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쥐라는 인물의 이중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은 함께 하고 싶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행동은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만약 내가 소설 속의 쥐였다면 내적 갈등이 심해서 굉장히 괴로웠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그녀 안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돌아갈 수 없었다. 네가 스스로 다리를 불태워버리지 않았냐고 쥐는 생각했다. 네가 스스로 벽을 만들고, 그 속에 너 자신을 가둬버리지 않았냐고. - P170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요." - P175

"문제는 너 자신이 변하려 하고 있다는 거야, 안 그래?" - P175

"누군가가 말했지.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셔라,라고." - P176

"글쎄, 이 세상에는 우리의 철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게 잔뜩 있지." - P178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에 대단한 의미는 없어. 잃어버려야 하는 영광은 참다운 영광이 아니라니까." - P179

왜 나는 어둠 속을 계속 달리고 있는 걸까? 50대의 핀볼머신, 그것은 너무나도 바보 같은 일이다. 꿈이다. 그것도 실체가 없는 꿈이다. 그래도 3 플리퍼 스페이스십은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 P186

"글쎄요,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뿐이죠." - P189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 P189

핀볼... 핀볼이다. 그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추위가 두뇌 회전까지 멈추게 할 것만 같았다. 생각을 해라, 핀볼이다. 78대의 핀볼 머신. …그래, 스위치를 찾자. 이 건물의 어딘가에 78대의 핀볼 머신을 되살아나게 할 전원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스위치를 찾자. - P194

스위치를 켜자, 땅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낮은 굉음이 일제히 주위를 뒤덮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만 마리의 새 떼가 날개를 펼치는 것 같은 푸드덕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냉동 창고를 바라봤다. 그것은 78대의 핀볼 머신이 전기를 빨아들이고, 점수판에 수천 개의 0을 튕겨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멎자 그후에는 벌 떼처럼 붕 하는 둔탁한 기계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창고는 78대나 되는 핀볼 머신의 한순간의 삶으로 충만해졌다. 한 대, 한 대가 필드에 다양한 원색의 빛을 점멸시키고, 보드에 각각의 꿈을 한껏 그려내고 있었다. - P196

78대의 핀볼 머신, 그것은 오래된,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꿈의 무덤이었다. - P197

일상의 거품 같은 것들뿐이야. 이쪽의 시궁창 물을 다른 시궁창으로 옮기는 것뿐이지. - P200

왠지 이상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 같지가 않아.
아니, 정말로 일어난 일이야. 다만 사라져버렸을 뿐이지. - P201

무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 P201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 P201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 하고 그녀는 말했다. - P202

나는 핀볼 머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을 빠져나와서 계단을 올라가 레버 스위치를 내렸다. 마치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핀볼의 불이 꺼지고, 완전한 침묵과 잠이 주위를 뒤덮었다. 다시 창고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을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P202

나는 트로츠키와 네 마리 순록의 꿈을 꾸었다. 네 마리의 순록은 모두 털실로 짠 양말을 신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추운 꿈이었다. - P203

아마도 인간은 긍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도 어둡다. 너무 어둡다. - P204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깊은 잠이 찾아왔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 P206

"J, 그러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모두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이해해봤자 아무 해결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난 너무 오랫동안 그런 세계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 P208

"충분히 생각했어요. 어딜 가든 결국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역시 난 떠날래요. 마찬가지라도 좋으니까." - P209

"하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꿈만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 P209

"여기서 마시는 맥주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셨어요." - P210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다음에 만나면 못 알아볼지도 몰라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어." - P210

좋은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없다. - P212

바람이 다시 조금 거세졌다. 그 바람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서 피어오르는 얼마 안 되는 온기를 어딘가 먼 세계로 실어 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차가운 어둠 속에서 무수한 별들을 빛나게 했다. - P212

아무튼 끝난 것이다. - P212

아니,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무것도.... - P213

저수지의 밑바닥이든, 양계장의 냉동 창고든 어디든지 좋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라. - P214

