어져 고려의 국경선이 의주에서부터 원산까지로 그려져 있는 이유야."

어두운 곳에 숨어서 고려의 국경을 잘라내 버리는 자들과 그들의 음모를 그대로 가르치는 처참한 현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보다 수백 배는 갑갑한 현실이 다가와 있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다이이치의 저주를 몰랐다고 해도 철령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잖아."

"누가 80년이나 가르쳐 내려오는 교과서를 의심할수 있겠어. 게다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학자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학계의 거두가 되었으니."

예전같으면 공허한 정의로 치부하고 넘겼을 일들이 이제는 반드시 맞서야만 할 과제로 다가와 있었다.

스스로를 깊숙이 돌아보면 반드시 역사를 마주치게 돼.
그러나 마주칠때마다 보이는건 중국과 일본에 의해 형편없이 구부러지고 축소된 모습이지. 싫을 수밖에 없어 외면하고 싶은게 당연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다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정공법으로 나가려니까 증명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흥미나 끌려는 잡배들이에요."

"출처는 자기들끼리 다 돌려쓰고 유튜브에 얼굴이나 비춰 인기몰이하는 사기꾼들이죠. 인용도 자기들끼리 해요. 누가 그랬다더라, 어디서 봤다더라, 다 인터넷에만 떠도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전문가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그럴듯 하게 말한다고 진짜 역사가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덜 여문 사람들 상대하지 않아요. 무시하고 말죠. 그런 거 하나하나 들어주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일제강점기로 인해 우리역사가 많이 왜곡된 건 사실이잖아? 그걸 바로잡겠다는 은하수의 말이 나는 좋게 들리는데?"

몇 명의 역사학자들을 더 만난 은하수는 오히려 성진이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친절하게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던 학자들은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대다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변해 입을 닫아버렸고 어느 노학자는 모욕적이라며 대화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조차 있었다.

그제야 은하수는 학자들을 설득하여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대였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퍼즐의 수많은 조각 중 그들이 허용하고 원하는 조각만 선별해 맞추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지않는 조각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저도 이번에 많이 느꼈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단지 머리에 든 게 많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고 대단한 게 아니더군. 말로 내뱉은 걸 지킬 수 있는 진짜 힘이 있어야 해."

"혹자는 그깟 기록과 역사가 무엇이 중요하냐 하겠지만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역사이기도 해요. 결코 좌시해서는 안될 문제지."

"학계에도 자꾸만 새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무거움 또한 존중해요. 신념을 위해서 때때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학자니까."

돈을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 무엇이 문제가 될까.

"너는 왜 도를 닦느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깨달음이란 아무것도 아니야. 밥만 안먹으면 다다를 수 있어."

"나는 번쩍하는 순간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부처? 그건 같잖은 착각이었어. 나는 부처는커녕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야. 왜 못 따라가는지 아나?"

"부처는 부처의 시대에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야. 만약 부처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도 황야에서 수십일 굶고 부처가 되었을까? 절대 안 돼."

"워낙 난 양반이니 뭐 다른 길을 찾아도 찾았겠지. 지금 세상에 다 비우고 다 버리고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놈아, 밥이나 처먹고 똥이나 싸면서 살아. 그러다가 심심하면 남이나 돕든지."

"부처나 예수나 결국 남을 위해 살라는 거잖아. 뭘 깨치려 들고 그래. 그러니까 설익은 놈들이 헛짓거리나 해대고 그러는 거야. 다 헛것이야. 나쁜 일 안하고 남 돕고 같이 잘 사는게 열반이야."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갈 터인데 뭘 자꾸 하려고 하고 그래?"

"그건 진혼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는가. 그나마 죄를 씻는 중인데 그걸 막으면 원한만 쌓일 뿐이지."

"기운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네. 사람이 잡아맬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

말 타고 지나는 십여리 길에 병풍을 온통 깔아놓고 그 내용을 외지 못하면 세상에 허명을 떨친 죄로 죽이겠다 했으나 병풍에 눈길조차 준 적없었던 사명당이 막힘없이 글을 모두 외었던 일화,

