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생각에 조금씩 색을 입혀나갔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취합해 하나의 가설을 세운 뒤 논리를 발전시켜 답을 찾아내는 끈기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은하수는 스스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 변화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형연. 그와 만나고서부터 그녀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옳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신령의 키워드는 역사, 역사의 은어인 셈이지."
"하지만 이건 은어야. 대놓고 저주를 내릴 장소가 어디인지 드러난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까 이 은어 안에 실체를 숨긴거지."
"그래. 대단한 게 아니었어. 나이파이한필베마냥 주문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말이지. 우리는 다이이치가 주는 무게감에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서 멀리 돌아왔어." "회와 신."
알고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한 일에 영 닿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더 말해 볼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회와 선으로 시작하는 지명들을 검색했어. 당장 가까운 회기동 신설동부터 시작해서 회현동, 회현리, 회령군, 신철원, 신포, 신의주 등 회와 신으로 시작하는 남북한의 모든 지명을 다 찾아냈어."
"모든 지명의 짝을 지어 회신이라는 합성어를 계속 만들어 보던 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전에 얘기했었지. 다이이치의 명을 받은 이케다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면 반드시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에다 무슨 짓이든 했을거라고."
수백 개의 빨간색 가위표 사이에 파란 동그라미 두개. "회양군과 신고산면." 회양은 함경남도 안변과 맞붙은 강원도 최북단의 지역이고 신고산은 고산의 신시가지로 철도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지명이었다.
"그래. 그 두 곳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바로 험한 고개가 하나 나오더라." "철령."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철령집 만축고선." "형연아?" "철령에 매어놓아라 고려와조선이 영원히 줄어들도록."
"철령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나오는 그 철령위? 교과서에서 본 거 같은데."
정해져 있는 코스를 따라가는 일과 아무 단서도 없는 백지에 토대를 쌓아 나가는 일에 소모되는 정신력의 차이는 차원이 달랐다.
"철령은 어디지?" "함경남도, 강원도 사이 야, 너!"
"네 장점은 논리야. 합리에 어긋나는 건 받아들이지않지. 그런 네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있는지 잘 생각해봐. 왜 평소처럼 그 뛰어난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지?"
"은하수. 이케다와 조선사편수회를기억해. 다이이치가 저주를 내려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생각해."
"그래 철령은 뒤바뀐거야. 두 개의 같은 지명이 있었고 북서쪽의 철령은 동남쪽의 철령으로 둔갑해버렸지. 바로 다이이치와 조선사편수회에 의해서."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繁萬縮高鮮. 고려와 조선의 국경을 철령에 잡아매어 영토를 줄여라, 요통의 철령을 강원도의 철령으로 잡아매어 역사로 가르쳐라!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제강점기였으니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아니 오히려 일본인 학자 밑에서 그들의 연구를 도왔어. 따르지 않으면 파멸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해방 이후 그들이 우리 역사학계의 거목이 된거야."
"그게 80년 넘게 이어져 고려의 국경선이 의주에서부터 원산까지로 그려져 있는 이유야."
어두운 곳에 숨어서 고려의 국경을 잘라내 버리는 자들과 그들의 음모를 그대로 가르치는 처참한 현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보다 수백 배는 갑갑한 현실이 다가와 있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다이이치의 저주를 몰랐다고 해도 철령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잖아."
"누가 80년이나 가르쳐 내려오는 교과서를 의심할수 있겠어. 게다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학자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학계의 거두가 되었으니."
예전같으면 공허한 정의로 치부하고 넘겼을 일들이 이제는 반드시 맞서야만 할 과제로 다가와 있었다.
스스로를 깊숙이 돌아보면 반드시 역사를 마주치게 돼. 그러나 마주칠때마다 보이는건 중국과 일본에 의해 형편없이 구부러지고 축소된 모습이지. 싫을 수밖에 없어 외면하고 싶은게 당연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다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정공법으로 나가려니까 증명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흥미나 끌려는 잡배들이에요."
"출처는 자기들끼리 다 돌려쓰고 유튜브에 얼굴이나 비춰 인기몰이하는 사기꾼들이죠. 인용도 자기들끼리 해요. 누가 그랬다더라, 어디서 봤다더라, 다 인터넷에만 떠도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전문가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그럴듯 하게 말한다고 진짜 역사가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덜 여문 사람들 상대하지 않아요. 무시하고 말죠. 그런 거 하나하나 들어주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일제강점기로 인해 우리역사가 많이 왜곡된 건 사실이잖아? 그걸 바로잡겠다는 은하수의 말이 나는 좋게 들리는데?"
몇 명의 역사학자들을 더 만난 은하수는 오히려 성진이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친절하게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던 학자들은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대다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변해 입을 닫아버렸고 어느 노학자는 모욕적이라며 대화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조차 있었다.
그제야 은하수는 학자들을 설득하여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대였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퍼즐의 수많은 조각 중 그들이 허용하고 원하는 조각만 선별해 맞추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지않는 조각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저도 이번에 많이 느꼈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단지 머리에 든 게 많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고 대단한 게 아니더군. 말로 내뱉은 걸 지킬 수 있는 진짜 힘이 있어야 해."
"혹자는 그깟 기록과 역사가 무엇이 중요하냐 하겠지만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역사이기도 해요. 결코 좌시해서는 안될 문제지."
"학계에도 자꾸만 새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무거움 또한 존중해요. 신념을 위해서 때때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학자니까."
돈을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 무엇이 문제가 될까.
"너는 왜 도를 닦느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깨달음이란 아무것도 아니야. 밥만 안먹으면 다다를 수 있어."
"나는 번쩍하는 순간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부처? 그건 같잖은 착각이었어. 나는 부처는커녕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야. 왜 못 따라가는지 아나?"
"부처는 부처의 시대에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야. 만약 부처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도 황야에서 수십일 굶고 부처가 되었을까? 절대 안 돼."
"워낙 난 양반이니 뭐 다른 길을 찾아도 찾았겠지. 지금 세상에 다 비우고 다 버리고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놈아, 밥이나 처먹고 똥이나 싸면서 살아. 그러다가 심심하면 남이나 돕든지."
"부처나 예수나 결국 남을 위해 살라는 거잖아. 뭘 깨치려 들고 그래. 그러니까 설익은 놈들이 헛짓거리나 해대고 그러는 거야. 다 헛것이야. 나쁜 일 안하고 남 돕고 같이 잘 사는게 열반이야."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갈 터인데 뭘 자꾸 하려고 하고 그래?"
"그건 진혼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는가. 그나마 죄를 씻는 중인데 그걸 막으면 원한만 쌓일 뿐이지."
"기운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네. 사람이 잡아맬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
말 타고 지나는 십여리 길에 병풍을 온통 깔아놓고 그 내용을 외지 못하면 세상에 허명을 떨친 죄로 죽이겠다 했으나 병풍에 눈길조차 준 적없었던 사명당이 막힘없이 글을 모두 외었던 일화,
백 사람이 먹을 음식을 내어놓고 모두 먹지 못하면 성의를 무시한 죄로 죽이려 했으나 사명당은 맛있게 그음식을 모두 비웠다는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