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이는 밀물과 썰물처럼, 예감이 기억을 끌어당기고 기억이 예감을 끌어당긴다. - P10
잠깐만, 나는 발언하고 싶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 내게는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작아지고, 메말라버리고, 이윽고 돌이 되고 만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 P50
눈앞의 타인에게 그렇게 철두철미 존재를 무시당하면 스스로도 자신이 그곳에 있는지 어떤지 차츰 확신할 수 없어진다. - P22
시계는 계속 시간을 새긴다. 타룸푸 · 쿠· 샤우스 • 타룹푸 · 쿠·샤우스, 하고. - P22
시계가 묵직한 소리로 침묵을 분할하고 있었다. 타룹푸 · 쿠ㆍ 샤우스 • 타룹푸 · 쿠· 샤우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귀에 넣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속수무책으로 무겁고 거대했다. 싫어도 귀에 들어왔다. - P25
나는 리모컨을 테이블에 놓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긴 소설을 계속 읽으려고 생각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면 늘 책을 읽는다. 삼십 분쯤 읽다 말 때도 있고, 두 시간 읽을 때도 있다. 어쨌거나 매일 읽는다. 하지만 그날은 한 페이지의 절반도 읽지 못했다. 아무리 책에 의식을 집중하려 해도 신경이 바로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자꾸 텔레비전으로 눈이 가고 만다. 텔레비전 화면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었다. - P27
눈을 감으면 TV피플의 모습이 떠올랐다. 텔레비전을 운반했던 TV피플, 시계를 치웠던 TV피플, 잡지를 테이블 위로 옮겼던 TV 피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던 TV피플, 화상을 점검했던 TV피플, 문을 열고 말없이 나갔던 TV피플. 그들은 줄곧 내 머릿속에 있었다. 그들이 내 머릿속을 걸어다녔다. - P28
나는 엘리베이터 타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언제나 걸어서 계단을 오르내린다. 사무실은 빌딩 9층에 있으니 편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 급한 용건이라도 있을 때는 땀에 푹 젖어버린다. 그래도 나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땀에 젖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일로 모두 농담을 한다. 내가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가지고 있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이용하지 않는 탓에 그들은 나를 별종 취급한다. 어쩌면 내가 어떤 의미에서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묘한 사고방식이다. 그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 P30
말을 멈추면 나는 죽고 만다. 그래서 중단할 수없다. 뜻도 모르는 이야기를 영원히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주위 인간은 이미 모두 죽고 말았다. 죽어서 돌이 되었다. 딱딱한 석상이 되었다. - P42
그는 형광등 불빛 같은 하얀 빛을 배경으로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 숨어든 꿈의 꼬리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훌쩍 사라져버릴 듯 느껴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 속 TV 피플의 모습은 외려 차츰 커졌다. 화면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멀리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으로 TV피플의 얼굴이 차츰 클로즈업되었다. 이윽고 TV피플은 텔레비전 밖으로 나왔다. 마치 창문을 넘듯 손으로 테두리를 짚고 영차 하고 발을 내딛고 나왔다. 그가 나온 뒤 화면에는 하얗게 빛나는 배경만 남았다. - P43
"부인은 안 돌아와." 화면 밖 TV피플이 내게 말했다. - P46
"우린 비행기를 만들고 있어." TV피플이 말했다. 원근감없는 목소리였다. 얄팍해서 마치 종이에 적힌 소리 같았다. - P44
텔레비전 속 두 TV피플은 나와는 무관하게 부지런히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한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계를 완성시킬 때까지 해야 할 작업은 무한히 있는 듯했다. 한 작업이 끝나면 지체 없이 바로 다음 작업이 시작됐다. 번듯한 공정표나 도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다음 작업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들의 그런 훌륭한 작업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따라갔다. 알기 쉽고 적확한 카메라워크였다. 설득력 있는 화면이었다. 아마도 다른(제4인지 제5의) TV피플이 카메라와 컨트롤 패널 작업을 담당하고 있을 테다. - P49
신기한 얘기지만, TV피플의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작업을 지그시 보는 사이 내 눈에도 그것이 조금씩 비행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비행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그런 건 상관없지 않은가. 저렇게 멋지게 정밀 작업을 하고 있으니 비행기임이 분명하다.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비행기다. 확실히 이 남자가 말한 대로다. 비행기가 아니면, 이게 뭔데? - P49
텔레비전 밖 TV피플은 아까부터 조금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팔꿈치를 텔레비전에 올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보여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TV피플은 일을 계속했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타룸푸 · 쿠·사우스ㆍ타룹푸·쿠·사우스. - P49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돌연 생각했다. 하긴 아내는 이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이미 아주 멀리 가버린 것이다. 온갖 교통수단을 사용해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버렸다. 분명 우리는 돌이킬 수 없게 틀려버렸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잃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내안에서 여러 생각이 풀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럴지도 몰라,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목소리는 내 몸속에서 매우 공허하게 울렸다. - P50
"내일 색을 칠하면 더 잘 알게 돼." TV피플이 말했다. "색만 입히면 번듯한 비행기가 돼." - P50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평소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정말 조금.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원근감의 밸런스가 살짝 뒤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바닥은 확실히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 P50