백 사람이 먹을 음식을 내어놓고 모두 먹지 못하면 성의를 무시한 죄로 죽이려 했으나 사명당은 맛있게 그음식을 모두 비웠다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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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2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운 날 감기 조심하시고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 드립니다 ㅎㅎ 좋은 오후 보내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22 15:20   좋아요 1 | URL
서곡님 고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건강 관리 잘하시고 얼마남지 않은 23년 한 해 마무리도 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몇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곳‘ 과 ‘그 도시‘를 왔다갔다 했던 ‘나‘에게 고야스 씨는 p.444에 밑줄친 부분에서 ‘당신의 진정한 의지‘ ,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이라는 말들을 써가며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의지와 내가 마음에 진정으로 원하는 어떤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얘기한다.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은 다른데 가있는데, 실제 내 몸과 행동은 그 마음과 관계없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들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어떤 현실적인 이유나 기타 여건들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내 과도한 욕심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마음 속으로 추구하면서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감을 느끼고 그냥 좌절한 채 각종 좋지 못한 것들로 그러한 괴리감이나 공허함들을 채워나가면서 점점 더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흔히들 인생에는 정답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현실에서 이루어 내며 살아가는게 성공적인 인생이라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여기 끄적인 것들이 이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생뚱맞은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님의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나 어떤 의미같은 것들을 찾아보려는 과정 자체가 나를 포함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설령 내가 생각해낸 어떤 메시지나 의미가 작가가 의도한 것과 좀 다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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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계속 읽으면서 자신이 100% 원하고 바라던 것들이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 뒤틀렸을 때, 거기에 대한 대안을 찾아서 거기에 발맞추어 살아가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Plan B‘ 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누구나 자신의 Plan A 대로 되기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디 인생이라는게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이 책의 인물들도 현실을 사는 우리 인생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했던대로 인생길이 순탄하게만 풀려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아남아있는 이상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살아내야하지 않겠는가.

과연 나의 Plan A는 무엇이었고 또다른 Plan B 는 혹은 Plan C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오늘의 독서다. 참 이 작가님은 소설 내용자체도 물론 흡입력이 있지만, 독자인 나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해보게 만드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 때마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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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도서관에서 책을 엄청 열심히 보는 한 소년에게 ‘나‘의 시선이 간다. 처음 보는 소년이라 사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이 있는 친구였다. 근데 이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모르게 ‘나‘의 어릴적 모습이 오버랩 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건 또 뒤에 이어질 내용과 이어지는 복선인 듯한 냄새가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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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인 ‘나‘는 위에서 말한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일정한 반복적인 패턴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타산지석(?) 삼아서 ‘나‘도 ‘나‘의 행동 패턴을 돌아본다. 돌이켜보니 자신도 행동 양식이 그 소년과 좀 다르다 뿐이지 어떤 일정한 습관? 루틴? 이런 것들을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언의 깨달음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의 복선 같은 것일수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툭 던진, 얼핏보면 무심해보이는 메시지 같은 것들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생각들을 자꾸 해보게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간혹 이 책에 리뷰를 쓰신 분들 중에는 내용이 애매모호한 느낌이 든다면서 약간은 비판적인 논조로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독자인 나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약간의 불명확한듯한 암시(?)가 나를 포함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하여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추측하거나 어떤 의미들을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어줘서 오히려 좋다고 느껴졌다. 뭐 읽는 사람마다 보는 눈과 생각들이 다를 수 있기에 비판적으로 보시는 분들의 의견도 그 자체로 존중할 필요는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분들과는 생각의 결이 약간은 다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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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뭔가가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칫 ‘스포‘가 될 수 있기에 내용적인 것에 대해 추가적으로 말하진 않겠다.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확장해서 끄적여 본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그 존재 목적 혹은 이유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현실로 돌아와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적 혹은 이유가 사람마다 자기가 속한 어떤 집단이나 조직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위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관계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가 때로 하찮고 미미해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미 그렇게 잘 살고 계신분들은 그대로 쭉 잘 살아가시면 될 것이고, 자존감이 낮아져있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분들일지라도 존재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분들이니 삶을 내려놓지 말고 어떻게든 삶의 이유나 목적을 찾아서 거기에 맞게 삶을 이어나가시길 바라는 바이다.

"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 의지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 목적은 어디쯤인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실체 없는 개인적인 영혼에 지나지 않고, 죽음으로 인해 특별한 예지를얻은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당신 이야기에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사실 그 모두가 당신의 마음이 원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당신 마음이(당신은 모르는 곳에서) 그러기를 원했다―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 P444

"요컨대 제 의지를 초월하는 보다 견고한 어떤 의지라는 게,
외부가 아니라 제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네. 물론 미흡하고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당신은 필시 자신의 의지로 그 불가사의한 도시에 들어갔고,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이쪽으로 돌아온 겁니다. 당신을 튕겨낸 용수철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특수한 힘일 테지요. 마음속 밑바닥의 강한 의지가 그 엄청난 왕래를 가능케 했습니다. 스스로의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 P445

"고야스 씨는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아뇨, 그저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썩 믿을 만한 게 못 될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저는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사후의 영혼에 피부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네, 충분히 일어날 수있는 일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일어나진 않아요. 하지만 언젠가 어디선가는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와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 P445

"그녀는 어느 날 작별의 말도 없이 조금의 암시조차 없이 제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후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어요. 연락 한 줄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벌써 중년의 영역에 발을 들였지요. 그런 인간이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기억을 찾아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간다ㅡ과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 P447

