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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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자 후기를 보면 저자의 다른 책들에선 저자 본인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선 달리기를 소재로 하여 중간중간 저자의 생각이나 성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저자와 좀 더 친밀해진 듯한 느낌도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잘 알지못했던 저자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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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42.195km의 마라톤을 즐겨하다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울트라 마라톤‘이라고 불리는 100km 마라톤에 도전한다. 천신만고 끝에 저자는 울트라 마라톤도 완주해낸다. 독자인 나는 섣불리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기도 했었지만, 본문을 쭉 읽다보면 각각의 행위들마다 저자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떤 눈에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자신의 내면에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어떤 귀중한 가치, 할 수 있다는 믿음, 어떤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성취감, 극한의 상황을 이겨냈다는 승리감 같은 것들이다.

근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울트라 마라톤‘ 이후 어느순간 저자는 달리기만 하는 게 질렸는지 이번에는 ‘트라이 애슬론‘에 도전한다. 이 종목은 수영, 사이클, 마라톤 이 3가지 종목을 한 번에 하는 것인데 저자가 기존에 쭉 해왔던 마라톤에 나머지 두 종목을 더한 것이기에 저자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도전정신을 일깨워낸 것처럼 보였다.

저자는 본문에서 물리적인 나이를 먹더라도 그 노화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다소 힘들어보이는 도전들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했던 말을 실제로 지키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트라이 애슬론‘의 사이클 종목에 필요한 노하우 중 하나에 대해 저자가 언급한 것이다. 이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 자세를 유지해야 기록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성취에는 대가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경기용 사이클을 탈 때 무엇보다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몸을 되도록 앞으로 기울이고, 얼굴은 전면을 향해 들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뭐라고 해도 이 자세를 몸에 익혀두지 않으면 안 된다. - P213

무슨 일의 기본을 착실하게 몸에 익히려면 많은 경우 육체적인 아픔이 필요한 것이다. - P214

마라톤 풀코스에 대비해서 실시하는 장시간에 걸친 주행도 고독하지만, 혼자서 묵묵히 핸들을 붙잡고, 오로지 페달을 계속 밟는 것도 고독한 작업이다.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다. 오르막이 있고, 평지가 있고, 내리막이 있고, 순풍이 있고, 역풍이 있다. 그에 따라 기어를 바꾸고, 포지션을 바꾸고, 회전수를 체크하고, 발에 힘을 주어 부하를 걸고 떨어뜨리기를 되풀이하며 회전수를 체크하고, 물을 마시고, 기어를 바꾸고, 포지션을 바꾸고....... 때때로 그것은 고문처럼 여겨진다. - P218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 P229

정해진 일을 정해진 수순으로 정해진 말을 써서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있어도, 상대를 보고 상대의 능력이나 경향에 맞춰서 자신의 언어로 어떤 사물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많지 않다 - P241

"목적이 분명한 쪽이 가르치기 쉽습니다." - P242

부품 조각이 전부 조립되어 전체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거기서 처음으로 개별 부품의 기능을 알 수 있게 된다. 밤이 새고 하늘이 밝아지면, 그때까지는 그저 뿌옇게밖에 보이지 않던 집의 지붕 모양이나 색깔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과 같다. - P244

며칠이고 베이스 드럼의 패턴만 되풀이한다. 며칠이고 심벌 연습만 하게 한다. 며칠이고 탐탐Tam Tam 연습만...... 단조롭고 지루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일체가 되면 멋진 리듬 머신이 탄생한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집요하고 엄격하고 그리고 참을성 있게 개별 파트의 나사못을 조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 P244

보통 사람들처럼.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 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 P246

호흡을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 P249

일단 리듬을 붙이게 되면 그후에는 그것을 유지해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 P249

도롱뇽이 갑자기 타조로 진화한 것 같다. - P251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오늘의 레이스를 내가 진심으로 즐겼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자잘한 실패도 많이 겪었다. 그렇지만 나 나름대로 전력을 다했고, 그 노력의 보상 같은 것이 아직도 몸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점이 이전의 레이스보다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중요한 점이다. - P255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P256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 다다를 수도 있다. - P256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 P257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 P258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ㅡ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ㅡ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 P258

내 경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 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 P264

