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 슈레버라는 사람이 1903년에 출판한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상록》이라는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사람인지라 아직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상 슈레버라는 인물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와 더불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분야의 대가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위에 언급한 슈레버에 대해 분석한 내용들도 몇가지 나오는데, 프로이트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분석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이 챕터 막판에 자크 라캉,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같은 철학자들도 잠깐 등장하는데 이쪽 분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철학자들에 관하여 책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봐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다음으로 스파이와 관련된 얘기들이 등장한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는데, ‘게오르크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냉전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스파이 중 하나인 귄터 기욤이라는 사람에 관한 간단한 소개로 시작하는데, 그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파견한 스파이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아예 처음 알게 된 인물이라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관련된 내용들이 꽤나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오르크‘라는 것은 암호명이었는데, 서독 정보당국의 대처로 귄터 기욤은 스파이인 것이 들통나게 되어 장기간의 징역살이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욤과 그의 부인 사이에는 피에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자신의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회고록 형식의 책으로 썼다고 한다. 이 책에서 피에르는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1인칭 대신 3인칭으로 화자를 설정하여 책을 쓴 뒤 편안함을 느꼈다고 하면서 얘기가 마무리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p.239에 밑줄 친 것처럼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자신의 경험을 3인칭으로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느꼈던 위협이나 고통을 그 3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시키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보면 글이 가져다줄 수 있는 힘같은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의 흔들리는 감정을 안정시켜 준다고나 할까.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균형 맞추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맨 처음에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나오는 한 장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배신이라는 키워드를 도출한다. 저자는 배신 장면에서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등장한다고 말하는데 이와 관련된 저자의 생각들이 쭉 이어진다.

글을 읽으면서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문장 중 하나는 p.243에 밑줄 친 문장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은 내면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같은 것이 될테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볼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이 아닌 내면에 숨겨져있는 나만이 아는 자아상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별도로 책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요즘 많이 쓰는 말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부르기 쉽게 줄인 일종의 줄임말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자기 연인이 아닌 다른 이성과의 외도 혹은 바람)은 동일해도 자신이 그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게 이 말의 핵심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자아상이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저자는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이 타인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침해하게 되는 경우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이에 관해 개인적인 생각을 좀 보태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현실이라면 자아상은 일종의 이상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가 점점 커질수록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를 하는데 있어 나 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점점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얘기인듯 하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아상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이 그것을 일일이 찾아봐주기를 기대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게 저자의 얘기였고 독자인 나 또한 이에 대해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개개인이 해야 할 것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아상과 현실의 삶을 가급적 일치시켜서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믿음도 함께 회복하면서 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좀 힘들어도 노력하고 열심히 살면서 이상적인 자아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우리들의 삶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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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글은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라는 제목의 글인데 책의 내용에 근거하면 이 제목에 나오는 말이 마누엘 푸익의《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작품에 나오는 문장에 있는 소재인 듯 하다. 이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들이 나오는데 일단은 p.248에 밑줄 친 내용처럼 환상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잠시나마 곱씹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한 스파이 파트에 이 글이 나온 것은 《거미 여인의 키스》속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스파이 역할을 해서 그런 것 같은데,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마누엘 푸익의 작품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를 봐야 좀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가족 대여 서비스‘라는 제목의 글은 제목에서부터 뭔가 속이는 냄새가 난다고 느껴졌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가족을 어떻게 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시나 독자인 내가 맡은 냄새가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이어지는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언급하긴 힘들지만, 독자인 내가 여기서 느낀 이 글의 핵심은 트릭위에 트릭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속고있는 사람을 본다고 하는 것이 내가 속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다. 만약 나를 속이려는 자가 이러한 트릭을 쓰는 사람이라면 아주 고단수의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해보인다. 내가 속지 않고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사기꾼의 말을 믿게 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들은 정말로 조심 또 조심하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책 페이지로는 2장(4page)밖에 안되는 분량의 글임에도 독자인 나의 뇌리에는 엄청난 임팩트로 느껴진 글이었다.


다음에는 ‘비밀과 외국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일기를 쓸 때 비밀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해서 일기를 썼다는 내용도 나오고, 근래에 있었던 정부 문서에 핀란드어가 등장했던 사건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결국 구글 번역기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은 보기 힘들어질 듯 하다는 게 이 글의 결론이었다. 이 글을 보면서 앞으로 이 세상에 비밀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잠시 잠깐은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투명한 흐름으로 흘러가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싶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떤 배신‘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조지 블레이크 라는 인물이 핵심 인물인데, p.257에 밑줄 친 문장에서 참조 할 수 있듯이 글을 읽으면서 배신이라는 것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기 밑줄치지 못한 추가적인 내용들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서 논해보겠다.