"결국 저는 그 백 퍼센트의 마음이 다시 한번 찾아와주기를 지금껏 기다렸나봅니다. 혹은 과거에 제게 그 마음을 가져다 주었던 그 사람을." - P448

"아내에 대한 사랑에 필적할 만한 감정을 느끼게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용모가 뛰어난 분도, 인품이 훌륭한 분도, 죽은 아내가 그랬던 것만큼 제 마음을 떨리게 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스커트를 입게 되었지요. 보수적인 산간 동네다보니, 괴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별난 남자에게 혼담을 내미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P448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 P449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449

"아내가 한 마디 말 없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제 마음은 깊은상처를 받았습니다. 남모를 상흔이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마음의 중심까지 가닿는 중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죽지 않고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이 구제할 길 없는 치명상이란 걸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저는 이미 삶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계속 살아간다, 라는 레일이 제 앞에 깔리고 만 겁니다."
고야스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 P450

"그때를 경계로 저는 그전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 그 무엇에도 열정을 가지지못하게 된 겁니다. 제 마음의 일부가 타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음에 입은 치명상으로 저라는 인간이 이미 반쯤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후 인생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이 도서관뿐이었습니다. 이 작고 개인적인 도서관이 있었기에 지난해의 그날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네, 저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당신이 마음에 입은 상처를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주제넘은 말인지도 모르지만, 마치 제 일처럼 말입니다." - P451

"당신은 그런 사정을 충분히 아시고서 저를 이 도서관 관장으로 선택한 건가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첫눈에 보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 도서관에서 제 뒤를 이어야 할 사람이란 걸요. 그도 그럴 게 여긴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니까요. 그저 많은 책을 모아둔 공공시설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 P451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 P452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ㅡ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는다? 대체 어디서 낙하한다는 걸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 P452

이 소년은 이른바 ‘캘린더 보이‘가 아닐까. 과거나 미래의 언제든 날짜만 듣고 무슨 요일인지 순식간에 알아맞히는 특수 능력이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는 ‘서번트 증후군‘으로 불린다. 영화 <레인맨>에 나왔던 인물도 그중 하나였다. 지적장애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수학이나 예술 분에서 종종 비범할 정도로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다. - P457

내 생일이 정말 수요일인지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싶었지판 도서관에 컴퓨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그날 퇴근 후 집에 있는 컴퓨터로 찾아봤더니 내가 태어난 날은 정말로 수요일이 맞았다). - P457

"그런데 생일이 무슨 요일이던가요?"
"수요일." 내가 말했다.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소에다 씨가 말했다. 이노래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더 구스의 한 소절이에요. 월요일의 아이는 아름답고 화요일의 아이는 품위 있고,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 P458

사진기억력이라고 하죠, 책을 읽으면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하는데, 받아들인 정보량이 워낙 방대하고 자세하다보니 실용적인 수준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 P459

"하지만 저애는 고등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학교 대신 이 도서관을 오가며 서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치우고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애한테는 이곳이 학교인 셈이에요."
"그리고 읽은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한다?"
"이를테면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을 읽었다고 칩시다.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을 그대로 암송할 수 있어요. 꽤 긴 소설이지만, 상관없이 전부 기억해버려요.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고 인용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책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호소하는지, 혹은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건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 P461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특수한 능력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하죠. 특히 이렇게 작고 보수적인 마을에서 이질적인 것. 평범하지 않은 것은 배척되기 마련이고, 저애랑 엮이는 걸 꺼리는 이들이 많아요. 전염병 걸린 사람을 피해다니듯이. 적어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죠. 슬픈 일이에요. 알고 보면 무척 얌전한 아이고, 생년월일을 물어보고 다니는 걸 빼면 누굴 귀찮게 하지도 않는데." - P462

"하지만 어쨌거나 지식욕 자체는 의미있고 귀중한 것이고, 도서관은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도서관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 P462

"게다가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한테 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문제라면, 어떤?"
"한 아이에게 흥미를 품고 졸졸 따라다녔어요. 특별히 예쁘거나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 여자아이의 어떤 면에 엄청나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죠. 따라다닌다고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말도 걸지 않고, 그저 가만히 뒤를 쫓기만 했어요. 바싹 붙지도 않고, 조금 떨어져서. 그래도 당하는 사람입장에선 당연히 기분이 나쁘죠. 여자아이 부모님이 교장 선생님을 통해 항의하면서 약간 문제가 됐습니다. 이 마을 사람은 모두 그 일을 알고 있고요. 그러니 자기들 아이가 저애 가까이 가는 걸 반기지 않아요." - P464