나에게 이 한때의 에필로그는 비에 젖은 베란다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 P214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미래에 대해서는 ‘아마도‘다,라고.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암흑을 되돌아볼 때, 거기에 있는 것 역시 불확실한 ‘아마도‘뿐인 것 같았다. 우리가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는 건 현재라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조차 우리의 몸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다. - P219

"어디로 갈 거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 P220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구."
"어딘가에서 다시." 한쪽이 말했다.
"어딘가에서 다시." 다른 쪽도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메아리처럼 내 마음속에서 한동안 울렸다. - P221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 P221

우리는 지난날을 되돌아봤을 때 전환점이 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해, 깨달음을 얻고 태어나던 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은 절망의 끝이 아니었던가? 입구가 곧 출구가 아니었냐고 - P226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길가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돈이 아까워 목숨을 내놓는 바보는 없다. 살기 위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비었기에 늘 공허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랑도, 일도 텅 빈 주머니를 완벽히 채우지 못한다. 살기 위해 돈을 빼앗긴 텅 빈 주머니, 이것이 불안과 허무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괴물이어서 우리가 성급하게 채우려 들면 오히려 심술을 부린다. 삶의 지혜는 이 요술 주머니를 어떻게 다루냐에 있다." - P227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이 텅 빈 주머니는 깊은 우물이다. 존재의 근원적 무로서 우물은 그의 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중요한 은유다. 인간은 맑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된다. 노르웨이의 깊은 숲속에 있던 함정들처럼 우물은 인간이 살기 위해 파놓은 마음속의 우물이다. 그 위로 환상의 새가 날아다닌다. - P228

삶의 한복판에 뻥 뚫린 우물, 결코 채울 수 없는 우물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만들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안고 잠자리에 들듯이 우리는 환상의 알맹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환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면 우물의 깊은 나락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 P228

깊은 우물을 어루만지던 나른한 슬픔, 그 한없는 허무 가운데 가느다란 불빛이 있다.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구원이다. 아픔 속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면 얼핏 보이는 가느다란 끈, 그것이 하루키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다. - P228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 끈을 찾는 여행, 아무것도 아닌 삶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긴 여행이 이 소설의 주제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또 다른 인물 ‘쥐‘이자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가 자신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 P228

우리는 텅 빈 주머니를 채우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핀볼 머신은 죽은 나오코를 대신하여 욕망의 대상인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가 된 것이다. 욕망의 대상은 살기 위해 만든 환상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 P231

삶이란 단지 전원 스위치를 올려 딱딱한 기계를 부드러운 온기로 채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사랑과 이해를 나누는 그 짧은 순간이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 P234

어둡고 차가운 창고 속에서 누가 전원 스위치를 찾아켜서 밝은 생명을 불어넣었던가. 바로 ‘나‘였다. 삶이란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혁명도, 사랑도 가벼운 것이었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었다. 우물이 여기저기에 함정을 드리운 현실에서 텅 빈 주머니를 채울 주체는 ‘나‘지만 그것은 무거운 혁명이 아니라 일상의 부드러움과 이해라는 가벼움이었다. 무거움은 우리를 사로잡아 고착시킨다. 그러나 가벼움은 불완전함의 영원한 반복이고, 그것이 삶이요 사랑이다. - P234

불완전함의 반복은 환상의 실체를 볼 줄 알면서 동시에 그 환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핀볼 머신을 찾는 입구는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하는 출구였다. - P234

핀볼 머신은 화자가 찾는 탐색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화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반성적 주체였다. - P234

핀볼에 관한 이 소설은 세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중층 구조를 이룬다.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여러 가지 기억과 욕망들을 이렇게 세 개의 이야기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먼 훗날,《해변의 카프카》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불완전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 P236

삶의 운전대를 잡고 완벽한 음악을 들으면 그는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완벽함은 텅 빈 주머니를 단 한 번에 채워버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 P237