이 병은 ‘과거‘에 속하지 않았다. 처음 슈레버 사건을 접하는 독자는 이 책이 지금은 치료된 이가 자신의 과거 정신병을 회상한 것이리라고 무심코 가정했다가 나중에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 - P224

슈레버는 자신의 여성화나 태양광에 의한 임신 등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혀 치료되지 않았다. - P224

프로이트가 사례 연구를 출판한 다섯 명의 환자는 다음과 같다.

도라(1905) - 히스테리

꼬마 한스(1909) - 거세 불안

쥐인간(1909) - 강박 신경증

슈레버(1911) - 편집증

늑대 인간(1918) - 유아기 신경증
(여기에 어느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짧은 보고(1920)를 포함시켜 ‘6개의 사례 연구‘라고 묶기도 한다.) - P226

프로이트가 말했듯, 정신분석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도움이 되는 것 - P226

슈레버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고, 그의 망상은 정신분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 P226

편집증 환자는 신경증 환자와 달리 거리낌 없이 하고싶은 말만 하기 때문에, 슈레버의 경우 그의《회상록》을 잘 읽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 P227

프로이트의 결론은 슈레버의 억압된 동성애가 편집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슈레버의 숨은 애정의 대상으로 그를 치료했던 닥터 플렉지히를 지목했다. - P228

슈레버의『회상록』이 호모에로틱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음을 감안하면 프로이트가 동성애를 말한 것은 딱히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회상록』에서 플렉지히가 시종일관 슈레버의 박해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플렉지히를 슈레버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까다로운 트릭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이를 단 네개의 문장으로 해냈다는 데 있다. - P229

[그(플렉지히)는 나(슈레버)를 증오한다.]

프로이트의 억압 공식에 따라, 주어와 목적어는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는,

[나는 그를 증오한다.]

가 된다. 그런데 이는 다음 문장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여기에 억압 공식을 다시 적용하면, 우리는 맨 밑바닥에 감춰진 최초의 형태를 얻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 P229

슈레버가 여성으로 변한 것은 플렉지히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었다. - P230

이런 추론 과정이 참신하기보다 뭔가 단순하고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우리 사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탓도 있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이나 꿈, 소설이나 영화 등을 관조할 때 주어, 목적어, 동사를 바뭐 끼워 보는 것은 기본적인 체크리스트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30

학설의 타당성 논란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아직도 프로이트를 읽는 이유 - P230

독자들은 프로이트가 환자의 혼란스러운 진술에서 하나의 명확한 문장을 추출한 뒤 이를 반대 방향으로 변주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는 진기한 구경거리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머리에 모터가 달리는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 P230

「엠마순스」(1948) 마지막 문단에서 보르헤스는 감정의 진실은 언제나 "상황과 시간과 한두 개의 고유명사가 거짓인" 채로 나타난다고 썼다. 이는 프로이트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문장이었다. - P230

편집증이 자신의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체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박해받는다고 느끼는 망상이라면, 사랑의 대상이자 박해자인 닥터 플렉지히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플렉지히의 의미가 슈레버의 남자 형제일 것이며, 나아가 그 인물은 "(동생이 아닌) 형이었을 것"이라 단정한다. 프로이트는 놀랍게도 아마 그 형은 죽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런 심증을 가지고 그는 『회상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형에 대한 기억"이라는 지나가는 한 구절을 찾아낸다. - P231

신은 형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사람, 아버지를 뜻한다. 전능한 그는 슈레버가 여자가 되는 책임을 전가하게 해주는 핑계이기도 하다. 여성으로 변하라는 신의 명령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거세 위협의 반복일 것이다. 실제로 슈레버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여성적인 행동을 보일때마다 그런 위협ㅡ흔히 체벌을 동반한ㅡ을 하며 사내답게 만들려고 애썼다. - P231

프로이트는 슈레버에게 만일 자식, 특히 아들이 있었다면 충족되지 못한 동성애적 애정을 쏟는 출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여성화나 임신에 대한 망상은 자신이 여성이었다면 자식을 출산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기대도 반영한 것이었다. - P231

"나는 구체적인 자료를 모두 알고 있어야 분석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 P232

그(프로이트)는 결국 실험과 데이터를 중시하는 자연과학자로 훈련받았으며, 찾아온 환자의 말투나 옷차림의 구체적 디테일에 관한 그의 예리한 관심은 문학가, 더 나아가 영화 평론가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 P232

