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럽지만 언제든 원할 때 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기회는 제한되어 있어요. 시간도 결코 길지 않고요. 그러니까 언제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른답니다." - P357
고야스 씨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성경? 기독교의 성경 말인가요?" "네, 바이블 말입니다." "아뇨,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도가 아니라서." "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P358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네, 저는 옛날부터 이 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 있지 않습니다." - P359
"당신은 아직 이렇게 살아 계시지요." 고야스 씨가 말했다. "그러니 부디 목숨을 소중히 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 검은 그림자가 달려 있으니까." - P359
나는 큰맘먹고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고야스 씨, 사실 저는 모든 주민에게 그림자가 없는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도서관 일을 했습니다. 이것과 똑같이 생긴 장작 난로가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습니다." - P359
고야스 씨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반지하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고야스 씨가 사라지고 나니 방금 전까지 그가 여기 있었던 것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이 덮쳐왔다. 나는 여기에 계속 혼자 있었고, 그저 막연한 망상에 잠겼던 게 아닐까. 그러나 환상도 망상도 아니었다. 책상 위에 남은 빈 찻잔 두 개가 그 증거다. 한 잔은 내가, 다른 한 잔은 고야스 씨가ㅡ혹은 그의 유령이 (혹은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그의 의식이)ㅡ마셨다. - P360
"좀 묘한 말이지만, 제가 고야스 씨의 됨됨이를 가까이서 좀더 밀접하게 알게 된 건 오히려 돌아가시고 나서였어요. 살아 계실 때는, 뭐랄까, 항상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셨거든요. 차갑다거나 젠체한다는 건 절대 아니고, 저희를 대하는 태도는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주위의 현실적인 것들에 어째 관심을 두지 않는달까,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어요." - P370
"하지만 돌아가신 뒤로는, 즉 영혼만 남고 나서는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심을 담아 말씀하시더군요. 성격도 그전과 달리 활기차고 인간미 있게 바뀐 것 같았고요. 죽은 뒤에 인간적으로 더 활기차졌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까지 내면에 소중히 감추고 있던 것이 죽음과 함께 밖으로 드러난게 아닐까요." - P370
"생전의 고야스 씨 마음을 가리고 있던 단단한 껍데기 같은것이 사라졌다." "네. 정말로 그런 느낌이었어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마치 봄이 찾아와 쌓인 눈이 녹고, 그 아래서 여러 가지가 차례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 P370
결국 인생은 대부분이 타협의 산물 아닌가. - P376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열렬한 사랑보다는 오히려 종합적인 인간 평가에 가까웠다. 그녀가 인생의 파트너로 원한 건 불타는 정열이 아니라 부침이 적고 안정된 인간관계였다. - P379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ㅡ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ㅡ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ㅡ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380
그건 그에게 싹튼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자, 지금껏 해보지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망설임과 울분이 사라지고 거의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모든 야심을, 혹은 몽상과도 닮은 희망을 접고, 지방 소도시의 중견 양조회사 4대 경영자로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P380
그것이 고야스 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다. 그 아이가 나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계승해준다면. - P382
어쨌거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 길에 아무리 큰 슬픔이 있더라도, 상실과 절망이 기다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P389
어쨌거나 전부 일어날 일이라서 일어난 거야. 누구의 탓도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우연히도 여러가지가 운 나쁘게 한꺼번에 겹쳐버린 거야.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이제 와서 하나하나 따져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 - P391
물론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잇따라 잃은 일, 마음에 깊이남은 그때의 상처가 이른바 ‘기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리란 건 누구나 수월히 상상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평범한 생활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신기한 일이라고 할까요, 베레모에 스커트라는 별난 차림을 한 뒤로 고야스씨가 예전과 확 달라져서 매우 명랑한 성격이 된 것 같았어요.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이 활짝 열리고, 어둡고 습하던 방에 봄볕이 가득 흘러드는 것처럼요. - P402
"피리 부는 사나이는 마지막에 가서 모든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버리죠. 맞나요?" "맞습니다." 소에다 씨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하멜른 마을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쥐를 잡아달라고 부탁하고는 일이 끝나고도 약속했던 보수를 치르지 않았어요. 그는 그 대가로 마법의 피리를 불어 마을 아이들 모두를 흘려 깊은 동굴로 이끌고 가버리죠. 남은 건 다리가 불편해 행진에 따라가지 못했던 남자아이 한 명뿐이었어요. 그렇게 피리 부는 사나이는 최종적으로 불길한 마술적인 존재가 되었지요.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고야스 씨에게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고 그런 기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각을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꾸밈없이 따랐을 뿐이에요. 다른뜻도, 목적도 없이 자기 모습이 누군가에게 어이없게 비치건, 조롱을 당하건, 혹은 누군가를 매료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겁니다." - P404