삶은 우물의 함정이 파인 땅 위를 걷는 불완전함의 반복이다. 마치 같은 모티프가 다르게 반복되면서 음악이 태어나듯이 이 소설은 세 개의 서술이 다르게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전 작품들은 우물의 모티프를 다르게 반복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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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독자님들이 써주신 간략한 서평들을 몇 개 읽어봤는데, 난해했다는 분도 계시고 너무 좋았다는 분도 계셔서 어디다 기준점을 맞춰야 할지 살짝 난감했다. ‘그냥 읽다보면 읽어지겠지‘라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일단 시작해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나오코라는 인물과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서로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나‘가 한 말인데, 맥락상 나오코가 무언가에 대해 조금은 불만스러운듯 투덜대는 투로 말을 꺼내자 ‘나‘가 나오코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 건낸 말이다. 어떤 못마땅한 상황이 있을 때 부정적인 블랙홀에 매몰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보다는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긍정적인 것 혹은 어떤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나‘의 태도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시지." - P17

모든 것이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8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진공청소기, 동물원, 양념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 P21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 P22

붉은광장에는 지금도 이 네 마리의 순록 동상이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다. 스탈린조차 이 순록 동상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토요일 아침 일찍 붉은광장을 구경하는 게 좋다. 볼이 빨개진 중학생들이 하얀 숨을 내쉬면서 순록 동상을 청소하는 상쾌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29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몇 번이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모든 건 끝났어, 이제 잊어버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아, 라고.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오코를 사랑했던 것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도. 결국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33

"설사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네. 우리는 죽음이 눈앞에 있는 만큼 살아 있을 때 사랑해두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 P33

"슬퍼?" 한쪽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을 자." 다른 쪽이 말했다. - P35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쥐‘라고 불리는 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700킬로미터나 떨어져 살고 있었다. - P35

1973년 9월, 이 소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 P35

사상 최초의 핀볼 제1호기가, 1934년 이 인물(레이먼드 멀로니)에 의해 테크놀로지의 황금 구름 사이로부터 이 더러운 지상에 도입됐다는 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 P36

핀볼과 히틀러의 발자취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일종의 저속함과 함께 시대의 거품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존재 자체보다는 진화 속도에 의해서 신화적 후광을 얻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진화는 물론 세개의 바퀴, 즉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투자 그리고 사람들의 근원적 욕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 P37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이 진흙 인형과도 비슷한 소박하게 생긴 핀볼에 여러 가지 능력을 계속 부여했다. 어떤 사람은 "빛이 있으라!" 하고 외쳤고, 어떤 사람은 "전기가 있으라!" 하고 외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플리퍼 있으라!" 하고 외쳤다. 빛이 필드를 비추고, 전기가 자석의 힘으로 볼을 튕겨내고, 두 개의 플리퍼가 그것을 받아서 던졌다. - P38

게임을 하는 사람의 기량은 십진법의 수치로 환산되고, 강한 흔들림에 대해서는 반칙 램프가 반응했다. 다음으로 시퀀스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탄생했고 보너스 라이트, 엑스트라 볼, 리플레이와 같은 다양한 학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시기의 핀볼은 일종의 주술성까지도 띠게 되었다. - P38

당신이 핀볼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치된 자존심뿐이다. 하지만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의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당신에게 리처드M. 닉슨의 동상을 세울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만)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 그렇다. - P39

핀볼은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불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 P39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 P40

즐거운 게임이 되길 빈다. - P40

우리 수준의 번역 작업의 매력적인 점은, 덧붙여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왼손에 동전을 들고 오른손에 포갠 다음 왼손을 치우면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뿐이다. - P45

‘무릇 사람의 손으로 써진 것 중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46

이따금 어제의 일이 작년의 일처럼 여겨지고, 작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여겨졌다. 심할 때는 내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 P46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나는 그저 홀로 깊은 풀의 밑바닥에 계속 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빛, 그리고 침묵. 그리고 침묵.... - P47

