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은 ‘과거‘에 속하지 않았다. 처음 슈레버 사건을 접하는 독자는 이 책이 지금은 치료된 이가 자신의 과거 정신병을 회상한 것이리라고 무심코 가정했다가 나중에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 - P224
슈레버는 자신의 여성화나 태양광에 의한 임신 등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혀 치료되지 않았다. - P224
프로이트가 사례 연구를 출판한 다섯 명의 환자는 다음과 같다.
도라(1905) - 히스테리
꼬마 한스(1909) - 거세 불안
쥐인간(1909) - 강박 신경증
슈레버(1911) - 편집증
늑대 인간(1918) - 유아기 신경증 (여기에 어느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짧은 보고(1920)를 포함시켜 ‘6개의 사례 연구‘라고 묶기도 한다.) - P226
프로이트가 말했듯, 정신분석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도움이 되는 것 - P226
슈레버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고, 그의 망상은 정신분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 P226
편집증 환자는 신경증 환자와 달리 거리낌 없이 하고싶은 말만 하기 때문에, 슈레버의 경우 그의《회상록》을 잘 읽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 P227
프로이트의 결론은 슈레버의 억압된 동성애가 편집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슈레버의 숨은 애정의 대상으로 그를 치료했던 닥터 플렉지히를 지목했다. - P228
슈레버의『회상록』이 호모에로틱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음을 감안하면 프로이트가 동성애를 말한 것은 딱히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회상록』에서 플렉지히가 시종일관 슈레버의 박해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플렉지히를 슈레버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까다로운 트릭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이를 단 네개의 문장으로 해냈다는 데 있다. - P229
[그(플렉지히)는 나(슈레버)를 증오한다.]
프로이트의 억압 공식에 따라, 주어와 목적어는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나는 그를 증오한다.]
가 된다. 그런데 이는 다음 문장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여기에 억압 공식을 다시 적용하면, 우리는 맨 밑바닥에 감춰진 최초의 형태를 얻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 P229
슈레버가 여성으로 변한 것은 플렉지히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었다. - P230
이런 추론 과정이 참신하기보다 뭔가 단순하고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우리 사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탓도 있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이나 꿈, 소설이나 영화 등을 관조할 때 주어, 목적어, 동사를 바뭐 끼워 보는 것은 기본적인 체크리스트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30
학설의 타당성 논란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아직도 프로이트를 읽는 이유 - P230
독자들은 프로이트가 환자의 혼란스러운 진술에서 하나의 명확한 문장을 추출한 뒤 이를 반대 방향으로 변주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는 진기한 구경거리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머리에 모터가 달리는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 P230
「엠마순스」(1948) 마지막 문단에서 보르헤스는 감정의 진실은 언제나 "상황과 시간과 한두 개의 고유명사가 거짓인" 채로 나타난다고 썼다. 이는 프로이트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었다. - P230
편집증이 자신의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체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박해받는다고 느끼는 망상이라면, 사랑의 대상이자 박해자인 닥터 플렉지히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플렉지히의 의미가 슈레버의 남자 형제일 것이며, 나아가 그 인물은 "(동생이 아닌) 형이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아마 그 형은 죽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런 심증을 가지고 그는 『회상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형에 대한 기억"이라는 지나가는 한 구절을 찾아낸다. - P231
신은 형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사람, 아버지를 뜻한다. 전능한 그는 슈레버가 여자가 되는 책임을 전가하게 해주는 핑계이기도 하다. 여성으로 변하라는 신의 명령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거세 위협의 반복일 것이다. 실제로 슈레버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여성적인 행동을 보일때마다 그런 위협ㅡ흔히 체벌을 동반한ㅡ을 하며 사내답게 만들려고 애썼다. - P231
프로이트는 슈레버에게 만일 자식, 특히 아들이 있었다면 충족되지 못한 동성애적 애정을 쏟는 출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여성화나 임신에 대한 망상은 자신이 여성이었다면 자식을 출산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기대도 반영한 것이었다. - P231
"나는 구체적인 자료를 모두 알고 있어야 분석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 P232
그(프로이트)는 결국 실험과 데이터를 중시하는 자연과학자로 훈련받았으며, 찾아온 환자의 말투나 옷차림의 구체적 디테일에 관한 그의 예리한 관심은 문학가, 더 나아가 영화 평론가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 P232
1932년 자크 라캉은 편집증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편집증이 동성애의 억압에서 비롯된다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 P232
1972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의 슈레버 해석을 비판했다. 요점은 프로이트가 정신질환을 집요하게 가족 구조 안에 가두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 P232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삼인칭으로 써 보기도 한다. 자신은 분리되어 안전해지고, 위협이나 고통은 삼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책이 되면, 그 거리는 영원한 것이 된다. - P239
왜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 P240
우리가 상상하는 배신 장면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나온다. - P241
태도의 돌변과 인격을 위장해 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돌변은 순간적이고 위장은 오랫동안 갈고 닦는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하는 쪽의 입장에선 대개 한 가지 사건으로 경험된다. - P242