프로의 세계는 냉엄한 것이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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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지난 오랜 시간동안 달리기를 해왔던 저자가 프로 러너와 아마추어 러너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과거에 개인적으로 런닝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는 지극히 아마추어 러너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순간적인 가속도 물론 중요할 수 있겠지만 조금은 느리더라도 꾸준함을 보여주는 게 아마추어에서 벗어나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한 길임을 다시금 느낀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 P131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 P131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 P132

사람은 모두 공평하게 나이를 먹어간다. - P133

나는 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달린다. - P133

살결에 닿는 감촉과 향기와 방향으로 우리는 계절의 추이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런 실감을 동반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다리 밑을 지나는 강물처럼 교환 가능한 자연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140

테이퍼링 tapering (점점 줄이는) - P141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 P146

어제는 롤링 스톤스의 《베거스 뱅큇Beggar‘s Banquet》을 들으면서 달렸다. <심퍼시 포 더 데빌sympathy For The Devil>의 예의 ‘후후 woo woo‘라고 하는 펑키풍의 백코러스는 달리는 데 실로 안성맞춤이다. 그 전날에는 에릭 클랩튼의《렙타일Reptile》을 들으면서 달렸다. 어느 쪽이나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이다. 마음에 와 닿고, 몇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렙타일》은 달리면서 꽤 여러 번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렙타일》은 천천히 러닝을 하는 아침에 듣기에 딱 좋은 앨범이다. 강요하는 듯한 느낌과 부자연스러움이 티끌만큼도 없다. 리듬은 항상 명료하고 멜로디는 한없이 자연스럽다. - P147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介在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P149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 P149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P149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50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對極點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 P151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 P152

말할 것도 없이 언젠가 사람은 패배한다. 육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쇠잔해간다. 빠르건 늦건 패퇴하고 소멸한다. 육체가 시들면 (우선 아마도)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 P153

외국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하면 나에게 주어진 언어의 선택지와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에(영어 책을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영어 회화는 꽤 서투른 편이다) 그만큼 도리어 편한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다. 어차피 외국어인데 어쩔 수 없지 않나, 하고.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 P154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 P155

달리는 것은 연설문 같은 것을 암기하는 작업에 적합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면서,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단어를 늘어놓는다. 문장의 리듬을 가늠하고, 단어의 울림을 연상한다. 그렇게 해서 의식을 어딘가 다른 데 두면서 달리노라면 무리 없이 자연스런 속도로 긴 시간 조깅을 계속할 수 있다. - P155

<아메리카 더 뷰티풀> (미국의 비공식 국가. 미국을 ‘신이 내린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 P156

미래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 P161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 P162

지브롤터 해협(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해협, 15세기 콜럼버스가 이 해협을 지나 대서양 항해에 나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 - P165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인내하며 묵묵히 달려 나갈 수밖에 없다. 강한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려고 하는 급진적인 혁명의회를 당통Jacques Danton이나 로베스피에르Robespieme 같은 이들 (프랑스 혁명을 이끈 자코뱅파의 지도자들로 혁명 이후 급진적 공화주의를 주장하며 공포정치를 펼쳤다)이 변론을 구사해서 설득하는 것처럼, 나는 신체의 각 부위를 열심히 설복한다. 격려하고 매달리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질책도 하며 고무도 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지금은 어떻게든 참고 힘내다오, 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ㅡ하고 나는 생각한다ㅡ결국은 두 사람 다 목이 뎅강 날아가 버렸잖아. - P170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 P170

만약 내가 피도 살도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허물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 P170

나라고 하는 존재는 확실히 여기 있다. 그에 따라 자기라고 하는 의식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순간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은 이른바 ‘편의적인 형식‘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것은 기묘한 사고방식이며 기묘한 감각이었다. 의식이 있는 것이 의식을 부정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무튼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기無機적인 장소로 몰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 달리 연명할 길이 없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 P171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정도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ㅡ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 P171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 P172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 P172

그 뒤로부터는 아무것도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라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 P173

나타난 흐름을 자동적으로 어렵사리 계속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거기에 몸을 맡겨놓고 있으면 어떤 힘이 나를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끌어주었다. - P173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P175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 P176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 P177