나 자신이 정말로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 P49

"아마 그럴 거야. 거의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지."
그것이 1970년대의 내 생활 방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예언했고 내가 그것을 확고히 했다. - P51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 P53

엑토플라즘(심령 현상에서 영매의 몸에서 나온다고 하는 가상의 물질) - P65

누구나 한 아름씩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졌고, 우리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그러모아서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뭔가 다른 것과 착각했던 모양이다. - P74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 P76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간다. 그것이 내 것과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치밀고, 지나치게 비슷하면 슬퍼진다. 그뿐이다. - P77

‘행복은 따뜻한 친구‘ - P83

어디까지 가야 나 자신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까? - P84

그들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 눈도. 나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97

여자는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쥐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쥐는 어깨에서 옆구리에 걸쳐 묵직한 그녀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무게였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 죽어가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무게였다. - P102

무엇보다 밝고 건강한 것이 좋다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만족해하고,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고, 다시 분주한 일상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 P103

많은 꿈이 있었고, 많은 슬픔이 있었고, 많은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 P104

돌이켜 보면 죽음은 드넓은 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P104

이따금 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짐짓 점잔을 빼는 듯한 공원묘지의 자갈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봤다. 각각의 이름과 시간, 그리고 각각의 과거의 삶을 짊어진 죽음은, 마치 식물원에 나란히 늘어선 관목처럼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들에겐 바람에 흔들리는 술렁거림도 없고, 향기도 없고, 어둠을 향해 뻗칠 수 있는 촉수도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잃은 나무처럼 보였다. 그들은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전달할 언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그것을 맡겼다. - P105

똑같은 날이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어딘가에 표시라도 해두지 않으면 착각하고 말 것 같은 하루하루였다. - P106

"이 세상에는 그런 식의 아무 이유도 없는 악의가 산더미처럼 많아. 나도 이해할 수가 없고, 너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건 분명히 존재해. 그런 일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 P118

"45년 동안 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이런 거지. 인간은 어떤 것에서든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야. 아무리 흔해 빠지고 평범한 것에서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그 어떤 이발사에게도 철학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 실제로 그렇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거지." - P119

"철학의 의무는." 나는 칸트의 말을 인용했다. "오해에 의해서 생긴 환상을 제거하는 데 있다." - P126

"어떤 곳에나 반드시 물고기는 있는 법이야." - P126

"멀리서 보면 대개는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 - P132

이틀이나 사흘 정도 그 무엇인가는 우리의 마음을 방황하다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간다. - P135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다. 그리고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간다. - P135

시간이 흘러갈수록 핀볼의 이미지는 내 내부에서 점점 팽창했다. 눈을 감으면 범퍼가 볼을 튕기는 소리와 점수판에서 점수가 바뀌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P136

내가 정말로 핀볼의 주술 세계에 빠진 건 1970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 반년 정도를 어두운 구멍 속에서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내 크기에 맞는 구멍을 파고, 거기에 푹 몸을 파묻고, 모든 소리에 귀를 막았다. 무엇 하나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잠에서 깨어나 코트를 걸치고, 오락실 한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 P144

아르바이트 수입의 대부분을 핀볼에 쏟아부었다. 하깅, 패스, 트랩, 스톱 숏・・・  많은 테크닉을 익혔다. 내가 게임을 할 때면 언제나 뒤에서 누군가가 구경을 했다. - P145

나는 핀볼을 그만두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핀볼을 그만둔다. 그저 그뿐이다. - P148

