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맥락 없고 단편적인 정보를 직소퍼즐처럼 끼워맞춰 지도의 형태로 완성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시각적인 사진기억력뿐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서번트 증후군에는 아무리 길고 복잡한 곡이라도 한 번 들으면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재현할 수 있는ㅡ연주하거나 사보할 수 있는ㅡ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 P494
그렇지만 내 기억이 나중에 변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앞뒤 순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소년이 그린 지도에 맞추어 내 기억이 미묘하게 바뀌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 - P494
내 주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막연한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떤 힘에 의해 어딘가로 조금씩 이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최근에 시작된 일인지, 아니면 제법 예전부터 서서히 이어져온 일인지는 알 수 없다. - P495
내가 가까스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아마도 ‘저쪽‘과 ‘이쪽‘ 세계의 경계선 근처이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반지하 방과 마찬가지다.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니다. 흘러드는 빛은 엷고 흐릿하다. 나는 그렇듯 어슴푸레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장소에,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어느 쪽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 P495
그 지도가 내 마음을 미세하게 떨게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그것은 내 마음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덜덜 떨도록 만들었다. 지진이 멈추지 않는 땅 위의 젤리 상태 물체처럼. - P496
그 지도를 바라보는 사이, 내 마음은 알게 모르게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다. 눈을 감으면 나는 실제로 그곳을 흐르는강물의 소리를 듣고, 밤꾀꼬리의 애달픈 우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지기가 뿔피리를 불고, 단각수들의 발굽이 달각달각 돌길을 밟는 메마른 소리가 거리를 감쌌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소녀의 노란색 레인코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세계의 귀퉁이를 맞비비는 듯한 소리다. 현실이 내 주위에서 살짝 삐걱이며 미세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ㅡ만약 그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말이지만. - P496
"사나홀, 그냥 조용히 누워 있는다." "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 P498
실제로 충전과 비슷한 원리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능력(거의 인지를 초월한 능력이다)을 너무 활발히 가동한 나머지 신체 시스템의 용량을 넘어버린 건지도. 전력 과부하를 감지한 배전반 브레이커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것처림. 그러면 한동안 누워서 오버워크 상태의 열원을 식히고, 신체 기능의 자연 회복을 꾀할 필요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어쩌면(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 도시의 지도를 작성한 것이ㅡ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그 작업이ㅡ이번 시스템 다운의 원인 중 하나인지 모른다. - P498
나는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오전의 햇살이 흘러드는 밝은 도서관 카운터에서) 소에다 씨에게 서슴없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게 과연 타당한 행동인지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큰맘먹고 물어보기로 했다. 최대한 간결한 표현을 사용해서. "저기, 소에다 씨는 그 두 사람이 고야스 씨가 돌아가신 후에도 만난 것 같습니까?" - P500
지도는 저쪽 세계에서 내가 보았던 정경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그 지도는 특수한 환각 장치처럼 내 기억을 활성화하며 세부를 정밀하고 입체적으로 발굴해갔다. 들이마신 공기의 질감, 희미하게 감돌던 냄새까지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 P502
아주 심플하게 그린 지도였지만 아무래도 거기에는 무언가특수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흘 내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도를 앞에 두고 이곳이 아닌 세계를 떠돌았다.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점점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깊이 그 환각 장치(같은 것)에 빠져 있었다. 순수한 환상을 얻기 위해 아편을 상용하는 18세기의 탐미주의 시인처럼. 내 손에 들런건 얇은 A4용지 한 장에 볼펜 같은 것으로 그린 간단한 지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 P502
의문은 많고 확실한 대답은 보이지 않는다. 의미를 모를 일 투성이다. 눈앞에 수없이 늘어선 수수께끼의 문, 그러나 열 수 있는 열쇠는 수중에 없다.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혹은 어렴풋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지도에 예사롭지 않은 특수한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는 점 정도다. 단지 내가 과거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수수께끼 같은 장소의 지도에 그치지 않고 다가올 세계의 지세를 보여주는 도면으로 기능하는 것 같기도 했다―지도를 보면 볼수록 나는 그 안에 개인적으로 의탁된 무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P503
어느 것이나 비교적 소소한 차이점이고 도시를 구성하는 큰 얼개에 연관된 것도 아니니 굳이 고칠 필요는 없을 테지만(게다가 내 기억이라는 것도 어디까지 맞을까?), 소년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잡아내어 정확하게 세부를 표현하는 걸 무엇보다 중시할 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또한 ‘어떠한 표현 행위에도 비평이 필요하다‘는 일반 원칙도 있다. 그에 더해 내게는 어떤 형태로든 소년과 접촉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쪽으로 서브된 공은 받아 쳐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다. - P503
"그런데 그애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던가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서간집이에요." 소에다 씨는 곧바로 대답했다. "재밌을 것 같네요." 소에다 씨는 그 말에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눈썹을 살짝찡그렸을 뿐이다. 그녀는 말보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 P505