의식 같은 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 P177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 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 - P180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럴 때에는 그저 가설을 몇 가지 제시할 수밖에 없다. 혹은 의문 그 자체를 차례차례 부연해갈 수밖에 없다. 혹은 그 의문이 지닌 구조를 뭔가 다른 것과 구조적으로 맞대어 비교하든지. - P185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 P187

겨우 하프 마라톤을 적당한 속도로 달린 정도로 지쳐버린다면, 마라톤 풀코스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 P194

매일매일의 힘든 연습을 벗으로 삼는 장거리 주자에게 있어서 무릎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부위다. 달리고 있으면 착지할 때마다 체중의 세 배가 되는 충격이 발에 가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하루에 1만 번 가깝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딱딱한 콘크리트 노면과 가공할 만한 하중의 증가 사이에서(그 사이에 슈즈의 쿠션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릎은 침묵을 지키며 참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보통은 거의 그런 일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ㅡ문제가 생기지 않는 편이 오히려 문제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릎이라는 것도 때로는 불평을 하고 싶을 것이다.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뛰는 것도 좋지만 조금쯤은 내 생각도 해주세요. 한 번 못 쓰게 되면 대신할 것이 없잖아요"라고. - P196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자. - P198

우리의 의식이 미로인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또 하나의 미로인 것이다. 도처에 어둠이 있고, 도처에 사각死角이 있다. 도처에 무언의 암시가 있고, 도처에 이중성이 기다리고 있다. - P202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경험과 본능뿐이다.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뭔가를 더 생각해본들 소용없다. 이제는 당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능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딱 한마디, ‘상상하라‘ 라고 하는 것이다. - P203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브루클린에서, 할렘에서, 미드타운으로, 수만 명의 주자들과 함께 뉴욕의 거리를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을. 몇 개인지 모를 거대한 강철의 현수교를 내가 넘어가고 있는 것을. 번잡한 센트럴파크 사우스를 따라 달리면서 결승점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의 기분을. 레이스를 완주한 후에 먹으러 가는, 호텔 근처의 고풍스런 스테이크 하우스를. 그런 광경은 온몸에 조용한 활력을 가져다준다. - P203

나는 이제 더 이상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침묵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둔다. - P203

버넌 듀크Vernon Duke가 작곡한 청아하고 아름다운 발라드 <뉴욕의 가을> - P204

덧없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그저
이국적인 풍경에 한숨을 내쉴 거야
이것이 뉴욕의 가을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Dreamers with empty hands
May sigh for exotic lands
It‘s autumn in New York
It‘s good to live again - P204

당연히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마라톤 레이스인 것이다. - P205

레이스용 사이클은 페달을 힘주어 콱 밟는 것과 동시에 발을 들어 올려야 한다. 힘껏 밟고 바로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에 의해 스피드를 올려간다. 그런 발의 회전을 되도록 원활하게 유지한다. 특히 긴 오르막길을 빠른 속도로 넘기 위해서는 이 ‘발을 들어 올리는‘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발을 들어 올리는 데 필요한 근육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근육이어서 사이클 연습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 근육에 피로가 쌓여 퉁퉁 부어오른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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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7-08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자는 학창시절에 위에서 강제적으로 시켜서 하는 공부보다는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은 저자가 사회인이 되고 나서 더욱 두드러졌다고 하는데,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저자의 생각과 실제 행동을 잘 대변하는 듯하다. 독자인 나는 바로 이런 것이 바로 분야를 막론하고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학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달리기라는 것을 메인 소재로 하는 듯 보이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소설가인 저자의 모습과 그가 추구하는 성향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는 성격의 글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리기를 하는 것도 결국에는 본업인 소설 쓰기를 더 잘해내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더 짙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덕분에 소설가인 저자의 히스토리와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기질이나 성향 등을 알아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은근 독자인 나와 비슷한 기질들이 있어서 좀 더 눈길이 가기도 했다.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번역 기술도 그렇게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내 돈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걸렸고 시행착오도 거듭했지만, 그런 만큼 배운 것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 P63

학교라는 데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배운 후에는 나와야 하는 곳이다. - P64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 P65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는 없다‘ - P66

열 명 중에 한 명이 단골이 되어준다면 경영은 이루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 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경영자는 명확한 자세와 철학 같은 것을 기치로 내걸고, 그것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비바람을 견디며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가게를 경영하면서 내가 몸소 체득한 것이었다. - P67