"스페이스십은 이상한 기계입니다. 얼핏 보기엔 아무 특징도 없는 것 같지만, 게임을 해보면 어딘가 다릅니다. 같은 플리퍼에 같은 타깃이지만, 다른 기종과는 뭔가 다르다 이겁니다. 그 뭔가가 마약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어요.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내가 스페이스십을 비운의 기계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 기계의 훌륭한 장점을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죠. 둘째로, 회사가 도산해버렸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양심적이었기 때문이죠. 길버트 사는 어떤 복합 기업에 흡수되었는데, 그 기업은 핀볼 부문은 필요 없다고 결정했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스페이스십은 전부 1,500대 정도 생산되었지만, 그런 이유로 지금은 전설 속의 명기계가 되었습니다. 미국 마니아들 사이에서 스페이스십은 2천 달러 정도에 거래됩니다. 하지만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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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튀르키예까지 - 무라카미 하루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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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여행한다고 하면 그리스는 신전이 많은 아테네 일대를, 그리고 튀르키예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각종 유명 건축물을 본다든가 혹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등을 체험하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여행한 그리스는 아토스 반도라고 하는 수도원들이 다수 모여있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튀르키예는 마치 육상 트랙을 한바퀴 돌듯이 북쪽의 흑해와 동쪽의 러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접한 국경지대, 남쪽의 지중해를 거쳐 서쪽의 에게해에 이르는 외곽지역을 3주에 걸쳐 한바퀴 쭉 도는 일정이었다.

먼저 나오는 그리스 편부터 얘기해보자면, 저자가 방문한 아토스 반도라는 곳은 그리스 정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이와 관련된 수도원이 해안선을 따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위치해있다. 이곳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말그대로 수도하기 위한 수도사들이 많은지라 일반적인 도시들과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띄는 곳이다. 실제로 이 아토스 반도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가 굉장히 번거로워서 저자 일행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아토스 반도를 쭉 돌면서 수도원마다 공통적으로 저자 일행을 대할 때 그리스 커피와 우조(술) 그리고 루쿠미라고 하는 강한 단맛이 나는 과자를 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방문하는 수도원마다 저자 일행이 겪었던 각종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수도원마다 문화가 조금씩 다르고 수도사들도 성격이 각양각색이라서 좋은 대접을 받은 곳도 있지만, 푸대접을 받아서 이래저래 고생했던 일들도 본문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저자가 말했던 명언이 다시금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을 할 때 모든 것이 내가 마음먹은대로, 내가 편한 쪽으로만 풀려나간다면 물론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여 타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는 것도 어찌보면 새로운 경험이자 여행을 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했지만 이외에도 일일이 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기에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독자인 내가 느낀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짝 언급하자면 그리스 편은 뒤에 나오는 튀르키예 편보다는 그래도 긍정적인 얘기들이 조금이나마 더 나왔던 것 같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스 편에 대한 언급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튀르키예로 넘어가보자.

저자 일행은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에서 차로 에브로스 강(마리차 강) 이라는 곳을 건너 튀르키예로 넘어갔다.

