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관한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라는 사람은 불쉿 직업(bullshit job) 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했었다. 여기서 bullshit 이라는 것은 영어로 헛소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미에 기반하여 그레이버가 내린 불쉿 직업의 정의는 보수와 처우가 괜찮고 노동강도가 높지 않음에도 의미가 없는 일을 말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부분에서는 이러한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인 나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이 가진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다.

저자는 앞선 본문에서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있을 때 위에서 언급했던 어떤 ‘의미‘라는 것을 좀 더 잘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을 했었는데, 저자의 말처럼 AI시대에 모든 것을 인공지능에게 의탁하기보다는 우리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하는 일에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할 수 있어야 삶의 만족도나 행복감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좀 더 압축적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수동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비참함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호함과 강요된 시늉" 때문에,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참하다. - P224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유형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게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 P224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쌓게 하고 다시 원래 장소로 옮기게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인간은 그 무의미함과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 P225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 P225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 P225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 P225

‘인간의 바둑‘은 바둑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그저 좋아서 바둑을 두는 아마추어의 활동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아마추어 수준에서 바둑을 즐기는 데 인공지능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는 전망은 비교적 쉽게 납득할 수 있다. - P229

"누구나 어떤 일에서 당대 최고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항상 최첨단에서 무언가를 할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기계가 더 잘한다고 해서 왜 인간이 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_남치형 교수 - P231

"어떤 일을 남한테 권할 때는 권하는 이유를 말해줘야 하죠. 그런 때 그 일을 하면 돈을 번다든가, 건강이 좋아진다든가. 그런데 그런 말들은 진짜 이유가 못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을 하면 어떤 유용성이 있다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정말 재미있어, 내 시간을 거기에 낭비할 만해‘ 이런 말들이야말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해요." _남치형 교수 - P231

도구적 가치와 근원적 가치 - P231

재미있다는 것은 당사자의 주관적 효용이고, 그 효용에 대해 타인이 깎아내리기 어렵다 ...(중략)... 그러나 그 주관적 효용이 외부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 P232

재미는 맥락에 좌우된다. ...(중략)... 어떤 일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바뀌며, 그 일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도 바뀔 것 같다. 재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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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9-2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 추석 잘 보내시고 남은 이 달 즐독하시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6-09-24 14:39   좋아요 1 | URL
예 고맙습니다. 서곡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appletreeje 2026-09-24 15: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6-09-24 15:28   좋아요 3 | URL
예 appletreeje 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총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단 가장 먼저 나온 ‘TV피플‘은 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든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그나마 밑줄친 문장들과 독자인 나의 상상력을 좀 덧붙여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전반적으로 작품 속 화자가 현실과 꿈 속을 넘나들며 경험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TV피플이라고 나오는 3명의 사람과 관점을 바꿔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처음에는 화자가 TV 밖에서 TV피플들을 바라보는 시청자처럼 느껴졌지만 어느순간부터는 TV피플들이 현실이라는 TV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화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일까?‘(p.51)라는 문장을 통해 독자인 내가 단지 추론해본 것일뿐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추론해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또한 일반적으로 TV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아니면 다른 누가 되었든 간에 말을 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희박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속성을 잘 표현한 것이 p.50에 내가 밑줄친 문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TV에 나오는 사람들 뿐만아니라 그냥 평범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회사든 학교든 어디든 간에 말을 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건 얼추 비슷하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소설 속 화자의 경우도 회사에서 말을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영향력 또는 회사에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적절한 타이밍에 주변 동료들에게 나름대로 영양가 있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화자가 일하는 장소가 비록 방송국은 아니지만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적인 행동으로 말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는 일정부분 공통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외에도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TV피플들이 TV를 놓기 위해 화자의 집에 있는 테이블 위에 있던 각종 잡지들을 치우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종이로 된 매체를 영상 매체가 대체해 나가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도 책 읽는 사람보다는 영상 콘텐츠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게 현실인 것을 생각하다보니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소설 속 에피소드 중 하나로 소설 중반부에 화자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장면이 있다. 회사 동료들은 화자를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독자인 나는 이 부분에서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관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바로 앞문단에서 언급했던 책(텍스트)과 영상 콘텐츠를 각각 계단과 엘리베이터에 연동시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계단은 뭔가 아날로그적이라면 엘리베이터는 디지털적인 것이라고나 할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디지털 시대의 최신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와중에 아날로그적인 것들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리타분한 별종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물론 각자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속칭 비주류인 사람들을 사회의 변화에 나름대로 잘 적응한 속칭 주류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비슷한 시선들을 계단과 엘리베이터 에피소드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 중간중간에 시간이 가는 것을 상징하는 듯한 별다른 뜻은 없어보이는 의성어인 ‘타룹푸ㆍ쿠ㆍ샤우스ㆍ타룹푸ㆍ쿠ㆍ샤우스‘ (p.22) 같은 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TV를 보든 TV밖의 실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든 관계없이 시간이라는 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듯하다.