선두 주자가 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것으로 보통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 P67

스피드나 거리는 개의치 않고 되도록 쉬지 않고 매일 달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이나 집안일이나 쓰는 일과 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이 되고, 쑥스러움 같은 것도 엷어져 갔다. - P68

제킨 (운동선수나 경주마에 붙이는 표지나 번호) - P69

마라톤 풀코스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35킬로를 지나면서부터 다가온다. - P69

매일 운동을 하고 있으면 자기의 적정 체중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몸을 가장 움직이기 쉬운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 P70

나는 자주 ‘인생은 참 불공평하다‘ 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을 어떤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손쉽게 얻는다. - P70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 P71

적신호를 보기 쉬운 만큼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이라고 - P71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水原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활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가는 동안,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고 단단한 암반에 구멍을 뚫어 나가는 일을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효율성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수원이 메말라간다고 느껴지면 과감히 바로 다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자연의 수원에만 의지하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도 그리 쉽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P72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 P73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 P74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 라는 진리이다. - P75

아, 역시 사람은 모두 똑같구나, - P76

다만 젊었을 때보다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젊었을 때 한 달 반이면 가능했던 일이 3개월이 걸리게 된다. 운동량과 달성된 일의 효율도 눈에 띄게 나빠진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 P83

"근육은 붙기 어렵고 빠지기는 쉽다. 군살은 붙기 쉽고 빠지기는 어렵다" - P83

몸이라는 것은 지극히 실무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단속적·구체적으로 고통을 주면 몸은 비로소 그 메시지를 인식하고 이해한다. 그 결과 주어진 운동량을 자진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수용하게 된다. 그 뒤에 우리는 운동량의 상한선을 조금씩 높여간다.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 P84

실패의 원인은 명확했다.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달리기 양의 부족. 그것이 전부였다. 연습량의 절대 부족에다, 체중도 줄이지 못했다. - P87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 P87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 P88

한여름의 아테네는 실제로 가본 분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만큼 덥다. 그곳 사람들은 볼일이 없으면 오후에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시원한 그늘에서 낮잠을 잔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한다. 여름철 그리스에서 한낮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관광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개들도 그늘에 드러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한참을 보고있어도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덥다. - P93

《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로, 사형 직전 친구의 목숨을 담보로 고향집에 다녀오겠다는 왕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헤쳐가며 최선을 다해 달리는 이야기 - P95

세상일이란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다. - P95

오로지 앞만 보고 계속 달린다. - P99

스플릿 타임(매 구간별 기록) - P100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 라는 안도감뿐이다. - P103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P103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 P107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 P107

오르막길을 달리는 연습도 의식적으로 했다. - P112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이만큼 일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다"하고 실례를 보여가며 반복해서 설득하면, 그 상대도 "아, 좋지요" 하고 그 요구에 맞춰서 서서히 힘을 들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무리하게 혹사를 하면 고장나 버린다. 그러나 시간만 충분히 들여 실행하면, 그리고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해 나간다면 군소리도 안 하고(때때로 얼굴을 찌푸리기는 하지만) 강한 내심을을 발휘해서 그 나름의 고분고분한 자세로 강도를 높여 나간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에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무척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쪽이 순서만 올바르게 밟아 나가면 불평하지 않는다. - P114

근육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워 나간다. 그리고 일단 해제된 기억을 다시 입력할 경우에는, 또 한번 같은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 P114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P116

사람의 생각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다지도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 P119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 P120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닌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 P121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 P121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 P122

"비록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고 해도 나는 하루에 몇 시간인가는 반드시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의식을 집중하곤 한다" _뛰어난 미스터리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 - P123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 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 - P123

젊다는 것은 온몸에 자연스러운 활력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력이나 지속력도 필요하다면 저절로 생긴다. 이쪽에서 굳이 애써 찾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젊고재능이 있다는 것은 등에 날개가 돋친 것과 같은 것이다. - P124

어떤 방법으로, 어떤 방향에서 자신을 보강해가느냐 하는 것이 각자 작가의 개성이 되고 특징이 된다. - P126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P128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 P128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특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반대로 정신의 특성이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130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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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한명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역사 분야 쪽에 독서력이 짧은 탓에 한명회라는 이름은 예전에도 몇 번 들어보긴 했지만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이나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었다. 오늘 독서를 통해 알게 된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보자면 외적인 모습은 다소 아쉬운 구석이 많지만 외적인 것 이외의 것들에서는 비범한 재능이 있는 캐릭터로 나온다. 꾀가 많은 모사 기질을 가진 이 한명회가 뒤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물론 지금 소개한 한명회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속에서 알게 모르게 느끼고 배우는 것들이 많다. 어쩌면 이런 게 역사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듯 싶다.

