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과 ‘그 도시‘를 왔다갔다 했던 ‘나‘에게 고야스 씨는 p.444에 밑줄친 부분에서 ‘당신의 진정한 의지‘ ,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이라는 말들을 써가며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의지와 내가 마음에 진정으로 원하는 어떤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얘기한다.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은 다른데 가있는데, 실제 내 몸과 행동은 그 마음과 관계없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들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어떤 현실적인 이유나 기타 여건들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내 과도한 욕심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마음 속으로 추구하면서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감을 느끼고 그냥 좌절한 채 각종 좋지 못한 것들로 그러한 괴리감이나 공허함들을 채워나가면서 점점 더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흔히들 인생에는 정답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현실에서 이루어 내며 살아가는게 성공적인 인생이라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여기 끄적인 것들이 이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생뚱맞은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님의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나 어떤 의미같은 것들을 찾아보려는 과정 자체가 나를 포함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설령 내가 생각해낸 어떤 메시지나 의미가 작가가 의도한 것과 좀 다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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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계속 읽으면서 자신이 100% 원하고 바라던 것들이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 뒤틀렸을 때, 거기에 대한 대안을 찾아서 거기에 발맞추어 살아가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Plan B‘ 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누구나 자신의 Plan A 대로 되기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디 인생이라는게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이 책의 인물들도 현실을 사는 우리 인생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했던대로 인생길이 순탄하게만 풀려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아남아있는 이상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살아내야하지 않겠는가.

과연 나의 Plan A는 무엇이었고 또다른 Plan B 는 혹은 Plan C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오늘의 독서다. 참 이 작가님은 소설 내용자체도 물론 흡입력이 있지만, 독자인 나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해보게 만드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 때마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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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도서관에서 책을 엄청 열심히 보는 한 소년에게 ‘나‘의 시선이 간다. 처음 보는 소년이라 사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이 있는 친구였다. 근데 이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모르게 ‘나‘의 어릴적 모습이 오버랩 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건 또 뒤에 이어질 내용과 이어지는 복선인 듯한 냄새가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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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인 ‘나‘는 위에서 말한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일정한 반복적인 패턴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타산지석(?) 삼아서 ‘나‘도 ‘나‘의 행동 패턴을 돌아본다. 돌이켜보니 자신도 행동 양식이 그 소년과 좀 다르다 뿐이지 어떤 일정한 습관? 루틴? 이런 것들을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언의 깨달음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의 복선 같은 것일수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툭 던진, 얼핏보면 무심해보이는 메시지 같은 것들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생각들을 자꾸 해보게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간혹 이 책에 리뷰를 쓰신 분들 중에는 내용이 애매모호한 느낌이 든다면서 약간은 비판적인 논조로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독자인 나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약간의 불명확한듯한 암시(?)가 나를 포함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하여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추측하거나 어떤 의미들을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어줘서 오히려 좋다고 느껴졌다. 뭐 읽는 사람마다 보는 눈과 생각들이 다를 수 있기에 비판적으로 보시는 분들의 의견도 그 자체로 존중할 필요는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분들과는 생각의 결이 약간은 다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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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뭔가가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칫 ‘스포‘가 될 수 있기에 내용적인 것에 대해 추가적으로 말하진 않겠다.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확장해서 끄적여 본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그 존재 목적 혹은 이유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현실로 돌아와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적 혹은 이유가 사람마다 자기가 속한 어떤 집단이나 조직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위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관계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가 때로 하찮고 미미해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미 그렇게 잘 살고 계신분들은 그대로 쭉 잘 살아가시면 될 것이고, 자존감이 낮아져있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분들일지라도 존재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분들이니 삶을 내려놓지 말고 어떻게든 삶의 이유나 목적을 찾아서 거기에 맞게 삶을 이어나가시길 바라는 바이다.

"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 의지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 목적은 어디쯤인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실체 없는 개인적인 영혼에 지나지 않고, 죽음으로 인해 특별한 예지를얻은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당신 이야기에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사실 그 모두가 당신의 마음이 원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당신 마음이(당신은 모르는 곳에서) 그러기를 원했다―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 P444

"요컨대 제 의지를 초월하는 보다 견고한 어떤 의지라는 게,
외부가 아니라 제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네. 물론 미흡하고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당신은 필시 자신의 의지로 그 불가사의한 도시에 들어갔고,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이쪽으로 돌아온 겁니다. 당신을 튕겨낸 용수철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특수한 힘일 테지요. 마음속 밑바닥의 강한 의지가 그 엄청난 왕래를 가능케 했습니다. 스스로의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 P445

