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독자님들이 써주신 간략한 서평들을 몇 개 읽어봤는데, 난해했다는 분도 계시고 너무 좋았다는 분도 계셔서 어디다 기준점을 맞춰야 할지 살짝 난감했다. ‘그냥 읽다보면 읽어지겠지‘라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일단 시작해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나오코라는 인물과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서로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나‘가 한 말인데, 맥락상 나오코가 무언가에 대해 조금은 불만스러운듯 투덜대는 투로 말을 꺼내자 ‘나‘가 나오코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 건낸 말이다. 어떤 못마땅한 상황이 있을 때 부정적인 블랙홀에 매몰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보다는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긍정적인 것 혹은 어떤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나‘의 태도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시지." - P17

모든 것이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8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진공청소기, 동물원, 양념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 P21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 P22

붉은광장에는 지금도 이 네 마리의 순록 동상이 각각 동서남북, 네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다. 스탈린조차 이 순록 동상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토요일 아침 일찍 붉은광장을 구경하는 게 좋다. 볼이 빨개진 중학생들이 하얀 숨을 내쉬면서 순록 동상을 청소하는 상쾌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29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몇 번이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모든 건 끝났어, 이제 잊어버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아, 라고.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오코를 사랑했던 것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도. 결국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33

"설사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네. 우리는 죽음이 눈앞에 있는 만큼 살아 있을 때 사랑해두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 P33

"슬퍼?" 한쪽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을 자." 다른 쪽이 말했다. - P35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쥐‘라고 불리는 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700킬로미터나 떨어져 살고 있었다. - P35

1973년 9월, 이 소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 P35

사상 최초의 핀볼 제1호기가, 1934년 이 인물(레이먼드 멀로니)에 의해 테크놀로지의 황금 구름 사이로부터 이 더러운 지상에 도입됐다는 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 P36

핀볼과 히틀러의 발자취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일종의 저속함과 함께 시대의 거품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존재 자체보다는 진화 속도에 의해서 신화적 후광을 얻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진화는 물론 세개의 바퀴, 즉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투자 그리고 사람들의 근원적 욕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 P37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이 진흙 인형과도 비슷한 소박하게 생긴 핀볼에 여러 가지 능력을 계속 부여했다. 어떤 사람은 "빛이 있으라!" 하고 외쳤고, 어떤 사람은 "전기가 있으라!" 하고 외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플리퍼 있으라!" 하고 외쳤다. 빛이 필드를 비추고, 전기가 자석의 힘으로 볼을 튕겨내고, 두 개의 플리퍼가 그것을 받아서 던졌다. - P38

게임을 하는 사람의 기량은 십진법의 수치로 환산되고, 강한 흔들림에 대해서는 반칙 램프가 반응했다. 다음으로 시퀀스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탄생했고 보너스 라이트, 엑스트라 볼, 리플레이와 같은 다양한 학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시기의 핀볼은 일종의 주술성까지도 띠게 되었다. - P38

당신이 핀볼에서 얻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대치된 자존심뿐이다. 하지만 잃는 건 정말 많다. 역대 대통령의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당신에게 리처드M. 닉슨의 동상을 세울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만)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 그렇다. - P39

핀볼은 당신을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다. 재시합 불을 켤 뿐이다. 재시합, 재시합, 재시합...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 P39

핀볼의 목적은 자기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에 있다. 분석이 아니라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표현이나 에고의 확대,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 P40

즐거운 게임이 되길 빈다. - P40

우리 수준의 번역 작업의 매력적인 점은, 덧붙여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왼손에 동전을 들고 오른손에 포갠 다음 왼손을 치우면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뿐이다. - P45

‘무릇 사람의 손으로 써진 것 중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46

이따금 어제의 일이 작년의 일처럼 여겨지고, 작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여겨졌다. 심할 때는 내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 P46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나는 그저 홀로 깊은 풀의 밑바닥에 계속 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빛, 그리고 침묵. 그리고 침묵.... - P47

나 자신이 정말로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 P49

"아마 그럴 거야. 거의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지."
그것이 1970년대의 내 생활 방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예언했고 내가 그것을 확고히 했다. - P51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 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