그리고 그 소년이 내게 말을 건 것도 생년월일을 물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번 생년월일을 알고 나면(이어서 요일을 맞히고 나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 충족되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열람실 말고 다른 장소에서 내가 그 옐로 서브마린소년을 본 건 어느 월요일, 도서관 휴관일 아침이었다. - P465

그들은 어느새 내게 신기할 만큼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생전의 그들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 P466

어쩌면 전에도 했던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괘념치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묘비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묘비는 내내 말이 없었다. 돌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도바꾸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건 나뿐인지도 그래도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 도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 P468

두꺼운 구름이 바람에 실려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그런 구름을 보고 있으면 세계가 돌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구는 천천히 착실하게 회전하고, 시간은 쉼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 P468

설령 소년이 내 이야기를 한 마디도 남김없이 들었다 한들불리할 게 있을까? 만약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말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꿈같은 이야기로 정리될 것이다. 환상적인 종류의 픽션으로, 그리고 나는 ‘몽상적 경향이 있는 인물‘로 분류될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나 정밀한 사진기억력을 가진 소년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들렸을까? 그의 마음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P469

나는 그 소년에게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고야스 씨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여태껏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추운 겨울날 아침, 마을 외곽의 절 묘지까지 일부러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 P470

뒤뜰로 향해 고양이 가족을 관찰했다. 고양이는 비바람을 피해 오래된 툇마루 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누군가가 골판지 상자와 낡은 담요로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어미는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 않아서 (도서관 직원들이 매일 먹을 것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도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딱히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새끼들은 후각에 의지해 꼬물꼬물 어미의 젖 근처로 모여 있고, 어미는 사랑스럽다는 듯 실눈을 뜨고 새끼들을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질릴 줄도 모르고 구경했다. - P471

그리고 새삼 떠올렸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ㅡ그녀가 일찍이 가르쳐주었듯ㅡ개나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외뿔 달린 짐승들은 있었다. 밤꾀꼬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동물은 본 적이 없다(하긴 밤꾀꼬리도 소리만 들었지만). 아니, 동물만이 아니다. 벌레도 한 마리 보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 도시에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 없으면 안 되는 것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리고 짐작건대 나 역시 그 도시에 필요한 존재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 P471

그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월요일 아침 일찍 고야스씨의 무덤을 찾았을까? 그저 예의를 위한 성묘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내 본능이 말했다). 어쩌면 알고 있을까? 고야스 씨의 영혼이 아직 생사의 경계에 해당하는 세계에 머무르면서 이따금 생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 P472

나는 소에다 씨에게 재작년 봄부터 기록해온, 이 도서관에서 그애가 읽은 책 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했다. 놀랄 만큼 많은 권수, 놀랄 만큼 많은 분야의 책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 모토오리 노리나가, 프란츠 카프카, 이슬람교 경전, 유전자 해설서, 스티브 잡스 전기, 코넌 도일의 《주홍색 연구》, 원자력 잠수함의 역사, 요시야 노부코의 소설, 작년도 전국농업연감,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샤를 드골의 회고록까지. - P473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나의 열여섯, 열일곱 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나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걸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들을 필사적으로 독파하고, 잡다한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되는 지식이고 무엇이 쓸모없는 지식인지 알아보는 기술이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 P473

스케일이 장대할 뿐 그 소년이 하고 있는 일도 근본은 같을지 모른다. 젊고 건강한 지식욕은 지칠 줄 모른다. 그러나 아우리 많은 정보를 욕심껏 자기 안에 욱여넣어도 도무지 충분할 순 없다. 세계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양의 정보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개인의 수용량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바닷물을 양동이로 퍼내는 거나 마찬가지다ㅡ양동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 P474

"읽다가 재미없어서 중단한 책은 없나요?" 나는 물었다.
"아뇨, 제가 알기로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은 전부 끝까지 읽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두진 않아요. 그애는 보통 사람처럼 재미있다 없다, 흥미가 생긴다 아니다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 책을 취사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그애에게 책은 구석구석까지,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채집해야 하는 정보가 담긴 그뜻이에요. 가령 보통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재미있다 싶으면 그후 크리스티 작품을 몇 권 더 이어서 읽곤 하잖아요. 하지만 그애는 그렇지 않아요. 책을 선택하는 데 계통이란 것이 없죠." - P474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새끼고양이들이 없어진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소에다 씨도 그건 알지 못했다. 그가 새끼고양이들의 소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있기 때문이다. 그저 매일 뒤뜰에 고양이 가족을 보러 가던 습관이 없어졌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 P480