어느덧 소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TV피플은 화자에게 화자의 부인이 안 돌아올거라고 말한다. 처음엔 갑자기 생뚱맞게 이게 무슨 전개지 싶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위에서 살짝 언급했던 키워드 중에 ‘잡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화자의 부인이 주로 읽어보던 것이었다. 그런데 앞서 독자인 내가 이 잡지라는 것을 영상 콘텐츠같은 최신식의 콘텐츠라기보다는 조금은 구시대적인 콘텐츠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실제로 화자의 부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구시대적인 콘텐츠들이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거나 궁극에는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부인은 안 돌아온다‘고 말한 TV피플의 말은 ‘이제 아날로그의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의 시대가 왔다‘ 정도로 치환해서 해석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좀 더 나아가서 요즘 4차 산업 혁명의 키워드인 ‘AI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를 넣어서 적용해보자면 ‘인공지능 이전의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나서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말로도 표현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후 TV피플이 자신이 ‘비행기‘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인 나는 처음엔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솔직히 전혀 감이 오지 않았었는데,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시킨 것들을 하나하나 해석해나가면서 이 ‘비행기‘라는 것이 요즘 가장 각광받고 있는 ‘AI, 인공지능‘을 상징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앞서 윗문단에서 언급한 ‘부인은 안 돌아온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봤을 때, 소설 속에서 ‘비행기‘라는 최신 기술이 도입된 기계를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내 나름의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소설 속에서 TV피플은 비행기를 개발하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쏟아붇고 있었고 이제 색칠만 하면 근사한 비행기가 완성된다는 말을 통해 비행기의 완성이 머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요즘 가장 핫한 기술인 ‘AI,인공지능‘ 개발과도 일맥상통하는 흐름이기에 독자인 나의 이러한 해석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TV피플‘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 ‘나는 일어서서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일어선 순간 말은 지워져 사라지고 말았다.‘(p.51) 에서는 말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음성이 유선상의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상대방의 전화기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기술이 좀 더 진화해서 기계가 사람의 생각을 미리 읽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 모든 것은 독자인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기에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뒤섞이는 밀물과 썰물처럼, 예감이 기억을 끌어당기고 기억이 예감을 끌어당긴다. - P10

잠깐만, 나는 발언하고 싶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 내게는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작아지고, 메말라버리고, 이윽고 돌이 되고 만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 P50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일까? - P51

눈앞의 타인에게 그렇게 철두철미 존재를 무시당하면 스스로도 자신이 그곳에 있는지 어떤지 차츰 확신할 수 없어진다. - P22

시계는 계속 시간을 새긴다. 타룸푸 · 쿠· 샤우스 • 타룹푸 · 쿠·샤우스, 하고. - P22

시계가 묵직한 소리로 침묵을 분할하고 있었다. 타룹푸 · 쿠ㆍ 샤우스 • 타룹푸 · 쿠· 샤우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귀에 넣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속수무책으로 무겁고 거대했다. 싫어도 귀에 들어왔다. - P25

나는 리모컨을 테이블에 놓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긴 소설을 계속 읽으려고 생각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면 늘 책을 읽는다. 삼십 분쯤 읽다 말 때도 있고, 두 시간 읽을 때도 있다. 어쨌거나 매일 읽는다. 하지만 그날은 한 페이지의 절반도 읽지 못했다. 아무리 책에 의식을 집중하려 해도 신경이 바로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자꾸 텔레비전으로 눈이 가고 만다. 텔레비전 화면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었다. - P27

눈을 감으면 TV피플의 모습이 떠올랐다. 텔레비전을 운반했던 TV피플, 시계를 치웠던 TV피플, 잡지를 테이블 위로 옮겼던 TV 피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던 TV피플, 화상을 점검했던 TV피플, 문을 열고 말없이 나갔던 TV피플. 그들은 줄곧 내 머릿속에 있었다. 그들이 내 머릿속을 걸어다녔다. - P28