본문에 따르면 양국(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두 나라 국경 인근은 군사적인 긴장감이 꽤나 높다고 한다. (이런 건 독자인 나로써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역시나 인근 국가들끼리는 과거 수많은 전쟁 등을 통해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튀르키예 이야기의 첫 번째 소제목은 바로 ‘군인의 나라‘ 였는데, 저자가 본문에서 튀르키예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언급해준 것들을 읽어보면서 왜 이 나라가 군인을 굉장히 중요시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후 현지 군인들을 만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쭉 따라 읽어나가면서 마치 독자인 나도 저자의 일행과 함께 튀르키예를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읽다보면 저자가 튀르키예를 5가지 구역으로 나누어 해당 지역의 특색과 자신이 느꼈던 느낌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인 나는 튀르키예라는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느낌 등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 튀르키예로 여행을 계획 중인 분들이거나 꼭 여행을 직접 가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저자의 설명이 어느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외에도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쿠르드인과 관련된 분쟁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주 복잡미묘한 관계인 이 세 나라의 역학관계로 인해 중간에 끼어있는 소수민족인 쿠르드인들이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게 핵심인데, 이를 통해 전세계 소수민족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또한 본문 중간중간에 튀르키예의 특정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인 얘기들이 소개되는데,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튀르키예와 관련된 세계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그리스 편과 마찬가지로 이 리뷰에서 저자가 방문한 튀르키예의 도시들과 각종 에피소드들을 일일이 언급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자세한 내용들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린다.(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그리스 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튀르키예 편의 경우 저자가 이런저런 것들로 인해 고생을 꽤나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는 튀르키예 지역의 열악한 환경도 물론 한 몫 했겠으나, 저자의 성향이나 취향이 튀르키예의 문화와 다소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좋았다고 느꼈던 점은 저자와 동행했던 사진작가가 저자 일행이 방문한 장소와 관련된 사진들을 본문 중간중간 심심치 않게 넣어 주어서 글만 읽을 때보다 좀 더 입체적으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페이지 수가 좀 더 빨리빨리 넘어가서 좀 더 속도감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책의 맨 앞면과 뒷면에 저자가 여행했던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지명들이 나온 지도를 수록해 주어서 저자가 여행했던 여정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내용을 이해하고 전반적인 흐름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맨 처음에 적었던 것처럼 비록 이 책이 그리스와 터키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여행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오지라면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들을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현지인들을 만나보고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다수 만나볼 수 있어서 찐 로컬 여행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덕분에 독자인 나도 간접적으로나마 두 나라를 만나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저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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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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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고 라오스 여행기로만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라오스 외에도 아이슬란드, 핀란드, 그리스의 미코노스 섬과 스페체스 섬, 미국의 보스턴, 뉴욕, 포틀랜드 그리고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일본의 구마모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고 거기서 저자가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각 나라별 자연환경, 문화, 음악, 음식 등 여러가지 얘기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저자와 함께 다채로운 세계여행을 떠나본다는 마음으로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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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튀르키예인들이 외국인들에게 자국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그다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과 함께 과거 제1차 세계대전 때 튀르키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튀르키예의 역사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는지라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다만 ‘피는 피를 부른다‘는 교훈만은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반(지금의 반이 아니라 예전의 반)은 과거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도시였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분리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튀르키예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러시아군과 함께 도시를 점령하고 튀르키예인을 학살했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이 발발해서 혁명정부가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맺고 군을 철수시키자 돌아온 튀르키예군이 보복으로 아르메니아인을 대량 학살하고(전국적으로 100만 명에서 150만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고 한다)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을 한 명도 남김 없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다음 도시 전체를 깡그리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 P291

튀르키예인을 비방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튀르키예인이 괜찮다는 것치고 실제로 괜찮은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가끔 너무나 희망적인 견해를 취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즉, I hope that it is so(그랬으면 좋겠네요)"가 자기도 모르게 "It has to be so(그래야 해요)"가 되고 결국에는 "It sure is so(분명코 그래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P294

그들에게 길을 물어서 "아아, 바로 나와요. 100미터 정도만 가면 돼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600미터는 더 가야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가까운 것이 좋겠지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가깝다는 식으로 얘기해버린다. 호의적으로. 그것은 단지 감정적인 친절일 뿐이다. 그 증거로 튀르키예에서 몇 번이고 길을 물어봤지만 멀다는 식으로 알려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카리의 치안에 관한 질문에도 모처럼 튀르키예에 와준 사람들이 아닌가, 괜찮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그 사실을 깜빡잊고 그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 P296

쿠르드인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뿌리 깊은 문제다. 쿠르드인은 7세기부터 존재했고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민족이면서 자신들의 나라를 거의 갖지 못했던 비극적인 민족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도 제외당했고 지금도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3개국에 걸쳐 있는 지역에 살고 있다.(시리아와 소련에도 일부 있다.) 쿠르드인은 자긍심이 높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이나 튀르키예인과의 동화를 꺼리며 주변의 모든 나라에서 격렬한 분리독립운동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쿠르드인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천만 명에서 2천만 명 정도로, 튀르키예에는 그중 800만 명이 산다고 하는데 정부가 취하고 있는 강압적인 동화 정책 때문에 음악과 출판을 포함해 그들의 문화 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 P296