"고야스 씨는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아뇨, 그저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썩 믿을 만한 게 못 될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저는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사후의 영혼에 피부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네, 충분히 일어날 수있는 일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일어나진 않아요. 하지만 언젠가 어디선가는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와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 P445

"그녀는 어느 날 작별의 말도 없이 조금의 암시조차 없이 제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후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어요. 연락 한 줄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벌써 중년의 영역에 발을 들였지요. 그런 인간이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기억을 찾아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간다ㅡ과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 P447

"결국 저는 그 백 퍼센트의 마음이 다시 한번 찾아와주기를 지금껏 기다렸나봅니다. 혹은 과거에 제게 그 마음을 가져다 주었던 그 사람을." - P448

"아내에 대한 사랑에 필적할 만한 감정을 느끼게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용모가 뛰어난 분도, 인품이 훌륭한 분도, 죽은 아내가 그랬던 것만큼 제 마음을 떨리게 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스커트를 입게 되었지요. 보수적인 산간 동네다보니, 괴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별난 남자에게 혼담을 내미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P448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 P449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449

"아내가 한 마디 말 없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제 마음은 깊은상처를 받았습니다. 남모를 상흔이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마음의 중심까지 가닿는 중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죽지 않고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이 구제할 길 없는 치명상이란 걸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저는 이미 삶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계속 살아간다, 라는 레일이 제 앞에 깔리고 만 겁니다."
고야스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 P450

"그때를 경계로 저는 그전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 그 무엇에도 열정을 가지지못하게 된 겁니다. 제 마음의 일부가 타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음에 입은 치명상으로 저라는 인간이 이미 반쯤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후 인생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이 도서관뿐이었습니다. 이 작고 개인적인 도서관이 있었기에 지난해의 그날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네, 저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당신이 마음에 입은 상처를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주제넘은 말인지도 모르지만, 마치 제 일처럼 말입니다." - P451

"당신은 그런 사정을 충분히 아시고서 저를 이 도서관 관장으로 선택한 건가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첫눈에 보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 도서관에서 제 뒤를 이어야 할 사람이란 걸요. 그도 그럴 게 여긴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니까요. 그저 많은 책을 모아둔 공공시설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 P451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 P452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ㅡ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는다? 대체 어디서 낙하한다는 걸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 P452

이 소년은 이른바 ‘캘린더 보이‘가 아닐까. 과거나 미래의 언제든 날짜만 듣고 무슨 요일인지 순식간에 알아맞히는 특수 능력이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는 ‘서번트 증후군‘으로 불린다. 영화 <레인맨>에 나왔던 인물도 그중 하나였다. 지적장애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수학이나 예술 분에서 종종 비범할 정도로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다. - P457

내 생일이 정말 수요일인지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싶었지판 도서관에 컴퓨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그날 퇴근 후 집에 있는 컴퓨터로 찾아봤더니 내가 태어난 날은 정말로 수요일이 맞았다). - P457

"그런데 생일이 무슨 요일이던가요?"
"수요일." 내가 말했다.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소에다 씨가 말했다. 이노래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더 구스의 한 소절이에요. 월요일의 아이는 아름답고 화요일의 아이는 품위 있고,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 P458

사진기억력이라고 하죠, 책을 읽으면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하는데, 받아들인 정보량이 워낙 방대하고 자세하다보니 실용적인 수준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 P459

"하지만 저애는 고등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학교 대신 이 도서관을 오가며 서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치우고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애한테는 이곳이 학교인 셈이에요."
"그리고 읽은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한다?"
"이를테면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을 읽었다고 칩시다.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을 그대로 암송할 수 있어요. 꽤 긴 소설이지만, 상관없이 전부 기억해버려요.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고 인용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책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호소하는지, 혹은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건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 P461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특수한 능력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하죠. 특히 이렇게 작고 보수적인 마을에서 이질적인 것. 평범하지 않은 것은 배척되기 마련이고, 저애랑 엮이는 걸 꺼리는 이들이 많아요. 전염병 걸린 사람을 피해다니듯이. 적어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죠. 슬픈 일이에요. 알고 보면 무척 얌전한 아이고, 생년월일을 물어보고 다니는 걸 빼면 누굴 귀찮게 하지도 않는데." - P462

"하지만 어쨌거나 지식욕 자체는 의미있고 귀중한 것이고, 도서관은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도서관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 P462

"게다가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한테 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문제라면, 어떤?"
"한 아이에게 흥미를 품고 졸졸 따라다녔어요. 특별히 예쁘거나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 여자아이의 어떤 면에 엄청나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죠. 따라다닌다고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말도 걸지 않고, 그저 가만히 뒤를 쫓기만 했어요. 바싹 붙지도 않고, 조금 떨어져서. 그래도 당하는 사람입장에선 당연히 기분이 나쁘죠. 여자아이 부모님이 교장 선생님을 통해 항의하면서 약간 문제가 됐습니다. 이 마을 사람은 모두 그 일을 알고 있고요. 그러니 자기들 아이가 저애 가까이 가는 걸 반기지 않아요." - P464