"마치 바뀐 옷차림을 계기로 다른 인격으로 갈아탄 것처럼." "실은 정말로 다른 인격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과 결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 P405
"고야스 씨가 사비를 쏟아부어 이 도서관을 설립한 건 첫째로 자신이 그려온 이상 속의 도서관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분위기의 특별한 장소를 마련하고, 많은 책을 모아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골라 읽는 것, 그것이 고야스 씨가 생각한 이상적인 소세계였습니다. 아니, 소우주라고 해야 할까요. 젊어서는 스스로 소설가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 바람을 접은 뒤로,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잃은 뒤로는 그것이 그분 인생에서 유일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 같아요." - P406
"물론 고야스 씨가 이 도서관을 사랑했고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는 건 틀림없어요. 고야스 씨는 이 도서관에 있을 수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고 심적으로 충족되있는가 하면, 아마 아니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고야스씨 마음에는 깊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았어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 P407
겨울이 길고 혹독한 고장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많이 읽어요. - P408
고야스 씨는 평화롭고 따뜻한 가정을 가져야 마땅한 분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족들과 사랑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하는 분이었어요.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럴 자격이 충분했고요. 그래서 저는 그분이 그렇게 홀로 인생을 마치게 된 일을 슬프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고야스 씨는 부인과 아이를 잃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던 거예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늘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온 겁니다. - P410
"살아 있는 당신과 죽은 고야스 씨가 그처럼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죠.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고요." - P418
"고야스 씨가 진정한 의미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이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기척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네, 그럴 수 있죠." 소에다 씨는 말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 P419
그래도 컴퓨터 없는 일터는 나름대로 신선했고 다른 세계에 길을 잃고 흘러든 것처럼 불가사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 P421
며칠 전 소에다 씨와 나눈 긴 대화, 고야스 씨에 대한 얘기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떠올리며 볼펜으로 메모지에 그 요점들을 써내려갔다. 빠뜨린 게 없도록, 중요한 포인트를 깜박하지 않도록 그리고 메모를 다시 읽으며 각각의 요점을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 P421
그렇다, 죽은 자의 영혼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는 내가 알 턱이 있겠는가? - P424
내가ㅡ다치기 쉬운 육체와 불완전한 사고력을 지녔을 뿐인, 현세라는 지면에 하릴없이 묶인 내가ㅡ할 수 있는 일은, 모르긴 해도 그가 처한 사정이나 형편이 충족될 때 고야스 씨의 유령이 내 앞에 출현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온통 침묵에 휩싸인 반지하의 그 정사각형 방에서, 오래된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며. - P424
가끔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 P425
삽으로 눈을 퍼 카트에 실으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목숨을잃어갔던 단각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밤이 밝으면 그들 중 몇 마리가 서식지 바닥에 하얀 눈옷을 덮어쓰고 드러누워 있었다. 누군가의 죄를 떠안고 대신 죽어간 이들처럼. - P426
흰 눈으로 둘러싸인 곳에 혼자 서서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올려다보면 가끔 나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지금 과연 어느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 P426
인적 드문 아침 시간에 꽃다발을 들고 마을을 걷자니 나자신이 지금의 내가 아닌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나는 열일곱 살이고, 맑은 휴일 아침, 꽃다발을 들고 걸프렌드의 집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섞여든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 P427
아니면 나인 척하는, 내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건 내가 아닌 나인지도, 영락없이 나처럼 보이는, 그리고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도 없지는 않다. - P427
부인의 이름은 분명 ‘미리‘일 것이다. 달리 읽는 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야스 미리"라고 나는 몇 번 조용히 읊어보았다. ‘이치를 보다‘, 상당히 심오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는 건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 P429
나는 묘비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429
천장 가까이 붙어 있는 소형 스피커에서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연주하는 콜 포터의 오래된 스탠더드 넘버가 낮게 흘러나왔다. 맑은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솔로. 귀에 익은 곡인데 도저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록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도 조용한 휴일 아침에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남아온 아름답고 기분좋은 멜로디.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않고 멍하니 그 음악에 귀기울였다. - P431