배신감은 강렬할수록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놀라움이 역으로 배신의 정의를 흔들기도 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배신의 주요 내용인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었다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일인데, 단지 조금 미리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용납 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되는일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이유는 모른다. - P242
아마 우리는 신뢰받는다는 느낌을 좋아하고, 덕분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는 데 안도하고, 그것에 터무니없는 대가를 지불하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 P242
우리는 돌변한 태도가 주는 놀라움이 위장된 인격의 본질이나 배신의 실제 내용보다 더 큰 관심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겁에 질린 사람의 태도이다. - P242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들이 이 유리한 환경ㅡ놀라게 한 것만 사과하면 되는ㅡ을 잘 이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채링턴 씨(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사상 경찰) 처럼 직업적인 기만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일관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갖지 않는 게 보통인 듯하기 때문이다. - P242
자신이 타인을 기만했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기대나 신뢰를저버렸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기준이 다른 쪽에 있으니말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43
무해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저녁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다음 날 아침 ‘나답지 않게 실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하자. 그가 그날 말을 해도 되고 아껴도 되는 여러 선택 앞에서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 P243
우리의 언행은 기존의 자신의 언행에 무엇을 추가하거나 취소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 P243
남의 말은 알아듣기 힘든 법인데, 취소라는 차원 때문에 우리의 의사소통은 한층 복잡해진다. - P243
문제는 그가 주관적으로 뭘 취소하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어제의 경박한 언행을 취소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제는 광대같더니 오늘은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사실 그이상으로 깊이 헤아려 줄 의무가 타인에게 있을 리 없다. - P243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타인의 신뢰를 계속 침해하는 방식이라면 자문해 봐야 할 것 같다. - P244
자기 이미지라는 것도 결국 타인의 시선을, 관객을 가정하고 형성된 것이 아니었나?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그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P244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 스페인에서 출간되었다. - P246
이야기는 바야흐로 폴린 케일을 격분시킨("비밀접선한다는 인간이,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나가나?") 장면에 이른다. - P247
환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놓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데도 상대에게 다가갔다고 믿게 만들어 준다. - P248
가족 대여 서비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부재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불러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적인 서비스였던 것이다. 바투만은 역으로 심리 치료라는 것 자체가 치료자가 부모 역을 맡는 일종의 가족 대여 서비스가 아닌가 자문해 본다. - P250
"사람들은 가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 P250
결국 이들은 순진한 서방 방문자의 역할, 즉 주민들의 소박한 모습에 감탄하지만 마을 전체가 세트장인 건 눈치채지 못하고 나오는 유서 깊은 바보 역할을 재현한 셈이 됐다. - P251
알다시피 영화 「트루먼 쇼」에는 오직 한 사람을 속이기위해 존재하는 가짜 마을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끔찍한 것은 마을 사람 누구도 트루먼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 점이다. 어찌 이런 잔인한 공모가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이제알 것 같다. 이건 리얼리티 쇼가 아니며, 속고 있는 건 트루먼이 아니라 시청자이기 때문이다. - P251
「트루먼 쇼」의 트릭은 이런 것이다. 트루먼이 속고 있는 한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속지 않는 자 편에 있다고 느낀다. 트루먼이 바보같이 속아 넘어갈수록 시청자는 더욱 이 쇼를 신뢰한다.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자를 봐도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오히려 체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건 속거나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거기에 속하느냐일 뿐이니까. - P251
가짜 가족이라도 붙들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해해 줘야 할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 P252
내려다볼 대상이 나타나면 우리 마음은 편해진다. 크게 속을 준비는 이런 식으로 마쳐진다. - P252
외국어가 정보의 방화벽 역할을 하던 시절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핀란드어 폴더 논란의 진정한 승자는 구글 번역기인 모양이다. - P256
뒷날 그(조지 블레이크)는 인터뷰에서 후회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고 했다. "배신하려면 먼저 거기에 속해야 한다. 나는 속한 적이 없다." 이 유명한 말은 영국의 민족적, 사회적 편협성에 대한 고발로 여겨졌다. - P257
스파이로서 블레이크의 최대 업적은 동베를린 지하에 미국과 영국이 땅굴을 파서 몰래 설치한 감청 시설을 소련에 알려준 것이다. 덕분에 소련은 이 시설을 계획 단계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공 후 일 년 넘게 운용되도록 모른 체하고 있었다. - P258
작가 존 르카레의 말은 어떤 일반적인 정서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필비 (케임브리지 5인조의 한 명)를 아주 싫어하지만 블레이크에게는 동정심을 느낀다. 블레이크 같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들이 봉사하는 사회 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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