그리고 그 소년이 내게 말을 건 것도 생년월일을 물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번 생년월일을 알고 나면(이어서 요일을 맞히고 나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 충족되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열람실 말고 다른 장소에서 내가 그 옐로 서브마린소년을 본 건 어느 월요일, 도서관 휴관일 아침이었다. - P465

그들은 어느새 내게 신기할 만큼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생전의 그들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 P466

어쩌면 전에도 했던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괘념치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묘비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묘비는 내내 말이 없었다. 돌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도바꾸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건 나뿐인지도 그래도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 도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 P468

두꺼운 구름이 바람에 실려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그런 구름을 보고 있으면 세계가 돌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구는 천천히 착실하게 회전하고, 시간은 쉼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 P468

설령 소년이 내 이야기를 한 마디도 남김없이 들었다 한들불리할 게 있을까? 만약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말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꿈같은 이야기로 정리될 것이다. 환상적인 종류의 픽션으로, 그리고 나는 ‘몽상적 경향이 있는 인물‘로 분류될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나 정밀한 사진기억력을 가진 소년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들렸을까? 그의 마음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P469

나는 그 소년에게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고야스 씨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여태껏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추운 겨울날 아침, 마을 외곽의 절 묘지까지 일부러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 P470

뒤뜰로 향해 고양이 가족을 관찰했다. 고양이는 비바람을 피해 오래된 툇마루 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누군가가 골판지 상자와 낡은 담요로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어미는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 않아서 (도서관 직원들이 매일 먹을 것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도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딱히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새끼들은 후각에 의지해 꼬물꼬물 어미의 젖 근처로 모여 있고, 어미는 사랑스럽다는 듯 실눈을 뜨고 새끼들을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질릴 줄도 모르고 구경했다. - P471

그리고 새삼 떠올렸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ㅡ그녀가 일찍이 가르쳐주었듯ㅡ개나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외뿔 달린 짐승들은 있었다. 밤꾀꼬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동물은 본 적이 없다(하긴 밤꾀꼬리도 소리만 들었지만). 아니, 동물만이 아니다. 벌레도 한 마리 보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 도시에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 없으면 안 되는 것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리고 짐작건대 나 역시 그 도시에 필요한 존재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 P471

그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월요일 아침 일찍 고야스씨의 무덤을 찾았을까? 그저 예의를 위한 성묘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내 본능이 말했다). 어쩌면 알고 있을까? 고야스 씨의 영혼이 아직 생사의 경계에 해당하는 세계에 머무르면서 이따금 생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 P472

나는 소에다 씨에게 재작년 봄부터 기록해온, 이 도서관에서 그애가 읽은 책 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했다. 놀랄 만큼 많은 권수, 놀랄 만큼 많은 분야의 책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 모토오리 노리나가, 프란츠 카프카, 이슬람교 경전, 유전자 해설서, 스티브 잡스 전기, 코넌 도일의 《주홍색 연구》, 원자력 잠수함의 역사, 요시야 노부코의 소설, 작년도 전국농업연감,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샤를 드골의 회고록까지. - P473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나의 열여섯, 열일곱 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나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걸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들을 필사적으로 독파하고, 잡다한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되는 지식이고 무엇이 쓸모없는 지식인지 알아보는 기술이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 P473

스케일이 장대할 뿐 그 소년이 하고 있는 일도 근본은 같을지 모른다. 젊고 건강한 지식욕은 지칠 줄 모른다. 그러나 아우리 많은 정보를 욕심껏 자기 안에 욱여넣어도 도무지 충분할 순 없다. 세계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양의 정보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개인의 수용량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바닷물을 양동이로 퍼내는 거나 마찬가지다ㅡ양동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 P474

"읽다가 재미없어서 중단한 책은 없나요?" 나는 물었다.
"아뇨, 제가 알기로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은 전부 끝까지 읽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두진 않아요. 그애는 보통 사람처럼 재미있다 없다, 흥미가 생긴다 아니다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 책을 취사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그애에게 책은 구석구석까지,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채집해야 하는 정보가 담긴 그뜻이에요. 가령 보통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재미있다 싶으면 그후 크리스티 작품을 몇 권 더 이어서 읽곤 하잖아요. 하지만 그애는 그렇지 않아요. 책을 선택하는 데 계통이란 것이 없죠." - P474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새끼고양이들이 없어진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소에다 씨도 그건 알지 못했다. 그가 새끼고양이들의 소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있기 때문이다. 그저 매일 뒤뜰에 고양이 가족을 보러 가던 습관이 없어졌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 P480