나는 엘리베이터 타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언제나 걸어서 계단을 오르내린다. 사무실은 빌딩 9층에 있으니 편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 급한 용건이라도 있을 때는 땀에 푹 젖어버린다. 그래도 나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땀에 젖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일로 모두 농담을 한다. 내가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가지고 있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이용하지 않는 탓에 그들은 나를 별종 취급한다. 어쩌면 내가 어떤 의미에서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묘한 사고방식이다. 그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 P30

말을 멈추면 나는 죽고 만다. 그래서 중단할 수없다. 뜻도 모르는 이야기를 영원히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주위 인간은 이미 모두 죽고 말았다. 죽어서 돌이 되었다. 딱딱한 석상이 되었다. - P42

그는 형광등 불빛 같은 하얀 빛을 배경으로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 숨어든 꿈의 꼬리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훌쩍 사라져버릴 듯 느껴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 속 TV 피플의 모습은 외려 차츰 커졌다. 화면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멀리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으로 TV피플의 얼굴이 차츰 클로즈업되었다. 이윽고 TV피플은 텔레비전 밖으로 나왔다. 마치 창문을 넘듯 손으로 테두리를 짚고 영차 하고 발을 내딛고 나왔다. 그가 나온 뒤 화면에는 하얗게 빛나는 배경만 남았다. - P43

"부인은 안 돌아와." 화면 밖 TV피플이 내게 말했다. - P46

이미 틀렸으니까 안 돌아와, - P47

"우린 비행기를 만들고 있어." TV피플이 말했다. 원근감없는 목소리였다. 얄팍해서 마치 종이에 적힌 소리 같았다. - P44

텔레비전 속 두 TV피플은 나와는 무관하게 부지런히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한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계를 완성시킬 때까지 해야 할 작업은 무한히 있는 듯했다. 한 작업이 끝나면 지체 없이 바로 다음 작업이 시작됐다. 번듯한 공정표나 도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다음 작업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들의 그런 훌륭한 작업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따라갔다. 알기 쉽고 적확한 카메라워크였다. 설득력 있는 화면이었다. 아마도 다른(제4인지 제5의) TV피플이 카메라와 컨트롤 패널 작업을 담당하고 있을 테다. - P49

신기한 얘기지만, TV피플의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작업을 지그시 보는 사이 내 눈에도 그것이 조금씩 비행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비행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그런 건 상관없지 않은가. 저렇게 멋지게 정밀 작업을 하고 있으니 비행기임이 분명하다.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비행기다. 확실히 이 남자가 말한 대로다. 비행기가 아니면, 이게 뭔데? - P49

텔레비전 밖 TV피플은 아까부터 조금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팔꿈치를 텔레비전에 올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보여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TV피플은 일을 계속했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타룸푸 · 쿠·사우스ㆍ타룹푸·쿠·사우스. - P49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돌연 생각했다. 하긴 아내는 이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이미 아주 멀리 가버린 것이다. 온갖 교통수단을 사용해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버렸다. 분명 우리는 돌이킬 수 없게 틀려버렸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잃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내안에서 여러 생각이 풀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럴지도 몰라,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목소리는 내 몸속에서 매우 공허하게 울렸다. - P50

"내일 색을 칠하면 더 잘 알게 돼." TV피플이 말했다. "색만 입히면 번듯한 비행기가 돼." - P50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평소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정말 조금.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원근감의 밸런스가 살짝 뒤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바닥은 확실히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 P50

나는 전화기를 보았다. 전화선을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이어진 전화선. 그 무시무시한 회선 미로 어딘가의 단말기 앞에 아내가 있다. 한참 멀리, 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멀리. 나는 아내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오분, 나는 생각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일까? 나는 일어서서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일어선 순간 말은 지워져 사라지고 말았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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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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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혼합된 이야기가 7편 수록되어 있고, 각각의 이야기마다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읽었던 동저자의《도쿄 기담집》처럼 기묘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야기 중간중간 의미심장한 문장들도 더러 나오고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기에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뭔가 새로운 느낌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아마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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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총 7개의 이야기 중 6번째로 등장하는 ‘일곱 번째 남자‘ 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소설에선 한 남자가 거친 비바람과 파도 등으로 인해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자신이 경험했던 악몽과도 같았던 순간에 대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밑줄친 문장에서 ‘태풍의 눈‘이라는 것에 대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용어를 얼핏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몰랐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통해 이 ‘태풍의 눈‘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여기서의 핵심은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면 잠깐 동안은 안전하지만 머지않아 굉장한 위기가 닥쳐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만간 화자가 경험하게 될 상황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지금 태풍의 눈 안에 있는 거야‘ 하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셨습니다. ‘잠깐 동안은, 아마 십오분이나 이십분 정도는 잠깐 쉬어가는 것처럼 이 고요함이 계속될 거야. 그런 다음엔 조금 전과 같은 폭풍우가 다시 몰아닥칠 거란다.‘ - P172