기묘한 표현인지 몰라도, 고야스 씨는 생각해보면 내 주위에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 내게 생생한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이 마을뿐 아니라 지금껏 내가 지내온 모든 장소를 통틀어. - P507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인생을ㅡ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ㅡ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 상당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 P507
늘 그렇듯 오래된 재즈가 작게 흘러나왔다. 폴 데즈먼드가 알토색소폰을 연주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곡에서도 데즈먼드가 솔로를 연주했다. "유 고 투 마이 헤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508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도시에서는 음악을전혀 듣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허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음악을 듣고 싶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음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다. 어째서일까? - P509
요즘은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구글에서 검색하면 누구나 십초도 안 되어 간단히 알 수 있다. 소년은 그것을 단 일 초만에 알아맞힐 수 있다지만, 서부극의 결투도 아닌데 십 초와 일 초 사이에 얼마나 실리적인 차이가 있을까? 나는 소년을 위해, 그 사실을 조금 쓸쓸하게 여겼다. 이 세상은 날로 편리한, 그리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간다. - P512
"좀 신경쓰이는데,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수심이가득하다는 얘기, 설마 정말로 그런 건 아니겠죠?" "괜찮아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나는 말했다. 확실히 보장할 순 없지만, 아마도. - P513
입은 옷이 달라져도 행동 패턴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항상 앉는 열람실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건 활짝 핀 꽃에서 한 방들도 남김없이 꿀을 빨아들이려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꽃에게나 나비에게나, 서로 유익한 행위다. 나비는 영양을 얻고 꽃은 교배에 도움을 받는다. 공존공영,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훌륭한 점 중 하나다. - P513
그렇다. 소년이 그린 도시 지도에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자극하는ㅡ혹은 혼란스럽게 하는ㅡ특수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A4용지에 검은색 볼펜으로 그린 단순한 지도만은 아니었다. 보는 이의 마음속(평소에는 안쪽에 잘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기동력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은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이쪽 세계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ㅡ아마 ‘현실 세계‘라고 불러야 할 곳에. 그럼에도 내 시선은 알게 모르게, 새어드는 바람에 한데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책상 위에 놓인 그 커다란 서류봉투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 P514
이따금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머리를 식혔다. 바다거북이나 고래가 호흡을 위해 주기적으로 수면에 얼굴을 내밀듯이. 그러나 이렇게 추운 겨울날ㅡ 게다가 방안도 전혀 따뜻하지 않은데ㅡ왜 바깥공기까지 맞으며 머리를 식혀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겐 꼭 필요한 행위였다. 내가 지금 ‘이쪽 세계‘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 P515
손을 뻗어 머핀을 집어들더니 그대로 크게 베어물었다. 포크도 쓰지 않았다.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접시를 받치지도 않았다. 당연히 가루가 부슬부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소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청소하면 그만이다. - P521
입가에 푸른 얼룩이 묻었지만 그것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렴 페인트가 묻은 것도 아니다. 그저 블루베리 과즙이다. 나중에 티슈로 닦으면 그만이다. - P521
어쨌거나 나는 전부 그대로 두었다. 이 소년 앞에서는 뭐든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블루베리 머핀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손으로 들고 먹어준 것만으로도, 나와 그의 관계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P522
"머핀이 꽤 맛있지?" 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입술에 묻은 블루베리를 혀로능숙하게 핥았을 뿐이다. 고양이들이 식후에 흔히 그러듯이. - P522
소년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몫의 빈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홀로 데크에 서서 해가 떨어진 뒤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고독한 선객처럼. - P523
지금 책상 위에 놓인 건 지도가 든 봉투뿐이었다. 마침 고야스 씨가 항상 남색 베레모를 내려놓던 자리다. - P523
"네가 그린 지도를 봤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 "무척 정확하더구나. 거의 실물 그대로야. 감탄했어..... 아니, 솔직히 놀랐어. 내가 거의라고 한전, 정확한 진짜 형태는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건 물론 네 탓이 아니지." - P524
"나는 말했다. "한때 그 도시에 살았어. 이 지도에 그려진 도시 말이야. 그곳에서도 역시 도서관에서 일했어. 하지만 그도서관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지. 단 한 권도. 과거에 도서관이었던 곳・・・・・・ 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내게 주어진 일은, 책 대신 서고에 쌓인 ‘오래된 꿈‘을 매일 밤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이었어. ‘오래된 꿈‘은 큰 달걀 같은 모양이야. 그리고 하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지. 크기는 대략 이 정도." 나는 양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보였다. 소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정보로서 수집했을 뿐이다. - P524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살았는지는 나도 몰라. 계절이 바뀌긴 했지만 그곳에서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별개로 흘렀던 기분이 들어. 어쨌거나 그곳에서 시간은 전혀 의미가 없어. 아무튼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매일 그 도서관을 오가며 ‘오래된 꿈‘을 읽었어. 얼마나 많은 ‘오래된 꿈‘을 읽었는지 정확한 수를 기억하진 못해. 하지만 숫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왜냐하면 오래된 꿈은 거의 무한히 있는 것 같았거든. 내가 일하는 시간은 해가 진 뒤였어. 해질녘에 시작해서 대개 자정이 못 되어 작업을 마쳤지. 정확한 시간은 몰라. 그 도시에는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P525