어느 늙은 중이 광혁첨(光赫尖)이니 귀히 될 징조라고 하였다. 어찌하였으나 날 때에는 병신스러웠고 자라매 괴물 같았지마는 재주도 있고 엉큼하여 범상치 아니하게 보는 사람은 보았다. - P-1

진실로 한명회는 열 달을 못채우고 지레 날 때에 선악을 가리는 양심 하나를 잃어버리고는 다른 것은 다 찾아가지고 나온 것이다. - P-1

만사가 다 불여의하면 양양(讓陽)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강원도 양양 어느 산골짜기에 도적 나라의 대두령이 있단 말을 들은 까닭이다. - P-1

"잠깐만 참으소. 다 그럴 날이 있네." - P-1

"참기는 언제까지나 참으란 말이오. 이러다가는 밤낮 마찬가지지." - P-1

‘내가 서울에만 있었다면 이렇게는 안 되는 걸.‘ - P-1

의정부 좌우찬성의 높고 귀함, 그 좋은 권세, 이런 것을 단념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 P-1

얼마쯤 만시지탄이 없지 아니하지마는 지금부터라도 수양대군을 충동하는 것이 자기의 욕심을 달하는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 P-1

‘안평이 애매하지마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팔자이지.‘ 하고 명회는 혼자 웃었다. - P-1

하늘에 올라야 별을 따고 서울에 가야 과거를 한다는 셈으로 그래도 서울 가까이 있어야 무엇이 생기는 것이 있지그려. - P-1

"무슨 수가 나는가봐" - P-1

명회는 결코 사람을 믿는 일이 없었고 특별히 첩에 대하여서는 항상 반반한 남자가 가까이 하는 것을 의심하였다. - P-1

명회의 말은 언언구구가 다 비위에 맞았다. 마치 내 속에 들어와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살핀 뒤에 내가 할 말을 대신하여주는 것과 같이 마음에 꼭 맞았다. - P-1

건곤일척(乾坤一擲, 운명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를 겨룸) - P-1

"선비의 행색이, 한번 말을 내었다가 용납이 되면 머물고 용납이 아니 되면 물러가는 법이야." - P-1

고장난명(孤掌難鳴, 혼자의 힘만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어려움) - P-1

"일을 하는 데는 힘이 으뜸이니 힘을 기르시어야 하오." - P-1

"힘을 기르는 데 가장 속한 방법은 불평객을 모아 들이는 것이오." - P-1

"세상에 불평객이 없는 때가 없사외다." - P-1

"자기의 현재 처지를 불만히 여기어 매양 불만한 생각을 가지는 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무리를 가리키어 불평객이라 하는 것이외다." - P-1

"이렇게 불평을 가진 사람들은 매양 어디서 자기네를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외다. 마치 목마른 사람과 같이 어디서 물소리만 나면 그리로 모여드는 것이외다." - P-1

"사람이란 궁할 때에는 일반지덕(一飯之德)도 골수에 사무치는 것이니까 사방으로서 모여드는 불평객에게 우선 술 한 잔, 밥 한 그릇으로 그 모여온 뜻을 사례하고 후일에 각각 공로를 따라 높은 벼슬과 많은 녹이 있을 것을 보이면 나으리를 위하여 죽을 사람이 천이요 만뿐이리이까. 이리하면 나으리의 힘은 대적할 수 없이 커지는 것이외다." - P-1

"사마골(死馬骨)을 오백금(五百金)으로 사는 것이 천리마를 구하는 법이외다. 범상한 사람을 비사후례로 맞아들이면 걸출한 사람도 찾아오는 것이외다. 천하사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항상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외다. 나으리가 많은 사람을 문하에 모으시면 모인 사람이 비록 모두 다 하잘것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세상이 다 나으리의 세력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게 될 것이외다. 한 번 나으리의 세력이 이만하게 되면 마치 천하의 물이 다 한 바다로 모여드는 모양으로 천하의 인걸이 다 나으리 세력을 따라 모여들 것이외다." - P-1