그것은 이유 없는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파도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파도는 확실히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파도는 그곳에 있는 내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제부터 나를 그 손바닥 안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꼭 거대한 육식동물이 나를 먹잇감으로 점찍고서, 그 날카로운 이빨로 나를 갈기갈기 찢어 먹는 꿈을 꾸며 초원의 어딘가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P176

파도란 절대 한 번만 왔다 가버리지 않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밀려오는 습성을 지녔다 - P181

혹시 나는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P193

내가 K의 표정에서 느꼈던 강한 증오의 빛은, 그 순간 나를 사로잡고 지배했던 깊은 공포의 투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P194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공포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 P198

"나는 지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시간은 앞으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설사 너무 늦었다고 해도, 마지막에 이렇게 구원받고 마침내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채 공포의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이 인생이 끝나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 P199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공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공포는 확실히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서 때로는 우리의 존재를 압도해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공포를 향해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무엇인가에 줘버리게 됩니다. 내 경우에는ㅡ그것은 파도였습니다." - P200

야마노테(고지대에 있는 주택이란 뜻으로 고급 주택이 많은, 이른바 부자 동네를 말함) - P207

"약간의 순서 차이가 큰 의미를 가져올 수도 있지. 간단히 포기해버리면 희망이 없잖아." - P211

"가장 괴로운 건 공포라는 거야. 실제 느끼는 아픔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아픔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싫고 두려워." - P212

해야 할 일 같은 건, 그 어디에도 단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만은, 있을 수가 없다. - P217

"장님 버드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지만, 뿌리는 땅속 깊은 곳까지 뻗어내리고 있어" 하고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자라면, 장님 버드나무는 더 이상 위로는 뻗어가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만 뻗어가는 거야. 마치 암흑을 양분으로 삼기라도 한 듯 말이야." - P225

암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살아가는 경향이 응축된 것이기도 하다 - P228

"어디나 대개는 같아." 사촌 동생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맥 빠진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검사를 한다고." - P229

"누구의 눈에나 다 보이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 P231

‘인디언을 보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인디언은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 P232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에. - P236

《렉싱턴의 유령》은 오컬트(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한 내용의 작품 일곱 가지를 담은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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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이후 일어난 바둑계의 지각변동에 대해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인공지능이 바둑 외의 다른 분야(저자가 속한 문학업계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도 조심스레 예상해보고 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바둑이라는 것이 그것을 두는 사람의 철학이 담긴 일종의 예술인지 아니면 냉정하게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지는데, 오랜기간 프로 바둑기사로 이름을 날렸던 유창혁 9단의 말은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게 만든다. 유 9단은 바둑을 예술이라기보다는 결국엔 승부를 겨뤄야 하는 스포츠라는 점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본문을 쭉 읽다보면 물론 모든 프로바둑기사들이 유 9단의 생각과 똑같진 않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기사들마다 각자 목표하거나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독자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덧붙여보자면, 유 9단 같이 승부를 중시하는 프로 기사들의 경우 물론 바둑에 담긴 어떤 철학이나 예술성 같은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돈을 받는 프로기사로서 어떤 결과물(예를 들면 대회 우승 같은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상당한 부와 명예를 좀 더 우선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바둑에는 철학과 예술이 담겨있다고 말하는 기사들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부와 명예같은 외적인 가치보다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나름대로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내적인 가치에 좀 더 우선순위를 두고 바둑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마다 성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결국에는 여기서 말하는 바둑이 됐든 바둑이 아닌 다른 어떤 분야가 됐든 간에 각자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거기에 맞게 매순간 의사결정을 해나가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바둑에 예술적인 부분도 있고 게임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승부죠. 우리가 어떤 작품을 발표하고 누구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승부를 통해 보여주는 거죠. 예술적으로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해도 승부에서 지고 패자가 되면 그 작품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런 걸 예술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죠. 승부에서 이기고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 거지, 그 전체를 예술이라고 하는 얘기는 좀 안 맞는 거 같아요." _유창혁 9단 - P151