나는 전화기를 보았다. 전화선을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이어진 전화선. 그 무시무시한 회선 미로 어딘가의 단말기 앞에 아내가 있다. 한참 멀리, 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멀리. 나는 아내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오분, 나는 생각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일까? 나는 일어서서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일어선 순간 말은 지워져 사라지고 말았다. - P51
인간이란 어째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다지 다를까, - P59
나이는 생각보다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사람들마다 각각 안고 있는 경향의 차이 쪽이 훨씬 의미깊게 느껴졌다. - P59
망설이는 사이 그날 하루가 끝나버린다. - P61
"사람 마음은 깊은 우물 같은 것 아닐까 싶어. 바닥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때로 거기서 떠오르는 것의 생김새를 보고 상상하는 수밖에." - P66
"이를테면 나는 어떤 혼잣말을 하는데요?" 그가 질문했다. "그러게" 하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마치 목 관절의 움직임을 살며시 확인하는 것처럼. "이를테면, 비행기." - P66
"엄청 확실히 말하거든. 정말 기억 안나?" 그녀가 말한다. - P66
"당신은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해." - P67
"나는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한다." - P67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가 잡아당겨져 지독히 단순해진 듯한 기묘한 결락감이 그를 덮쳤다. 자신은 이제 이대로 어디로도 갈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대로 녹아 없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그는 갓 생겨난 진흙처럼 아직 젊고, 시라도 읽듯 혼잣말을 했다. - P68
부엌에는 무언가의 잔상이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때로 그런 잔상의 존재를 느끼고는 했다. 어디선가 잃어버린 무언가의 잔상. 그에게는 기억이 없는 무언가의 잔상. - P68
비행기 비행기가 날아 나는, 비행기에 비행기는 날고 그렇지만, 날았다 해도 비행기가 하늘인가 - P69
"그러니까 당신이 비행기를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당신 마음은 어딘가 먼 숲속 깊은 데서 비행기를 생각했던 거야." "혹은 어딘가 숲속 깊은 데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 P70
그도 여자도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비행기. 그의 마음이 숲속 깊은 데서 만들고 있는 비행기를. 그것이 얼마나 크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색으로 칠해졌는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 누가 탈지, 깊은 숲속에서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비행기를. - P70
그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어딘지 매우 리얼한 감촉이었다. 마치 인생 자체처럼 딱딱하고, 매끄럽고, 그리고 멀리 있었다. - P71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 무렵 나는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다. - P71
결국 우리는 그 특별한 무언가를 그저 통과했을 뿐 아니었을까? 마치 스릴 있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듯 그것을 구경하고, 리얼하게 체험하고, 손에 땀을 쥐고, 그리고 조명이 켜지자 무해한 고양감과 더불어 영화관 밖으로 나왔을 뿐 아니었을까? 우리는 무슨 이유인가로 거기서 진실로 귀중한 교훈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고 만 건 아닐까? - P76
그 시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고. - P77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이런저런 인간이 있고, 이런저런 가치관이 있었다. - P79
세상에는 독창적이지 않을 것이 요구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ㅡ아니 뭐랄까 그런 경우가 훨씬 많다. - P80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문장으로 옮길 때 제일 중요한 건 톤을 재현하는 일이다. 톤만 잘 붙들고 있으면 이야기는 정말이 된다. 사실은 다소 다를지 몰라도, 정말이 된다. 사실의 차이가 그 정말의 순도를 높이는 일마저 있다. 반대로 세상에는 사실은 전부 맞는데도 전혀 정말이 아닌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따분하고, 어떤 경우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런 것은 냄새로 안다. - P85
나이 들수록 나 홀로 여행이 재미없어진다. 젊을 때는 다르다. 혼자건 뭐건 어디를 가도 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들면 아니다. 나 홀로 여행도 좋은 건 첫 이삼 일뿐이다. 차츰 경치가 시끄러워지고, 남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된다. 눈을 감으면 불쾌한 옛 기억을 자꾸 떠올리고 만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게 귀찮아진다. 전철 기다리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게 느껴진다. 몇 번이고 시계를 보게 된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번거로워진다. - P87
"타인에게 무언가를 들려줄 수 있다는 건 역시 훌륭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 - P87
아마 평범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인간을 친구로 택하는 것이리라. - P91
정열이란 어떤 시기에는 그 자체에 내재한 힘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 계속되진 않는다. - P100
"결혼은 책임이야. 자립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책임지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란 불가능해." - P101
세상은 넓고, 다양한 가치관이 평행 존재한다. 꼭 우등생이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 P106
"전부 끝난 뒤, 임금님도 신하들도 모두 배를 잡고 껄껄 웃었습니다." - P116
"내 생각에, 깊은 슬픔에는 언제나 약간의 해학이 담겨 있어."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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