튀르키예 정부로서는 이라크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속사정도 있다. 왜냐하면 튀르키예는 석유 공급을 완전히 이라크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로부터의 석유 공급이 끊기면 튀르키예 경제는 괴멸되어버린다. 그래서 이라크 부대가 쿠르드인을 쫓아 튀르키예로 국경을 넘어와도 노골적으로 이라크군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한다. - P298

튀르키예에서는 담배를 권하는 것이 우호 교류의 첫걸음이고 특히 시골에서는 말보로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 P321

24번 국도는 이라크 국경 도시 지즈레에서 시리아 국경을 따라 곧장 서쪽을 향해 뻗어 있는 산업도로다. 지중해에 닿은 뒤에는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이 도로는 이라크에서 수입한 석유를 트럭으로 북부로 옮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 다른 이름은 ‘디카트 도로‘, 이곳을 통행하는 대부분의 자동차는 대형 석유 수송차인데 뒤에 커다랗게 ‘디카트!(조심!)‘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기분 나쁜 해골마크가 그려져 있다. - P328

소가 어슬렁거리는 중심가를 따라 지즈레는 문자 그대로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도시에 커다란 두 가문이 있는데 서로 오랜 세대에 걸쳐 피 튀기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시칠리아와 비슷하다. 이 두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말도 하지 않는다. 사는 곳도 다르다. 그들은 중심가를 경계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져서 살고 있다. 그리고 절대로 서로 섞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쪽에 우체국이 있고 저쪽에 약국이 있다. 하지만 이쪽 사람은 저쪽 약국에 들어갈 수 없고 저쪽 사람은 이쪽 우체국에 올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비슷한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남의 나라에 있는 남의 도시다. 비판은 삼가자. - P345

"이이 악샴라르"(튀르키예의 저녁 인사) - P346

디야르바키르는 쿠르드인 도시다. 큰 도시다. 이 부근 인구의 대부분은 쿠르드인이다. 그래서 이곳 주변은 군부대투성이다. 그런데 이 부대들은 도시를 지키기 위한 부대가 아니라 도시를 포위하고 감시하는 부대다. 디야르바키르에 도착하기 전에 잠깐 들렀던 마르딘이라는 도시 외곽의 기지에서는 야포의 포신이 모두 쿠르드인이 사는 마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쿠르드인의 반란이 일어나면 바로 포격을 가할 기세다. 정말 너무하지 않는가. 남의 나라, 남의 마을 일이라고 치부하면 그뿐이겠지만. - P347

디야르바키르는 원래 교통의 요충지로 이 지역을 차지한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다. 로마인이 이곳을 지배했을 때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최전선 요새가 되었다. 다음으로 페르시아인이 이 도시를 손에 넣었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비잔틴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그다음으로 이슬람교도 아랍인들, 우마이야왕조와 아바스왕조의 아랍인들이 쳐들어왔다. 그다음으로는 마르완왕조의 쿠르드인이 쳐들어오고, 셀주크제국이 오고, 백양왕조의 투르크멘인이 오고, 다시 페르시아인이 오고, 마지막으로 오스만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정말이지 현관 매트 같은 도시다. - P349

뭔가를 쓸 수 있을 때 써두지 않으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 여행에 대해 뭔가를 쓸 때는 일단 무엇이든 좋으니 상세히 바로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 P349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인식을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 P352

튀르키예의 맥줏집은 마치 맥주를 마신다는 행위가 인간에게 중대한 죄라도 되는 듯이 대부분 어둡고, 외설스럽고, 수상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인생의 낙오자가 모여드는 곳 같은 느낌이 든다. 손님들도 무뚝뚝하고 어두운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다. - P352

제톤(전화용 코인)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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