"그까진 문신들은 난시에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이외다. 난시에는 백 명의 문장지재보다도 한 명 힘쓰는 사람이 힘이 있는 것이외다." - P-1

"소인이 말하는 불평객은 결코 힘없는 무리가 아닐뿐더러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큰 힘을 내는 무리이외다. 이 불평객들을 하나씩 하나씩 흩어놓으면 아무 힘이 없지요마는 위에서 거느리는 이만 있으면 무서운 힘을 발하는 것이외다." - P-1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외다. 광활하고 조용한 땅을 택하여 사정(射亭)을 세우고, 습사장(習射場)을 베풀고 나으리가 친히 사정에 임하시어 같이 활을 쏘시고 그날에 가장 잘 맞힌 사람에게 상금을 내리시고 나으리 친히 그 사람을 부르시어 칭찬하는 말을 주시면 팔도에 활 쏘는 사람이 다 그리로 모일 것이외다." - P-1

"또 국 식게 하는 사람이 왔느냐." - P-1

"이 일이 심히 어렵기는 하나 반드시 안 될 일은 아니외다." - P-1

"그렇게 수그러지는 것을 보시거든 한 번 더 크게 책망을 하시어 그 무리들의 예기를 질러버리시면 후일에도 나으리를 두려워할 것이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외다." - P-1

"그저 무슨 일에나 바싹바싹 대드시오." - P-1

무슨 일에나 참예하고 말썽을 부리는 것이 세력을 잡는 비결 - P-1

가감(可堪, 어떤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음) - P-1

혼인이라 함은 정말 혼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일을 같이 하자는 뜻이다. - P-1

"이렇게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이외다. 해보는 게지 여기 앉아서 해가 지도록 이렇구 저렇구 말만 하다가는 그야말로 역적등명만 하고 신수이처가 될 것이외다." - P-1

"가자. 활시위를 떠난 살이 다시 돌아오는 법은 없다." - P-1

사람이란 죽을죄라도 저지르기 전이 무섭지 저질러 놓으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다. - P-1

인정은 바람개비 같았다. - P-1

아비의 명령이 아들에게 시행되지 않는단 말은 죽을지언정 차마 듣지 못할 것이다. - P-1

옳지 못한 것이 옳은 것을 대할 때에 당하는 꿀림 - P-1

‘좀 굵직굵직한 놈들은 오늘 밤으로 조처를 해버리고 좀 것들은 내일 하루에 쓸어내이면 고만이지. 그러고 나면 내 세상이다. 다시는 내어놓지 아니할 내 세상이다!‘ - P-1

"그놈을 잡았네." - P-1

"새끼까지 잡았네." - P-1

‘큰일은 이제부터다. 닭 울기 전에 조선은 한 번 뒤집히는 것이다.‘ - P-1

몇 번이나 명회는 이 생살부를 펴보고 언제나 이것을 시행할 날이 올까 하고 기다리었던고. 그런데 그날이 왔다. 오늘 밤이 그날이다. 죽을 사람의 허두에 이름이 적힌 김종서는 벌써 죽었다. 나머지는 닭 울기 전에 끝장이 나는 것이다. - P-1

오직 피 흘리고 죽는 대관들의 모양, 그것이 유쾌하였다. 그 대관들인 그 놈들은 내게 원 한 자리 아니 준 놈들이다. - P-1

그렇지마는 글도 잠시 잠시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은 장난이었다. - P-1

"나도 그런 줄 아오마는 편전에서 좀 놀기로 어떻소." - P-1

(노니는 것이 어린 왕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 P-1

세력 있는 곳에 가깝지 못한 패는 가까운 패를 시기하는 것이 인정이다. 저도 가까이하고 싶건마는 그러할 계제가 되지 못할 때에, 가까이할 계제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잡아먹도록 미운 것이다. - P-1

"구찮다. 너희들까지 나를 못 견디게 두느냐. 내가 하는 일이 옳지 않거든 너희가 물러나가서 보지를 말려무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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