우리는 인간 예술가와 완전히 무관한 풍경을 보면서도 ‘예술이네‘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풍경 자체를 예술작품이라고 진지하게 여기면 곤란하다. - P151

최선을 다한 바둑은 다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_이희성 9단 - P152

"바둑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승부에 임하는 기사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더 중요해요. 바둑의 예술성은 대국자들에게 달려있는 거죠. 똑같은 그림이라도 혼신의 힘을 바쳐 성의 있게 그린 사람과 그걸 보고 베낀 모작의 작품성이 같지는 않잖아요. 기보가 작품이 된다 해도 거기에는 기사들의 서사가 있어야 해요." _김찬우 7단 - P163

"승부는 그걸로 끝나는 거고, 예술은 그 과정을 중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에요. 그리고 예술은 당사자가 아닌 남이 평가하는 면이 중요한 것 같고요." _최명훈 9단 - P163

신분이 바뀌었다고 인식까지 한순간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많은 프로기사가 ‘지원금 때문에 스포츠라고 말은 한다만 그래도 바둑은 예술이고 나는 예술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바둑은 스포츠‘라는 생각은 서서히, 확고하게 퍼졌다.‘ - P165

"다들 바둑을 스포츠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AI의 영향이 있다고 봐요. 예전에는 답이 없는 걸 연구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답이 나온걸 누가 더 잘하느냐로 바뀌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_이하진 4단 - P166

"예술은 정답이 없고, 그래서 우열을 가릴 수 없고, 예술가의 의도가 중요하죠. 스포츠는 우열을 가리는 대신에 참여자들이 최선을 다하면서 치열함을 보여줄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요." _정두호 4단 - P169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의 작품을 모방할 때, 그리고 문학 AI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할 때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점수화한다. 숫자가 되고 나면 순위가 갈리며 경쟁이 벌어진다. - P170

숫자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면, 인간 시인과 소설가가 자신의 점수를 높이기 위해 경쟁하게 되면, 문학은 스포츠에 가까워진다. - P170

미술사에서 인상주의는 사진 기술에 대한 미술가들의 대응이었다. - P171

AI 시대 이후의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 때문에 바둑이 단조로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독특했다. 그가 보기에는 초반은 바둑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진서 9단은 "바둑의 꽃은 중반"이라며 "중반이 가장 재미있고 치열해요. 초반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다 하더라도 중반은 결국 재미있는 바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바둑의 매력에 대한 감각이 변하는 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73

예술과 스포츠라는 개념, 그리고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 P173

어떤 행위의 성격을 정의하는 일은 다음 세대의 가치관을 규정하는 일이 된다 - P173

"당신은 평생 해온 게임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른다" _야구 선수 미키 찰스 맨틀 - P173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 P173

인센티브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 P174

"많은 이들이 경제적 인센티브는 뿌리칠 수 있지만 문화적, 집단적 인센티브는 더 뿌리치기 힘들다" _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 - P174

예술가들을 움직이는 인센티브에는 경제적 보상도 있지만, 그들은 뭔가 고상한 것, 의미 있는 것,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인정받는 것에도 강하게 끌린다. 새로운 기술이 그 인정 욕구를 위협할 때 예술가들은 예술을 재정의해야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 P174

인간의 감정은 코끼리이며 이성은 자기가 그 코끼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기수에 불과하다. 코끼리가 방향을 정하고 기수는 그 방향을 합리화한다. _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 P174

어떤 예술 장르의 정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고,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니까. - P174

절대다수의 사람은 돈을 잃기보다는 벌기를 바라며, 불안해지기보다 안전해지기를 원하고, 미움받기보다 사랑받기를, 무시받기보다 인정받기를 소망한다. 신기술은 그런 개별 욕망의 방향을 뒤집는다기보다는 각각에 기대할 수 있는 인센티브의 크기를 바꾸는데, 어떤 인센티브가 압도적으로 커지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 P175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자극하는 인센티브는 수익성 강화다. 인공지능은 수익성 강화의 도구로 널리 보급될 것이다. 많은 경우 이것은 대중성 강화를 의미한다 (이는 몇몇 분야의 스포츠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 P175

빠르게 변화하는 초창기 신기술 앞에서 여러 주체는 서로 다른 단기 인센티브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한번 내린 선택은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여러 선택이 뭉치고 엮인 결과는, 멀리서 조망하면 전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선택들은 기술 발전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단단히 묶여 ‘기술-환경‘을 만든다. - P176

바둑과 달리 예술에는 명확한 규칙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당수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예술가를 매우 불편해한다. 일종의 반칙 행위로 보는 듯하다. - P182