소년은 노란 잠수함 요트파카를 입지 않은 날은 영화 《옐로 서브마린》나오는 다른 캐릭터가 프린트된 갈색 요트파카를 입었다. 푸른 얼굴에 분홍빛 귀, 몸에 갈색 털이 난 기묘한 생물이다. 나도 영화를 봤지만 그 캐릭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노웨어 랜드에 사는 노웨어 맨이다. 존 레넌이 그의 주제가를 불렀다. 하지만 도저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옐로 서브마린 캐릭터‘를 검색하고, 그 파란 얼굴의 기묘한 등장인물이 ‘제러미 힐러리 불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니스트이자 식물학자, 고전학자, 치과의사, 물리학자, 풍자작가・・・・・・ 뭐든지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닌 남자. - P481

소년은 날마다 거의 같은 옷만 입었다. ‘노란 잠수함‘ 파카 아니면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 파카.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빛바랜 청바지에 복사뼈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농구화, 다른옷차림은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소에다 씨 말에 따르면 집이 유복한 편이고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몹시 사랑한다 하니, 깨끗한 새 옷을 사주는 일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옷들은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스스로가 원해서 매일 입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새 옷을 입는 걸 완강하게 거부해서일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를 일이다. - P482

매일 정해진 행동 패턴을 하나하나 정확히 짚어가며 답습하는건 그에게 분명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행위의 본질이나 방향성보다 반복 자체가 목적인지도 모른다. - P483

소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나는 조금 쓸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묘비 뒤에 숨어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기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아니, 나는 내 이야기를 고야스 씨뿐 아니라ㅡ오히려 그 이상으로ㅡ소년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막연히 그렇게느꼈을 뿐이다. 순수한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이야기를 듣고 소년이 어떤 감상을 가질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484

겨울의 태양은 온 힘을 다해 빛과 온기를 지상에 던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세계는ㅡ사람들, 고양이들, 갈 곳 없는 영혼들은ㅡ더 많은 빛과 온기를 원하는 것이다. - P484

나는 여느 때처럼 묘지에서 삼십 분쯤 시간을 보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역 근처 이름 없는 ‘커피숍"에 들러 뜨거운 블랙커피로 몸을 녹이고, 마찬가지로 블루베리 머핀을 먹었다. 조간신문을 읽으면서 귓결로는 벽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에롤 가너의 <파리의 4월>을 들었다.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아무렴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 생활도 같은 일의 되풀이가 아닌가.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 P485

"제 영혼이 이런 형체를 가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때가 되면 결국 다 사라질 겁니다." 고야스 씨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영혼은 그 ‘일시적인 기간‘을 경과해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무로 빨려들어가, 두번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P486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살아 있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와 조금 다른 형이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묘하게 고요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 슬픔에는 아픔이 없다. 그저 순수하게 슬플 뿐이다. 그의 한 단계 더 나아간 죽음을 가정함으로써, 무가 확실히 존재함을 전에 없이 가깝게 실감할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정말로 만져질 것처럼. - P487

나와 소에다씨는 고야스 씨라는 ‘부재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 비밀을 공유하는 공모자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 P488

그후 한동안 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바로 열어볼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러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ㅡ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종류의준비여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열지 않는 편이 좋다. 잠시 이대로 묵히는 편이 좋다. 열이 너무 오른 무언가를 식히듯이, 본능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게 그러라고 일러주었다. - P490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의 경과였다. - P490

나는 그 흰색 인쇄용지를 봉투에서 조심스레 꺼냈다. 종이에는 검은색 잉크로 어떤 그림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글은 없다. 나는 그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딱딱한 무언가로 등을 힘껏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이 내 몸안에서 모든 논리를, 모든 맥락을 말끔히 내쫓아버렸다. 방 전체가 크게 출렁이는 것 같은 물리적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균형을 잃고 양손으로 책상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잠시 말을 잃고, 생각이 나아갈 길을 잃었다. - P491

그 종이에 그려져 있었던 건,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를거의 정확하게 묘사한 지도였다. - P491

그 지도를 앞에 두고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이,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지도였다.
콩팥처럼 생긴 가장자리 (아래쪽이 움푹 파였다), 완만하게굽이치며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아름다운 강 불길하고 깊은 웅덩이를 이루는 끝자락, 유일한 출입구인 문. 그 안쪽의 문지기 오두막, 강에 걸린 오래된 돌다리 세 개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이 말라붙은 운하, 바늘 없는 시계탑, 그리고 한 권의 책도 놓여 있지 않은 도서관.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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