소년은 노란 잠수함 요트파카를 입지 않은 날은 영화 《옐로 서브마린》나오는 다른 캐릭터가 프린트된 갈색 요트파카를 입었다. 푸른 얼굴에 분홍빛 귀, 몸에 갈색 털이 난 기묘한 생물이다. 나도 영화를 봤지만 그 캐릭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노웨어 랜드에 사는 노웨어 맨이다. 존 레넌이 그의 주제가를 불렀다. 하지만 도저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옐로 서브마린 캐릭터‘를 검색하고, 그 파란 얼굴의 기묘한 등장인물이 ‘제러미 힐러리 불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니스트이자 식물학자, 고전학자, 치과의사, 물리학자, 풍자작가・・・・・・ 뭐든지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닌 남자. - P481

소년은 날마다 거의 같은 옷만 입었다. ‘노란 잠수함‘ 파카 아니면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 파카.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빛바랜 청바지에 복사뼈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농구화, 다른옷차림은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소에다 씨 말에 따르면 집이 유복한 편이고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몹시 사랑한다 하니, 깨끗한 새 옷을 사주는 일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옷들은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스스로가 원해서 매일 입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새 옷을 입는 걸 완강하게 거부해서일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를 일이다. - P482

매일 정해진 행동 패턴을 하나하나 정확히 짚어가며 답습하는건 그에게 분명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행위의 본질이나 방향성보다 반복 자체가 목적인지도 모른다. - P483

소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나는 조금 쓸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묘비 뒤에 숨어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기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아니, 나는 내 이야기를 고야스 씨뿐 아니라ㅡ오히려 그 이상으로ㅡ소년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막연히 그렇게느꼈을 뿐이다. 순수한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이야기를 듣고 소년이 어떤 감상을 가질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484

겨울의 태양은 온 힘을 다해 빛과 온기를 지상에 던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세계는ㅡ사람들, 고양이들, 갈 곳 없는 영혼들은ㅡ더 많은 빛과 온기를 원하는 것이다. - P484

나는 여느 때처럼 묘지에서 삼십 분쯤 시간을 보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역 근처 이름 없는 ‘커피숍"에 들러 뜨거운 블랙커피로 몸을 녹이고, 마찬가지로 블루베리 머핀을 먹었다. 조간신문을 읽으면서 귓결로는 벽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에롤 가너의 <파리의 4월>을 들었다.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아무렴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 생활도 같은 일의 되풀이가 아닌가.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 P485

"제 영혼이 이런 형체를 가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때가 되면 결국 다 사라질 겁니다." 고야스 씨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영혼은 그 ‘일시적인 기간‘을 경과해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무로 빨려들어가, 두번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P486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살아 있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와 조금 다른 형이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묘하게 고요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 슬픔에는 아픔이 없다. 그저 순수하게 슬플 뿐이다. 그의 한 단계 더 나아간 죽음을 가정함으로써, 무가 확실히 존재함을 전에 없이 가깝게 실감할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정말로 만져질 것처럼. - P487

나와 소에다씨는 고야스 씨라는 ‘부재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 비밀을 공유하는 공모자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 P488

그후 한동안 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바로 열어볼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러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ㅡ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종류의준비여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열지 않는 편이 좋다. 잠시 이대로 묵히는 편이 좋다. 열이 너무 오른 무언가를 식히듯이, 본능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게 그러라고 일러주었다. - P490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의 경과였다. - P490

나는 그 흰색 인쇄용지를 봉투에서 조심스레 꺼냈다. 종이에는 검은색 잉크로 어떤 그림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글은 없다. 나는 그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딱딱한 무언가로 등을 힘껏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이 내 몸안에서 모든 논리를, 모든 맥락을 말끔히 내쫓아버렸다. 방 전체가 크게 출렁이는 것 같은 물리적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균형을 잃고 양손으로 책상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잠시 말을 잃고, 생각이 나아갈 길을 잃었다. - P491

그 종이에 그려져 있었던 건,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를거의 정확하게 묘사한 지도였다. - P491

그 지도를 앞에 두고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이,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지도였다.
콩팥처럼 생긴 가장자리 (아래쪽이 움푹 파였다), 완만하게굽이치며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아름다운 강 불길하고 깊은 웅덩이를 이루는 끝자락, 유일한 출입구인 문. 그 안쪽의 문지기 오두막, 강에 걸린 오래된 돌다리 세 개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이 말라붙은 운하, 바늘 없는 시계탑, 그리고 한 권의 책도 놓여 있지 않은 도서관.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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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었던 부분에 이어서 영적인spiritual 것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이 소설에 자주 나오는 단어인 ‘그림자‘라는 것이 성경(바이블)의 <시편> 말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p.358에 밑줄친 부분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집에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경책을 한 번 찬찬히 읽어 보는 것도 어떤 영적인 세계를 느끼고 경험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안 갖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운‘이라는 것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운‘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과 어느정도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면 이 세상에는 영적인게 일정부분 존재한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다.

