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책 제목에 있는 ‘희랍어‘ 라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져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로 그리스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라고 나온다. 아쉽게도 그리스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써는 당연히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리스에 직접 가보는 것 까진 아니더라도《그리스인 조르바》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간접 경험같은 건 그나마 좀 해볼 수 있을지 않을까 싶다.

괜한 잡설이 길었고,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시작하는 문장에서 (개인적으로 독서력이 미천한 관계로 잘은 모르지만 이름만큼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서 알고 있는) 보르헤스가 남긴 유언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해석과 추론이 가능해보인다. 실제로도 작가님과 다른 연구자의 해석이 사뭇 다른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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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보니 저자가 보르헤스가 묻혀있는 도시인 제네바가 속한 나라인 스위스를 여행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저자는 보르헤스의 무덤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고 다른 멋지고 좋은 건축물과 풍경들을 보고 온 듯하다. 본문에는 저자가 방문했던 성聖 갈렌 도서관과 루체른 선착장에 대한 간략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곳을 여행했던 사람들이 블로그에 올린 사진들을 일부 만나볼 수 있었다. 나도 짧게 소감을 남기자면 ‘스위스가 참 아름다운 나라구나, 기회가 된다면 가보면 참 좋겠다‘ 뭐 이 정도로 적어볼 수 있겠다. 좀 더 보태자면 사진을 통해 간접 경험만 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직접 가서보면 어떤 느낌일지 감히 상상이 안된다.

다만 내가 블로그에서 본 사람들과는 달리 저자는 자신이 여행을 갔을 때 사진을 별도로 남기진 않았다고 한다. 그저 풍경은 자신의 눈동자에 기록하고,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은 각각 귀와 코와 손에 새겨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갑자기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문득 가수들의 공연이 생각났다. 무슨 축제나 콘서트 같은 걸 보다보면 가수들이 공연할 때 핸드폰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촬영한 것을 다시 보면서 그때의 감동을 다시금 느끼기 위함이거나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저자가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보다는 현장 그 자체를 온 몸으로 오감을 동원해 느끼자는 주의라 카메라를 들기보다는 그 현장에서 소리도 지르고 점프도 하면서 가끔 운이 좋으면 공연하는 사람과 아이컨택도 하면서 그 순간을 즐기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글을 쓰다보니 내 방식이 맞고 촬영하는 것은 틀렸다는 식으로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아니니 오해는 안하셨으면 좋겠다, 그저 사람마다 자신이 우선하는 가치가 다르기에 여기서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해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관계없이 그 순간을 최대한 자신의 방식대로 즐길 수 있다면 그러면 되는 것 같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7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ㅡ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ㅡ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 P7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 P8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聖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 P8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P8

에모스, 에메테로스. 나의, 우리들의. - P10

소스, 휘메테로스. 너의, 너희들의. - P10

그것이 다시 왔어. - P12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 P12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P13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 P15

더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 P16

비블리오떼끄 - P17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 P17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3의 태가 있다 - P18

우리가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 P18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 P19

이십 년 전,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리리라고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 P19

함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원서로 읽기를 원하는 플라톤과 호메로스와 헤로도투스, 속화된 헬라어로 쓰인 후대의 문헌들에 그녀는 거의 무관심하다. 더 낯선 문자를 쓰는 버마어나 산스크리트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면 주저없이 그것들을 들었을 것이다. - P19

......예를 들어 ‘사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 P19

이렇게 규칙이 까다로운 언어를 그녀는 접해보지 못했다. 동사들은 주어의 격과 성과 수에 따라, 여러 단계를 가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태에 따라 일일이 형태를 바꾼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주어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 어순을 지킬 필요조차 없다. - P20

팔 년 전에 그녀가 낳은, 이제 더이상 키울 수 없게 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무렵, 그녀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를 꿈꾼 적이 있었다. 등이 흠뻑 젖을 만큼 생생한 악몽이었다.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잠투정이 심한 아이를 재우다 설핏 잠들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을 꾸었다. - P20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 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 P23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 P23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_보르헤스 - P26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 P27

μὴ αἴτει οὐδὲν αὐτόν.
아무것도 그에게 묻지 마시오. - P28

μὴ ἄλλως ποιήσης.
다른 방법으로 하지 마시오. - P28

섣부른 안과수술은 오히려 실명을 앞당길 뿐 - P35

강한 빛이 해롭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조심하는 편이 현명하다 - P35

태양광선이 강한 낮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밤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지내라고 - P36

나중에.
...(중략)...
완전히 모든 걸 못 보게 되기 직전에. - P36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 P36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 순간의 어떤 것도 내 기억속에선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뿐 아니라, 당신과의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까지 낱낱이 살아 꿈틀거립니다. - P37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P37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口語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 P40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 P43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 P44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 P44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τὴν ἀμαθίαν καταλυεται ή άληθεία.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 P44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 P45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 - P45

겨울 밤 창문 틈을 할퀴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 실톱이 쇠 위에서 소리치고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 당신의 목소리. - P48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 P48

다만 그리웠을 뿐입니다. 내 곁에 앉아 있지 않은 당신의 손등이. 연한 갈색 피부 위로 부풀어오른 검푸른 정맥들이. - P48

멈추시오.
παῦε.
나에게 물어보시오.
αἴτει με.
다른 방법으로 하시오.
ἄλλως ποιήσης. - P50

멈추지 마시오.
μὴ παῦε.
아무것도 나에게 묻지 마시오.
μὴαἴτει μηδέν με.
결코 다른 방법으로 하지 마시오.
μὴ αἴτει οὐδὲν αὐτόν. - P50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 P51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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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0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랍이란 말은 음역인데 주로 한자음을 가지고 외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지요.그리스를 중국인들이 비슷한 중국어로 대체한것이 희랍인데 같은 한자리도 중국어와 한국어의 발음이 다르니 이상하게 들리는거지요.대부분의 음을 표기가능한 한글과 달리 발음갯수가 적은 한자를 써야만 하는 중국어와 일본어는 힘들지요.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우리도 이제 구닥따리 음역어인 희랍대신에 그리스를 쓰는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9-10 18:17   좋아요 0 | URL
아 희랍이라는 말에 이런 내력이 있었군요. 카스피 님 덕분에 하나 배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