나는 오히려 AI 이미지의 수준이 낮지 않고 사람이 그린 것 혹은 진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적대감이 전보다 커졌다고 생각한다. - P186

내게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의 중요한 토템을 모욕당해 화를내는 원주민처럼 보였다. - P186

그 그림(생성형 AI로 만든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는 것은 인간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창조 행위‘를 훼손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 P187

그것(죽은 배우를 AI 기술로 되살린 것)은 어떤 사람이 고유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말하는 사람을 되찾을 수 없다는 기존의 믿음을 훼손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 P187

결국은 사람들이 인식을 바꿀 것이다. 어떤 기술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인식을 지닌 후손들은 과거의 인식을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러면 옛 토템은 하나둘 무너진다. 그 토템이 보호하던 가치도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 P187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변하고 뒤바뀐다. 나를 둘러싼 기술-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그 영향을 받는다. - P187

내가 수렵채집인으로서 성스럽게 여기는 나무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베어 내면 나는 화가 날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하는 방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 P188

어떤 기술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기술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고, 공동체에 새로운 금기와 규칙을 만든다. 그 규칙들은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되고, 그 질서에 따라 새로운 계급과 문화를 지닌 새로운 사회구조가 탄생한다. - P188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오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기술이 존재한다. 강인공지능뿐 아니라 약인공지능도 그런 기술이다. - P189

한 세대 뒤면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인공지능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중략)... 2020년대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토템 몇 가지는 그때는 이미 무너져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창의성이라든가 고유성, 혹은 다른 개념들이 완전히 부서지거나, 기묘하게 왜곡되거나, 균열이 나 있을 것이다. - P189

"스포츠 경기에는 스코어가 항상 있는데, 바둑도 스포츠로 간 마당에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당연히 알려줘야죠." - P193

알파고 이전에는 인간 최강자끼리 바둑을 두는 동안 그 대국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두 대국자가 가장 잘 알았다. 알파고 이후에는 자신이 두는 바둑의 형세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 두 대국자다. 해설을 맡은 프로기사나 그 해설을 듣는 시청자들은 인공지능 덕분에 실시간 형세와 다음에 두어야 할 수를 훨씬 더 정확히 안다. - P194

내가 운전을 할 때 늘 내비게이션이 제안하는 경로를 따라간다면, 나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는 걸까, 내비게이션의 명령을 받는 걸까? - P197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매번 인공지능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다면,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걸까? - P197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실제 세계를 상당한 정도로 추상화 · 범주화해서 이해한다. 그리고 거기에 언어는 큰 도구가 된다. 바닷가에 나가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모래알이 있고, 그 모래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르게 생겼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래알 각각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냥 모래알이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그 모래알들을 모두 구분하려 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다 (보르헤스가 그런 상황을 소재로 「기억의 천재 푸네스」 라는 매력적인 단편소설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어떤 대상은 그런 추상화 · 범주화가 언어로는 잘되지 않는다. - P200

자신이 어떤 일에 대단한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 남들보다 나은 결과물을 내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과정은 영적 체험처럼 느껴진다. - P204

자신이 정상급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빨리 파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건지도 모른다. - P211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정답까지 가는 추론 과정을 검증하는 식으로 수업 방식이 바뀌었어요." _김만수 8단 - P212

"뭔가 변화하면 거기에 맞게 사람도 변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길을 찾아서 더 좋게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_이희성 9단 - P213

"AI가 왜 이런 수를 제시하는지 생각하라" _한종진 9단 - P214

나는 소설을 쓸 때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안다. 아무리 옆에서 누군가가 ‘당신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해도, 내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존재가 아닌 거다. - P221

"스스로 불쉿(bullshit job) 직업에 종사한다고 믿는 이들의 생각은 대체로 옳다". _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 P222

불쉿 직업은 힘들고 보수와 처우가 형편없어서 인기 없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것은 ‘쉿 직업(shit jobs)‘인데, 그런 쉿 직업들은 불쉿 직업과 반대로 사회적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종사자들이 사라지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환경미화원이나 건설 현장의 잡부가 대표적 사례다. 반대로 보수와 처우가 괜찮고 노동 강도가 높지 않은데도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불쉿 직업이다. 그레이버는 인사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홍보 조사원, 금융 전략가, "불필요한 위원회의 문제를 처리할 직원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일상 업무로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그 예로 들었다. - P222

인공지능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를 없애버린다. - P223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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