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위경련을 해요. - P12
상관 말아요. 나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구요. - P12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 P28
사랑이여, 그대는 내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모든 것... _E. A. 포, 「하늘에 계신 그대에게」 - P33
난 어디에서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수 있어요. - P36
만일 그대가 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만 만일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달려와주오! _가극 <카르멘> 중 「하바네라」 - P36
그제야 풀려있던 태엽이 감겼다는 듯이, 다 떨어진 배터리에 충전이 시작되었다는 듯이, - P37
젊다고 몸 함부로 굴리면 그 스트레스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진다구. - P38
사람이 좀 허투루 살아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 P39
자흔의 얼굴은 어느 사이엔가 의식을 비집고 돌아와 눈앞의 어둠 속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을 발설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 P39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P42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 P44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 P57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 P57
......저것 혼자서 살아난 것이 정말로 다행한 일인가 모르겄네. - P59
모두가 통화 중이었고,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모두가 바빴다. - P61
사는 곳과 옷차림이 남루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눈밭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잠결에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는 뜨뜻한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어서, 그 솜털 같은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뒤끝이 쓴 행복감에 깔깔한 입맛을 다시곤 했다. - P76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 P81
"언제나 나쁜 쪽으로만 흘러왔으니까." - P82
인숙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 전부였다. - P86
내 모든 것을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 P87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 P92
몸속의 혈관들은 모두 가문 저수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 P92
미술과 학생들이 석고 데생을 하다가 흰빛에 시력을 잃는 것처럼,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차츰 어둠 속의 사물들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 P94
천덕스러운 목소리로 웃어댔으며, 못 말릴 만큼 철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박힐 때까지 태연을 가장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츰 식구들은 내가 으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직장의 동료들도 나에게 무척 변했다고 말했으나, 그 변한 모습이 오히려 상대하기에 편한 듯한 기색이었다. - P95
거실과 통하는 미닫이문을 닫고 밤 불빛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하루 동안 가장했던 모든 천연스러움과 빈정거림은 흔적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 P96
세상 속에 있을 때에 나는 외로웠고 세상에서 돌아와 서면 더욱 그러했다. - P96
밤이 늦어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졸음이 밀려오면 스탠드를 꼈다. - P97
마지막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것도 마지막이다. - P98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P99
You are like a flower that grows in the shade; the gentle breeze comes and bears your seed into the sunlight, where you will live again in beauty.
_K, Gibran, "Of the Martyrs to Man‘s Law"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 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니,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 P100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 집의 많은 것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들을 그토록 괴로워했을까. 나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P112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 나 여기 숨 쉬고 있어, ・・・・・・ 여기도, 여기에도, 나도 여기서 밥 먹고 잠자며 살아가고 있어, 나도, 나도...... 수천수만의 몸짓이 그 숫자만큼의 불빛으로 이슬처럼 맺혀있었다. - P115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 P115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멍울이 맺혀 있던 그 자리에 모호한 미련들이 뒤이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그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 P116
"저 수많은 불 켜진 창들 속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다는 생각, 그런 거요?" - P116
"나는 그 반대요. 밤늦게까지 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든다오." - P116
몹시 앓고 난 사람이 힘없이 내뱉는 몇 마디 안부 인사에 무거운 그리움이 깃들어 있듯이, 명환의 낮은 음성에는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던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 - P117
".......나는 쓸 만한 월급쟁이였소. 죽음은 나를 다 먹어치우지는 못했지." - P121
"나 혼자 걸어보았던 싸움은 나 혼자 싱겁게 이겨버리고 말았소. ...... 그런데 이상하지, 그 식구들이 떠나니까 난 혼자가 되어버렸소." - P123
"....아직도 사람이 선해가지고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나?" - P124
어둠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 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下血) 같았다. - P125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는 깨달았다. 그는 죽으려 하는 것이다.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제의를 거절해온 바로 그 기간만큼 그의 죽음은 연기되어온 것이었다. - P126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명환에게서 하루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어둠이 시시각각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방을 즉시 떠나야만 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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