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쥐라는 인물의 이중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은 함께 하고 싶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행동은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만약 내가 소설 속의 쥐였다면 내적 갈등이 심해서 굉장히 괴로웠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그녀 안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돌아갈 수 없었다. 네가 스스로 다리를 불태워버리지 않았냐고 쥐는 생각했다. 네가 스스로 벽을 만들고, 그 속에 너 자신을 가둬버리지 않았냐고. - P170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요." - P175

"문제는 너 자신이 변하려 하고 있다는 거야, 안 그래?" - P175

"누군가가 말했지.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셔라,라고." - P176

"글쎄, 이 세상에는 우리의 철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게 잔뜩 있지." - P178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에 대단한 의미는 없어. 잃어버려야 하는 영광은 참다운 영광이 아니라니까." - P179

왜 나는 어둠 속을 계속 달리고 있는 걸까? 50대의 핀볼머신, 그것은 너무나도 바보 같은 일이다. 꿈이다. 그것도 실체가 없는 꿈이다. 그래도 3 플리퍼 스페이스십은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 P186

"글쎄요,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뿐이죠." - P189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 P189

핀볼... 핀볼이다. 그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추위가 두뇌 회전까지 멈추게 할 것만 같았다. 생각을 해라, 핀볼이다. 78대의 핀볼 머신. …그래, 스위치를 찾자. 이 건물의 어딘가에 78대의 핀볼 머신을 되살아나게 할 전원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스위치를 찾자. - P194

스위치를 켜자, 땅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낮은 굉음이 일제히 주위를 뒤덮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만 마리의 새 떼가 날개를 펼치는 것 같은 푸드덕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냉동 창고를 바라봤다. 그것은 78대의 핀볼 머신이 전기를 빨아들이고, 점수판에 수천 개의 0을 튕겨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멎자 그후에는 벌 떼처럼 붕 하는 둔탁한 기계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창고는 78대나 되는 핀볼 머신의 한순간의 삶으로 충만해졌다. 한 대, 한 대가 필드에 다양한 원색의 빛을 점멸시키고, 보드에 각각의 꿈을 한껏 그려내고 있었다. - P196

78대의 핀볼 머신, 그것은 오래된,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꿈의 무덤이었다. - P197

일상의 거품 같은 것들뿐이야. 이쪽의 시궁창 물을 다른 시궁창으로 옮기는 것뿐이지. - P200

왠지 이상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 같지가 않아.
아니, 정말로 일어난 일이야. 다만 사라져버렸을 뿐이지. - P201

무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 P201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 P201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 하고 그녀는 말했다. - P202

나는 핀볼 머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을 빠져나와서 계단을 올라가 레버 스위치를 내렸다. 마치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핀볼의 불이 꺼지고, 완전한 침묵과 잠이 주위를 뒤덮었다. 다시 창고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을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P202

나는 트로츠키와 네 마리 순록의 꿈을 꾸었다. 네 마리의 순록은 모두 털실로 짠 양말을 신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추운 꿈이었다. - P203

아마도 인간은 긍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도 어둡다. 너무 어둡다. - P204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깊은 잠이 찾아왔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 P206

"J, 그러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모두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이해해봤자 아무 해결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난 너무 오랫동안 그런 세계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 P208

"충분히 생각했어요. 어딜 가든 결국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역시 난 떠날래요. 마찬가지라도 좋으니까." - P209

"하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꿈만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 P209

"여기서 마시는 맥주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셨어요." - P210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다음에 만나면 못 알아볼지도 몰라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어." - P210

좋은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없다. - P212

바람이 다시 조금 거세졌다. 그 바람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서 피어오르는 얼마 안 되는 온기를 어딘가 먼 세계로 실어 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차가운 어둠 속에서 무수한 별들을 빛나게 했다. - P212

아무튼 끝난 것이다. - P212

아니,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무것도.... - P213

저수지의 밑바닥이든, 양계장의 냉동 창고든 어디든지 좋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라. - P214