사람의 생사화복이 다 똑같지 않고 사람마다 다들 조금씩 다른 것도 그렇고, 단지 미신인지 아니면 그냥 재미로 보는 건지는 몰라도 신문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보면 오늘의 ‘운‘세니 뭐니 하면서 생년 혹은 띠에 따라 그날의 ‘운‘세를 알려주는 콘텐츠들도 많으며, 또한 길거리를 다니다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사주카페‘ 나 ‘타로점‘ 같은 것들을 봐준다고 하는 가게들도 많이 있는게 현실이다. 실제로 그런 곳에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설사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떤 ‘운‘이라는 것 혹은 영적인 세계의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관계없이 어느정도 공감대가 있을만한 얘기라고 본다.

잠시 소설의 내용에서 곁길로 샜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이 어제와 오늘에 걸쳐서 장황하게 나와있음을 볼 수 있었다. 어제 쓴 내용 중에 내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던 것도 결국에는 영적인 이야기들이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해서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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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대한 얘기는 대략 이 정도로 접어두고, 뒤이어 도서관 직원인 소에다 씨가 고야스 씨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에게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래저래 사연들이 이어진다. 인생이란걸 획일화 할 수는 없겠지만, 좋을 때가 있으면 안 좋을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순환되는게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너무나도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얘기들이라 한두마디로 정리하긴 힘들지만,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책 몇 페이지 속에서 아주 응축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언제든 원할 때 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기회는 제한되어 있어요. 시간도 결코 길지 않고요. 그러니까 언제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른답니다." - P357

고야스 씨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성경? 기독교의 성경 말인가요?"
"네, 바이블 말입니다."
"아뇨,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도가 아니라서."
"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P358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네, 저는 옛날부터 이 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 있지 않습니다." - P359

"당신은 아직 이렇게 살아 계시지요." 고야스 씨가 말했다.
"그러니 부디 목숨을 소중히 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 검은 그림자가 달려 있으니까." - P359

나는 큰맘먹고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고야스 씨, 사실 저는 모든 주민에게 그림자가 없는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도서관 일을 했습니다. 이것과 똑같이 생긴 장작 난로가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습니다." - P359

고야스 씨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반지하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고야스 씨가 사라지고 나니 방금 전까지 그가 여기 있었던 것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이 덮쳐왔다. 나는 여기에 계속 혼자 있었고, 그저 막연한 망상에 잠겼던 게 아닐까. 그러나 환상도 망상도 아니었다. 책상 위에 남은 빈 찻잔 두 개가 그 증거다. 한 잔은 내가, 다른 한 잔은 고야스 씨가ㅡ혹은 그의 유령이 (혹은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그의 의식이)ㅡ마셨다. - P360

"좀 묘한 말이지만, 제가 고야스 씨의 됨됨이를 가까이서 좀더 밀접하게 알게 된 건 오히려 돌아가시고 나서였어요. 살아 계실 때는, 뭐랄까, 항상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셨거든요. 차갑다거나 젠체한다는 건 절대 아니고, 저희를 대하는 태도는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주위의 현실적인 것들에 어째 관심을 두지 않는달까,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어요." - P370

"하지만 돌아가신 뒤로는, 즉 영혼만 남고 나서는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심을 담아 말씀하시더군요. 성격도 그전과 달리 활기차고 인간미 있게 바뀐 것 같았고요. 죽은 뒤에 인간적으로 더 활기차졌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까지 내면에 소중히 감추고 있던 것이 죽음과 함께 밖으로 드러난게 아닐까요." - P370

"생전의 고야스 씨 마음을 가리고 있던 단단한 껍데기 같은것이 사라졌다."
"네. 정말로 그런 느낌이었어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마치 봄이 찾아와 쌓인 눈이 녹고, 그 아래서 여러 가지가 차례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 P370

결국 인생은 대부분이 타협의 산물 아닌가. - P376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열렬한 사랑보다는 오히려 종합적인 인간 평가에 가까웠다. 그녀가 인생의 파트너로 원한 건 불타는 정열이 아니라 부침이 적고 안정된 인간관계였다. - P379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ㅡ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ㅡ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ㅡ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380

그건 그에게 싹튼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자, 지금껏 해보지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망설임과 울분이 사라지고 거의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모든 야심을, 혹은 몽상과도 닮은 희망을 접고, 지방 소도시의 중견 양조회사 4대 경영자로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P380

그것이 고야스 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다. 그 아이가 나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계승해준다면. - P382

어쨌거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 길에 아무리 큰 슬픔이 있더라도, 상실과 절망이 기다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P389

어쨌거나 전부 일어날 일이라서 일어난 거야. 누구의 탓도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우연히도 여러가지가 운 나쁘게 한꺼번에 겹쳐버린 거야.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이제 와서 하나하나 따져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 - P391