여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아주 미인은 아니어도 인상 좋은 얼굴이었다. 화장은 옅다. 마음먹으면 더 젊어 보일 수 있을 텐데, 별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면에도 적당히 호감이 갔다. "실은 조금 전까지 무덤 앞에 있었어요. 정말로는 아직 죽지 많은 사람의 무덤 앞에" , 나는 자리를 뜨면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 P432
그러다 문득ㅡ마치 발밑의 풀숲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ㅡ그 제목을 생각해냈다. 역 근처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던 콜 포터의 스탠더드 넘버 제목을. <Just One of Those Things(흔히 있는 일이지만)>다. 그리고 그 멜로디가 의식의 벽에 들러붙은 주문처럼 귀 안쪽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 P434
어떻게든 잠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한들 헛일일 것이다. 위스키도 브랜디도 소용없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밤, 아마도 무언가가 나를 재우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언가가...... - P435
집에서 오지도 않는 잠을 기다리는 건, 거의 오 분 간격으로 시곗바늘을 쳐다보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그럴 바에야 추운 바깥을 정처 없이 걷는 편이 나왔다. - P435
매섭도록 추운 밤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냉기는 내 몸을 안쪽부터 조이고 쥐어짜며, 머릿속을 부옇게 채웠던 생각을 잠시나마 마비시켰다. 찬바람에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덕분에 조금 전까지 귓속에서 울리던 종잡을수 없는 멜로디는 말끔히 사라졌다. 북쪽 지방의 겨울이 지닌 미덕이라고 해야 할까. - P436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그저 기분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무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춥다는 것 말고 다른 감각이 파고들 틈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니, 내 발길은 저절로 도서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신은 눈신이 주인인 나보다 더 명료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 P437
"무덤에 들어간 건 결국 세 사람의 유골일 뿐, 뼈와 영혼은 전혀 연관이 없어요. 네에, 뼈는 뼈, 영혼은 영혼입니다ㅡ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 육체를 잃은 영혼은 끝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죽어 사후세계에 와서도 저는 생전과 다를 바없이 외톨이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묘비에 셋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결국 제 영혼도 마땅한 시간이 흐르면 어딘가로 사라져 무로 돌아갈 테지요. 영혼이란 어디까지나 과도적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무는 그야말로 영원합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표현을 초월한 것입니다." - P441
"네,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있어요. 그리고 그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 - P441
"당신 역시 과거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좇아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셨고요." "고야스 씨는 그것도 알고 계시는군요." "네, 알다마다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한 번이라도 자기 그림자를 잃어본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고요. 특히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나는 잠자코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몸안에서 시간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장해물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 P442
"그곳에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게 살아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계시겠죠?" 고야스 씨는말했다. "가는 건 어찌어찌 해낸다고 쳐도 이쪽으로 귀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어림도 없어요." - P442
"대체 어떻게 이쪽으로 돌아왔는지는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 그림자는 저에게 이별을 고하고 깊은 웅덩이로 혼자 뛰어들어 무시무시한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쪽 세계로 돌아오려 했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저쪽 세계에ㅡ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ㅡ남기를 택했죠. 그런데 다음 순간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쪽 세계에 돌아와 있었어요. 그림자는 다시 제 그림자가 되었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길고 생생한 꿈이라도 꾼것처럼. 그런데 아니에요, 그건 꿈이 아닙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가 꿈이라고 저를 세뇌시키려 해도요." - P443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저쪽 세계에 남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의지와 달리 이쪽세계로 돌아오고 말았죠. 마치 강한 용수철에 튕겨나가듯열심히 생각해봤지만, 결국 제 의지를 초월하는 다른 어떤 의지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요. 그게 어떤 의지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목적도." - P443
"당신이 처음부터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요컨대그 무언가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말했다. "어느 날 깊은 혼수에서 깨어보니 낯선 구덩이에 혼자 누워 있었어요. 벽에 둘러자인 도시, 그 문 근처에 파인 구덩이입니다. 문지기가 저를발견하고 도시에 들어가고 싶은지 물었어요. 저는 들어가고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어떤 의지가 저를 그 구등이 속으로 옮겨놨을 테죠. 물론 그후 문지기의 물음에 답하고 도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건 저 자신의 의지입니다만."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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