나에게 이 한때의 에필로그는 비에 젖은 베란다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 P214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미래에 대해서는 ‘아마도‘다,라고.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암흑을 되돌아볼 때, 거기에 있는 것 역시 불확실한 ‘아마도‘뿐인 것 같았다. 우리가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는 건 현재라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조차 우리의 몸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다. - P219

"어디로 갈 거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 P220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구."
"어딘가에서 다시." 한쪽이 말했다.
"어딘가에서 다시." 다른 쪽도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메아리처럼 내 마음속에서 한동안 울렸다. - P221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 P221

우리는 지난날을 되돌아봤을 때 전환점이 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해, 깨달음을 얻고 태어나던 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은 절망의 끝이 아니었던가? 입구가 곧 출구가 아니었냐고 - P226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길가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돈이 아까워 목숨을 내놓는 바보는 없다. 살기 위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비었기에 늘 공허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랑도, 일도 텅 빈 주머니를 완벽히 채우지 못한다. 살기 위해 돈을 빼앗긴 텅 빈 주머니, 이것이 불안과 허무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괴물이어서 우리가 성급하게 채우려 들면 오히려 심술을 부린다. 삶의 지혜는 이 요술 주머니를 어떻게 다루냐에 있다." - P227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이 텅 빈 주머니는 깊은 우물이다. 존재의 근원적 무로서 우물은 그의 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중요한 은유다. 인간은 맑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된다. 노르웨이의 깊은 숲속에 있던 함정들처럼 우물은 인간이 살기 위해 파놓은 마음속의 우물이다. 그 위로 환상의 새가 날아다닌다. - P228

삶의 한복판에 뻥 뚫린 우물, 결코 채울 수 없는 우물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만들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안고 잠자리에 들듯이 우리는 환상의 알맹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환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면 우물의 깊은 나락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 P228

깊은 우물을 어루만지던 나른한 슬픔, 그 한없는 허무 가운데 가느다란 불빛이 있다.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구원이다. 아픔 속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면 얼핏 보이는 가느다란 끈, 그것이 하루키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다. - P228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 끈을 찾는 여행, 아무것도 아닌 삶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긴 여행이 이 소설의 주제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또 다른 인물 ‘쥐‘이자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가 자신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 P228

우리는 텅 빈 주머니를 채우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핀볼 머신은 죽은 나오코를 대신하여 욕망의 대상인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가 된 것이다. 욕망의 대상은 살기 위해 만든 환상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 P231

삶이란 단지 전원 스위치를 올려 딱딱한 기계를 부드러운 온기로 채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사랑과 이해를 나누는 그 짧은 순간이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 P234

어둡고 차가운 창고 속에서 누가 전원 스위치를 찾아켜서 밝은 생명을 불어넣었던가. 바로 ‘나‘였다. 삶이란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혁명도, 사랑도 가벼운 것이었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었다. 우물이 여기저기에 함정을 드리운 현실에서 텅 빈 주머니를 채울 주체는 ‘나‘지만 그것은 무거운 혁명이 아니라 일상의 부드러움과 이해라는 가벼움이었다. 무거움은 우리를 사로잡아 고착시킨다. 그러나 가벼움은 불완전함의 영원한 반복이고, 그것이 삶이요 사랑이다. - P234

불완전함의 반복은 환상의 실체를 볼 줄 알면서 동시에 그 환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핀볼 머신을 찾는 입구는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하는 출구였다. - P234

핀볼 머신은 화자가 찾는 탐색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화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반성적 주체였다. - P234

핀볼에 관한 이 소설은 세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중층 구조를 이룬다.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여러 가지 기억과 욕망들을 이렇게 세 개의 이야기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먼 훗날,《해변의 카프카》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불완전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 P236

삶의 운전대를 잡고 완벽한 음악을 들으면 그는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완벽함은 텅 빈 주머니를 단 한 번에 채워버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 P237

삶은 우물의 함정이 파인 땅 위를 걷는 불완전함의 반복이다. 마치 같은 모티프가 다르게 반복되면서 음악이 태어나듯이 이 소설은 세 개의 서술이 다르게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전 작품들은 우물의 모티프를 다르게 반복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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