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시지." - P17
모든 것이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8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진공청소기, 동물원, 양념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 P21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 P22
붉은광장에는 지금도 이 네 마리의 순록 동상이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다. 스탈린조차 이 순록 동상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토요일 아침 일찍 붉은광장을 구경하는 게 좋다. 볼이 빨개진 중학생들이 하얀 숨을 내쉬면서 순록 동상을 청소하는 상쾌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29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몇 번이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모든 건 끝났어, 이제 잊어버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아, 라고.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오코를 사랑했던 것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도. 결국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33
"설사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네. 우리는 죽음이 눈앞에 있는 만큼 살아 있을 때 사랑해두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 P33
"슬퍼?" 한쪽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을 자." 다른 쪽이 말했다. - P35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쥐‘라고 불리는 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700킬로미터나 떨어져 살고 있었다. - P35
1973년 9월, 이 소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 P35
사상 최초의 핀볼 제1호기가, 1934년 이 인물(레이먼드 멀로니)에 의해 테크놀로지의 황금 구름 사이로부터 이 더러운 지상에 도입됐다는 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 P36
핀볼과 히틀러의 발자취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일종의 저속함과 함께 시대의 거품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존재 자체보다는 진화 속도에 의해서 신화적 후광을 얻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진화는 물론 세개의 바퀴, 즉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투자 그리고 사람들의 근원적 욕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 P37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이 진흙 인형과도 비슷한 소박하게 생긴 핀볼에 여러 가지 능력을 계속 부여했다. 어떤 사람은 "빛이 있으라!" 하고 외쳤고, 어떤 사람은 "전기가 있으라!" 하고 외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플리퍼 있으라!" 하고 외쳤다. 빛이 필드를 비추고, 전기가 자석의 힘으로 볼을 튕겨내고, 두 개의 플리퍼가 그것을 받아서 던졌다. - P38
게임을 하는 사람의 기량은 십진법의 수치로 환산되고, 강한 흔들림에 대해서는 반칙 램프가 반응했다. 다음으로 시퀀스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탄생했고 보너스 라이트, 엑스트라 볼, 리플레이와 같은 다양한 학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시기의 핀볼은 일종의 주술성까지도 띠게 되었다. - P38
당신이 핀볼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치된 자존심뿐이다. 하지만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의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당신에게 리처드M. 닉슨의 동상을 세울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만)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 그렇다. - P39
핀볼은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불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 P39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 P40
우리 수준의 번역 작업의 매력적인 점은, 덧붙여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왼손에 동전을 들고 오른손에 포갠 다음 왼손을 치우면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뿐이다. - P45
‘무릇 사람의 손으로 써진 것 중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46
이따금 어제의 일이 작년의 일처럼 여겨지고, 작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여겨졌다. 심할 때는 내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 P46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나는 그저 홀로 깊은 풀의 밑바닥에 계속 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빛, 그리고 침묵. 그리고 침묵.... - P47
나 자신이 정말로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 P49
"아마 그럴 거야. 거의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지." 그것이 1970년대의 내 생활 방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예언했고 내가 그것을 확고히 했다. - P51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 P53
엑토플라즘(심령 현상에서 영매의 몸에서 나온다고 하는 가상의 물질) - P65
누구나 한 아름씩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졌고, 우리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그러모아서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뭔가 다른 것과 착각했던 모양이다. - P74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 P76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간다. 그것이 내 것과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치밀고, 지나치게 비슷하면 슬퍼진다. 그뿐이다. - P77
어디까지 가야 나 자신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까? - P84
그들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 눈도. 나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97
여자는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쥐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쥐는 어깨에서 옆구리에 걸쳐 묵직한 그녀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무게였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 죽어가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무게였다. - P102
무엇보다 밝고 건강한 것이 좋다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만족해하고,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고, 다시 분주한 일상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 P103
많은 꿈이 있었고, 많은 슬픔이 있었고, 많은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 P104
돌이켜 보면 죽음은 드넓은 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P104
이따금 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짐짓 점잔을 빼는 듯한 공원묘지의 자갈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봤다. 각각의 이름과 시간, 그리고 각각의 과거의 삶을 짊어진 죽음은, 마치 식물원에 나란히 늘어선 관목처럼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들에겐 바람에 흔들리는 술렁거림도 없고, 향기도 없고, 어둠을 향해 뻗칠 수 있는 촉수도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잃은 나무처럼 보였다. 그들은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전달할 언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그것을 맡겼다. - P105
똑같은 날이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어딘가에 표시라도 해두지 않으면 착각하고 말 것 같은 하루하루였다. - P106
"이 세상에는 그런 식의 아무 이유도 없는 악의가 산더미처럼 많아. 나도 이해할 수가 없고, 너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건 분명히 존재해. 그런 일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 P118
"45년 동안 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이런 거지. 인간은 어떤 것에서든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야. 아무리 흔해 빠지고 평범한 것에서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그 어떤 이발사에게도 철학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 실제로 그렇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거지." - P119
"철학의 의무는." 나는 칸트의 말을 인용했다. "오해에 의해서 생긴 환상을 제거하는 데 있다." - P126
"어떤 곳에나 반드시 물고기는 있는 법이야." - P126
"멀리서 보면 대개는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 - P132
이틀이나 사흘 정도 그 무엇인가는 우리의 마음을 방황하다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간다. - P135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다. 그리고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간다. - P135
시간이 흘러갈수록 핀볼의 이미지는 내 내부에서 점점 팽창했다. 눈을 감으면 범퍼가 볼을 튕기는 소리와 점수판에서 점수가 바뀌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P136
내가 정말로 핀볼의 주술 세계에 빠진 건 1970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 반년 정도를 어두운 구멍 속에서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내 크기에 맞는 구멍을 파고, 거기에 푹 몸을 파묻고, 모든 소리에 귀를 막았다. 무엇 하나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잠에서 깨어나 코트를 걸치고, 오락실 한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 P144
아르바이트 수입의 대부분을 핀볼에 쏟아부었다. 하깅, 패스, 트랩, 스톱 숏・・・ 많은 테크닉을 익혔다. 내가 게임을 할 때면 언제나 뒤에서 누군가가 구경을 했다. - P145
나는 핀볼을 그만두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핀볼을 그만둔다. 그저 그뿐이다. - P148
"스페이스십은 이상한 기계입니다. 얼핏 보기엔 아무 특징도 없는 것 같지만, 게임을 해보면 어딘가 다릅니다. 같은 플리퍼에 같은 타깃이지만, 다른 기종과는 뭔가 다르다 이겁니다. 그 뭔가가 마약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어요.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내가 스페이스십을 비운의 기계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 기계의 훌륭한 장점을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죠. 둘째로, 회사가 도산해버렸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양심적이었기 때문이죠. 길버트 사는 어떤 복합 기업에 흡수되었는데, 그 기업은 핀볼 부문은 필요 없다고 결정했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스페이스십은 전부 1,500대 정도 생산되었지만, 그런 이유로 지금은 전설 속의 명기계가 되었습니다. 미국 마니아들 사이에서 스페이스십은 2천 달러 정도에 거래됩니다. 하지만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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