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책 제목이《여수의 사랑》이라 그런지 초반부에 여수 앞바다의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비바람이 치는 날씨 탓인지 ‘울부짖는다‘, ‘빗물이 눈물처럼 내린다‘, ‘가슴이 찢어진다‘, ‘고통을 인내한다‘ 등의 표현들을 연이어 접하게 된다. 뒤에 나올 내용을 아직 알 순 없지만 이런 표현들이 무언가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어느정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읽다보니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온다. ‘정선‘과 ‘자흔‘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독자인 내가 예상했던 것 느낌이 어느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 ‘정선‘이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오고 끝내는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뭔가 역한 느낌이 있는 것인데.. 아직 읽지 않은 이야기 속에 숨겨진 그 이유들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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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온 ‘어둠의 사육제‘ 라는 이야기에선 영진, 인숙, 강명환 이렇게 세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이 중에서도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핵심 인물은 영진인데, 여기서 자세한 스토리를 일일이 다 말하긴 힘들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영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일말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뼈아픈 경험을 한다.

한편 강명환이라는 인물도 비운의 인물로 나오는데, 결혼 후 아내의 임신 5개월 차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뱃속의 태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게 되는 비극을 경험한다. 강명환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람은 나름 돈이 좀 있는 사람이었기에 강명환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하고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강명환은 그 받은 보상금으로 자신을 들이받은 사람이 사는 곳에 집을 얻어서 그들에게 자신의 울분을 표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강명환에게 가해를 입혔던 사람은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다가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강명환은 이 사람들을 끝까지 좇아가서 그들을 계속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이내 그 마음을 접는다. 대신 자신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판단한 영진에게 자신의 집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제안을 받은 영진은 강명환의 기구한 스토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강명환은 계속해서 영진에게 제안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복잡미묘하게 전개된다.


쓰다보니 본의아니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이 단순히 힘들다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굉장히 고통스러웠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삶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마음을 웬만큼 단단히 먹지 않고서는 삶을 견뎌내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해요? - P12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위경련을 해요. - P12

상관 말아요.
나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구요. - P12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 P28

사랑이여, 그대는 내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모든 것... _E. A. 포, 「하늘에 계신 그대에게」 - P33

난 어디에서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수 있어요. - P36

만일 그대가 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만 만일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달려와주오!
_가극 <카르멘> 중 「하바네라」 - P36

그제야 풀려있던 태엽이 감겼다는 듯이, 다 떨어진 배터리에 충전이 시작되었다는 듯이, - P37

젊다고 몸 함부로 굴리면 그 스트레스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진다구. - P38

사람이 좀 허투루 살아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 P39

자흔의 얼굴은 어느 사이엔가 의식을 비집고 돌아와 눈앞의 어둠 속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을 발설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 P39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P42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 P44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 P57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 P57

......저것 혼자서 살아난 것이 정말로 다행한 일인가 모르겄네. - P59

모두가 통화 중이었고,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모두가 바빴다. - P61

사는 곳과 옷차림이 남루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눈밭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잠결에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는 뜨뜻한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어서, 그 솜털 같은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뒤끝이 쓴 행복감에 깔깔한 입맛을 다시곤 했다. - P76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 P80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 P81

"언제나 나쁜 쪽으로만 흘러왔으니까." - P82

인숙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 전부였다. - P86

내 모든 것을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 P87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 P90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 P92

몸속의 혈관들은 모두 가문 저수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 P92

미술과 학생들이 석고 데생을 하다가 흰빛에 시력을 잃는 것처럼,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차츰 어둠 속의 사물들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 P94

천덕스러운 목소리로 웃어댔으며, 못 말릴 만큼 철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박힐 때까지 태연을 가장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츰 식구들은 내가 으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직장의 동료들도 나에게 무척 변했다고 말했으나, 그 변한 모습이 오히려 상대하기에 편한 듯한 기색이었다. - P95

거실과 통하는 미닫이문을 닫고 밤 불빛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하루 동안 가장했던 모든 천연스러움과 빈정거림은 흔적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 P96

세상 속에 있을 때에 나는 외로웠고 세상에서 돌아와 서면 더욱 그러했다. - P96

밤이 늦어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졸음이 밀려오면 스탠드를 꼈다. - P97

마지막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것도 마지막이다. - P98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P99

You are like a flower that grows in the shade; the gentle breeze comes and bears your seed into the sunlight, where you will live again in beauty.

_K, Gibran, "Of the Martyrs to Man‘s Law"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 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니,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 P100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 집의 많은 것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들을 그토록 괴로워했을까. 나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P112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 나 여기 숨 쉬고 있어, ・・・・・・ 여기도, 여기에도, 나도 여기서 밥 먹고 잠자며 살아가고 있어, 나도, 나도......
수천수만의 몸짓이 그 숫자만큼의 불빛으로 이슬처럼 맺혀있었다. - P115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 P115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멍울이 맺혀 있던 그 자리에 모호한 미련들이 뒤이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그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 P116

"저 수많은 불 켜진 창들 속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다는 생각, 그런 거요?" - P116

"나는 그 반대요. 밤늦게까지 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든다오." - P116

몹시 앓고 난 사람이 힘없이 내뱉는 몇 마디 안부 인사에 무거운 그리움이 깃들어 있듯이, 명환의 낮은 음성에는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던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 - P117

"살고 싶었어." - P119

".......나는 쓸 만한 월급쟁이였소. 죽음은 나를 다 먹어치우지는 못했지." - P121

넌 여전히 바보로구나. - P122

"나 혼자 걸어보았던 싸움은 나 혼자 싱겁게 이겨버리고 말았소. ...... 그런데 이상하지, 그 식구들이 떠나니까 난 혼자가 되어버렸소." - P123

"....아직도 사람이 선해가지고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나?" - P124

어둠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 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下血) 같았다. - P125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는 깨달았다.
그는 죽으려 하는 것이다.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제의를 거절해온 바로 그 기간만큼 그의 죽음은 연기되어온 것이었다. - P126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명환에게서 하루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어둠이 시시각각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방을 즉시 떠나야만 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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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9-13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편 몇 개 읽어서 이 책을 반은 읽은 것 같아요. 참 잘 썼다고 감탄했었죠.. 올해 안으로 완독 예정, 입니다. (이 페이퍼 보고 나서야 이 책이 생각났어요.ㅋㅋ)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9-13 23:01   좋아요 1 | URL
아ㅋ 그러셨군요. 저는 한강 작가님 책을 이번에 읽기 시작했는데, 몇 권 골라서 처음 나오는 부분들만 잠깐 읽어봤는데도 뭔가 사용하시는 어휘나 표현이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아서 이후에 어떤 내용들과 표현들이 나올지 기대가 되더라구요. 페크님도 남은 부분 잘 완독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