물론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잇따라 잃은 일, 마음에 깊이남은 그때의 상처가 이른바 ‘기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리란 건 누구나 수월히 상상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평범한 생활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신기한 일이라고 할까요, 베레모에 스커트라는 별난 차림을 한 뒤로 고야스씨가 예전과 확 달라져서 매우 명랑한 성격이 된 것 같았어요.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이 활짝 열리고, 어둡고 습하던 방에 봄볕이 가득 흘러드는 것처럼요. - P402

"피리 부는 사나이는 마지막에 가서 모든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버리죠. 맞나요?"
"맞습니다." 소에다 씨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하멜른 마을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쥐를 잡아달라고 부탁하고는 일이 끝나고도 약속했던 보수를 치르지 않았어요. 그는 그 대가로 마법의 피리를 불어 마을 아이들 모두를 흘려 깊은 동굴로 이끌고 가버리죠. 남은 건 다리가 불편해 행진에 따라가지 못했던 남자아이 한 명뿐이었어요. 그렇게 피리 부는 사나이는 최종적으로 불길한 마술적인 존재가 되었지요.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고야스 씨에게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고 그런 기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각을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꾸밈없이 따랐을 뿐이에요. 다른뜻도, 목적도 없이 자기 모습이 누군가에게 어이없게 비치건, 조롱을 당하건, 혹은 누군가를 매료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겁니다." - P404

"마치 바뀐 옷차림을 계기로 다른 인격으로 갈아탄 것처럼."
"실은 정말로 다른 인격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과 결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 P405

"고야스 씨가 사비를 쏟아부어 이 도서관을 설립한 건 첫째로 자신이 그려온 이상 속의 도서관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분위기의 특별한 장소를 마련하고, 많은 책을 모아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골라 읽는 것, 그것이 고야스 씨가 생각한 이상적인 소세계였습니다. 아니, 소우주라고 해야 할까요. 젊어서는 스스로 소설가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 바람을 접은 뒤로,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잃은 뒤로는 그것이 그분 인생에서 유일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 같아요." - P406

"물론 고야스 씨가 이 도서관을 사랑했고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는 건 틀림없어요. 고야스 씨는 이 도서관에 있을 수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고 심적으로 충족되있는가 하면, 아마 아니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고야스씨 마음에는 깊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았어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 P407

겨울이 길고 혹독한 고장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많이 읽어요. - P408

고야스 씨는 평화롭고 따뜻한 가정을 가져야 마땅한 분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족들과 사랑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하는 분이었어요.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럴 자격이 충분했고요. 그래서 저는 그분이 그렇게 홀로 인생을 마치게 된 일을 슬프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고야스 씨는 부인과 아이를 잃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던 거예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늘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온 겁니다. - P410

"살아 있는 당신과 죽은 고야스 씨가 그처럼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죠.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고요." - P418

"고야스 씨가 진정한 의미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이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기척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네, 그럴 수 있죠." 소에다 씨는 말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 P419

그래도 컴퓨터 없는 일터는 나름대로 신선했고 다른 세계에 길을 잃고 흘러든 것처럼 불가사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 P421

며칠 전 소에다 씨와 나눈 긴 대화, 고야스 씨에 대한 얘기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떠올리며 볼펜으로 메모지에 그 요점들을 써내려갔다. 빠뜨린 게 없도록, 중요한 포인트를 깜박하지 않도록 그리고 메모를 다시 읽으며 각각의 요점을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 P421

그렇다, 죽은 자의 영혼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는 내가 알 턱이 있겠는가? - P424

내가ㅡ다치기 쉬운 육체와 불완전한 사고력을 지녔을 뿐인, 현세라는 지면에 하릴없이 묶인 내가ㅡ할 수 있는 일은, 모르긴 해도 그가 처한 사정이나 형편이 충족될 때 고야스 씨의 유령이 내 앞에 출현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온통 침묵에 휩싸인 반지하의 그 정사각형 방에서, 오래된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며. - P424

가끔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 P425

삽으로 눈을 퍼 카트에 실으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목숨을잃어갔던 단각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밤이 밝으면 그들 중 몇 마리가 서식지 바닥에 하얀 눈옷을 덮어쓰고 드러누워 있었다. 누군가의 죄를 떠안고 대신 죽어간 이들처럼. - P426

흰 눈으로 둘러싸인 곳에 혼자 서서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올려다보면 가끔 나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지금 과연 어느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 P426

인적 드문 아침 시간에 꽃다발을 들고 마을을 걷자니 나자신이 지금의 내가 아닌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나는 열일곱 살이고, 맑은 휴일 아침, 꽃다발을 들고 걸프렌드의 집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섞여든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 P427

아니면 나인 척하는, 내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건 내가 아닌 나인지도, 영락없이 나처럼 보이는, 그리고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도 없지는 않다. - P427