소년은 반사적으로 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각이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에게 시간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모양이었다. - P525
"‘꿈 읽는 이‘가 되려면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했고, 도시에 들어갈 때 문지기가 그 처치를 해주었지." - P525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입을 다문 채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건 지금 여기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테다. - P526
"하지만 역병은 언젠가 끝났을 텐데."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어떤 역병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아. 그런데도 벽은 변할없이 엄중하게 폐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아무도 안에 들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아. 그 이유는 뭘까?" - P527
"끝나지 않는 역병."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게 대체 뭐길래?" 역시 대답은 없다. 나는 스스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수수께끼 문답을 하는 기분이다. 심지어 매우 어려운 수수께끼다. 문제의 심오함에 비해 힌트가 턱없이 부족하다. 어쨌거나 서브된 공은 상대편 코트로 쳐내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만약 이걸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 P528
"혹시, 영혼이 앓는 역병 같은 것일까?" 소년이 다시 끄덕였다. 꾸벅, 하고 확실하게. - P528
소년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스도 노도 아니다. - P529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큰 소리는 아니다. 메마르고 간결한 소리ㅡ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소리. 두 번, 조금 뜸을 들이고 다시 두 번. "네."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 P529
"너는 그 도시에 가기를 원하는구나." 나는 확인하듯 말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사람들에게 그림자가 없고, 도서관에는 한 권의 책도 없는 그 도시에." 소년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처럼. - P531
"만약 그쪽에 가면 이쪽에는 있을 수 없게 되어도?" 소년이 다시 한번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소년이 문을 통과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곳은 아마 소년에게 ‘페퍼랜드‘일 것이다. 영화 <옐로 서브마린>에 나오는 컬러풀한 이상향, 페퍼랜드. 이 열여섯 살 소년은 자신을 받아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보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세계로 이행하기를 원한다ㅡ마음속 깊은 곳에서, 더없이 진지하게. 소년과 마주앉아 있자니 얼마나 진지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 P531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저는 그럴 수 있어요." 소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너는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소년의 말을 자동적으로 되풀이했다. "그곳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언제까지나." - P532
그렇다. 이 소년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도서관에서 매일 행하는 일과와 거의 똑같은 생활이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그 도서관 안쪽에는 그가 읽어야 할 ‘오래된 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높게 쌓여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마도 무한히. 또한 그 제각각의 모든 꿈은 세계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도시에 가야 해요." 소년은 아까보다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 P532
그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페퍼랜드가아니다. 페퍼랜드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생활을 한다. 즐거운 음악이 흐르고 컬러한 꽃이 만발했다. 1960년대 드러그 컬처의 냄새가 어렴풋이 감도는 한때의 몽상 속 세계다. 그러나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그렇지 않다. - P533
그곳에서는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짐승들이연이어 목숨을 잃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난하고 과묵하게살아간다. 간소하고 적은 식사에 만족하며, 의복은 낡고 해질때까지 입는다. 책도 없고 음악도 없다. 운하는 말라붙었고, 많은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사는 공동주택은 어두컴컴하고 다 쓰러져간다. 개도 고양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생물이라면 벽 위를 넘나들 수 있는 새 정도다. 이상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세계다. 소년은 그 도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 P534
나는 그 얘기를 소년에게 자세히 해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아마 그런 사정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감수하더라도 그 도시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면밀히 고심한 끝에 내린, 변경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다. 소년의 망설임 없는 얼굴을 보니 그 결의가 얼마나 굳은지 알 수 있었다. - P534
"그 도시에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해. 그 두 가지가 문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이야. 떨어져 나간 그림자는 머지않아 목숨을 잃을 테고, 그림자가 죽으면 넌 다시는 그 도시에서 나올 수 없어. 그래도 상관없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세계의 누구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소년은 소리 내어 말했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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