부인의 이름은 분명 ‘미리‘일 것이다. 달리 읽는 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야스 미리"라고 나는 몇 번 조용히 읊어보았다. ‘이치를 보다‘, 상당히 심오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는 건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 P429

나는 묘비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429

천장 가까이 붙어 있는 소형 스피커에서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연주하는 콜 포터의 오래된 스탠더드 넘버가 낮게 흘러나왔다. 맑은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솔로. 귀에 익은 곡인데 도저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록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도 조용한 휴일 아침에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남아온 아름답고 기분좋은 멜로디.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않고 멍하니 그 음악에 귀기울였다. - P431

여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아주 미인은 아니어도 인상 좋은 얼굴이었다. 화장은 옅다. 마음먹으면 더 젊어 보일 수 있을 텐데, 별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면에도 적당히 호감이 갔다.
"실은 조금 전까지 무덤 앞에 있었어요. 정말로는 아직 죽지
많은 사람의 무덤 앞에" ,  나는 자리를 뜨면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 P432

그러다 문득ㅡ마치 발밑의 풀숲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ㅡ그 제목을 생각해냈다. 역 근처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던 콜 포터의 스탠더드 넘버 제목을. <Just One of Those Things(흔히 있는 일이지만)>다. 그리고 그 멜로디가 의식의 벽에 들러붙은 주문처럼 귀 안쪽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 P434

어떻게든 잠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한들 헛일일 것이다. 위스키도 브랜디도 소용없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밤, 아마도 무언가가 나를 재우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언가가...... - P435

집에서 오지도 않는 잠을 기다리는 건, 거의 오 분 간격으로 시곗바늘을 쳐다보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그럴 바에야 추운 바깥을 정처 없이 걷는 편이 나왔다. - P435

매섭도록 추운 밤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냉기는 내 몸을 안쪽부터 조이고 쥐어짜며, 머릿속을 부옇게 채웠던 생각을 잠시나마 마비시켰다. 찬바람에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덕분에 조금 전까지 귓속에서 울리던 종잡을수 없는 멜로디는 말끔히 사라졌다. 북쪽 지방의 겨울이 지닌 미덕이라고 해야 할까. - P436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그저 기분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무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춥다는 것 말고 다른 감각이 파고들 틈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니, 내 발길은 저절로 도서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신은 눈신이 주인인 나보다 더 명료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 P437

"무덤에 들어간 건 결국 세 사람의 유골일 뿐, 뼈와 영혼은 전혀 연관이 없어요. 네에, 뼈는 뼈, 영혼은 영혼입니다ㅡ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 육체를 잃은 영혼은 끝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죽어 사후세계에 와서도 저는 생전과 다를 바없이 외톨이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묘비에 셋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결국 제 영혼도 마땅한 시간이 흐르면 어딘가로 사라져 무로 돌아갈 테지요. 영혼이란 어디까지나 과도적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무는 그야말로 영원합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표현을 초월한 것입니다." - P441

"네,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있어요. 그리고 그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 - P441

"당신 역시 과거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좇아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셨고요."
"고야스 씨는 그것도 알고 계시는군요."
"네, 알다마다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한 번이라도 자기 그림자를 잃어본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고요. 특히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나는 잠자코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몸안에서 시간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장해물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 P442

"그곳에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게 살아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계시겠죠?" 고야스 씨는말했다. "가는 건 어찌어찌 해낸다고 쳐도 이쪽으로 귀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어림도 없어요." - P442

"대체 어떻게 이쪽으로 돌아왔는지는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 그림자는 저에게 이별을 고하고 깊은 웅덩이로 혼자 뛰어들어 무시무시한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쪽 세계로 돌아오려 했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저쪽 세계에ㅡ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ㅡ남기를 택했죠. 그런데 다음 순간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쪽 세계에 돌아와 있었어요. 그림자는 다시 제 그림자가 되었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길고 생생한 꿈이라도 꾼것처럼. 그런데 아니에요, 그건 꿈이 아닙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가 꿈이라고 저를 세뇌시키려 해도요." - P443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저쪽 세계에 남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의지와 달리 이쪽세계로 돌아오고 말았죠. 마치 강한 용수철에 튕겨나가듯열심히 생각해봤지만, 결국 제 의지를 초월하는 다른 어떤 의지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요. 그게 어떤 의지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목적도." - P443

"당신이 처음부터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요컨대그 무언가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말했다. "어느 날 깊은 혼수에서 깨어보니 낯선 구덩이에 혼자 누워 있었어요. 벽에 둘러자인 도시, 그 문 근처에 파인 구덩이입니다. 문지기가 저를발견하고 도시에 들어가고 싶은지 물었어요. 저는 들어가고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어떤 의지가 저를 그 구등이 속으로 옮겨놨을 테죠. 물론 그후 문지기의 물음에 답하고 도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건 저 자신의 의지입니다만."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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