1932년 자크 라캉은 편집증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편집증이 동성애의 억압에서 비롯된다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 P232

1972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의 슈레버 해석을 비판했다. 요점은 프로이트가 정신질환을 집요하게 가족 구조 안에 가두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 P232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삼인칭으로 써 보기도 한다. 자신은 분리되어 안전해지고, 위협이나 고통은 삼인칭의 어떤 세계 속에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책이 되면, 그 거리는 영원한 것이 된다. - P239

왜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 P240

우리가 상상하는 배신 장면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나온다. - P241

태도의 돌변과 인격을 위장해 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돌변은 순간적이고 위장은 오랫동안 갈고 닦는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하는 쪽의 입장에선 대개 한 가지 사건으로 경험된다. - P242

배신감은 강렬할수록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놀라움이 역으로 배신의 정의를 흔들기도 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배신의 주요 내용인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었다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일인데, 단지 조금 미리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용납 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되는일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이유는 모른다. - P242

아마 우리는 신뢰받는다는 느낌을 좋아하고, 덕분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는 데 안도하고, 그것에 터무니없는 대가를 지불하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 P242

우리는 돌변한 태도가 주는 놀라움이 위장된 인격의 본질이나 배신의 실제 내용보다 더 큰 관심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겁에 질린 사람의 태도이다. - P242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들이 이 유리한 환경ㅡ놀라게 한 것만 사과하면 되는ㅡ을 잘 이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채링턴 씨(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사상 경찰) 처럼 직업적인 기만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일관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갖지 않는 게 보통인 듯하기 때문이다. - P242

자신이 타인을 기만했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기대나 신뢰를저버렸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기준이 다른 쪽에 있으니말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43

무해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저녁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다음 날 아침 ‘나답지 않게 실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하자. 그가 그날 말을 해도 되고 아껴도 되는 여러 선택 앞에서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 P243

우리의 언행은 기존의 자신의 언행에 무엇을 추가하거나 취소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 P243

남의 말은 알아듣기 힘든 법인데, 취소라는 차원 때문에 우리의 의사소통은 한층 복잡해진다. - P243

문제는 그가 주관적으로 뭘 취소하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어제의 경박한 언행을 취소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제는 광대같더니 오늘은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사실 그이상으로 깊이 헤아려 줄 의무가 타인에게 있을 리 없다. - P243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타인의 신뢰를 계속 침해하는 방식이라면 자문해 봐야 할 것 같다. - P244

자기 이미지라는 것도 결국 타인의 시선을, 관객을 가정하고 형성된 것이 아니었나?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그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P244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 스페인에서 출간되었다. - P246

이야기는 바야흐로 폴린 케일을 격분시킨("비밀접선한다는 인간이,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나가나?") 장면에 이른다. - P247

환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놓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데도 상대에게 다가갔다고 믿게 만들어 준다. - P248

가족 대여 서비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부재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불러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적인 서비스였던 것이다. 바투만은 역으로 심리 치료라는 것 자체가 치료자가 부모 역을 맡는 일종의 가족 대여 서비스가 아닌가 자문해 본다. - P250

"사람들은 가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 P250

결국 이들은 순진한 서방 방문자의 역할, 즉 주민들의 소박한 모습에 감탄하지만 마을 전체가 세트장인 건 눈치채지 못하고 나오는 유서 깊은 바보 역할을 재현한 셈이 됐다. - P251

알다시피 영화 「트루먼 쇼」에는 오직 한 사람을 속이기위해 존재하는 가짜 마을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끔찍한 것은 마을 사람 누구도 트루먼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 점이다. 어찌 이런 잔인한 공모가 가능한가 궁금했는데, 이제알 것 같다. 이건 리얼리티 쇼가 아니며, 속고 있는 건 트루먼이 아니라 시청자이기 때문이다. - P251

「트루먼 쇼」의 트릭은 이런 것이다. 트루먼이 속고 있는 한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속지 않는 자 편에 있다고 느낀다. 트루먼이 바보같이 속아 넘어갈수록 시청자는 더욱 이 쇼를 신뢰한다.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자를 봐도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오히려 체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건 속거나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거기에 속하느냐일 뿐이니까. - P251

가짜 가족이라도 붙들어야 할 처지의 사람들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해해 줘야 할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 P252

내려다볼 대상이 나타나면 우리 마음은 편해진다. 크게 속을 준비는 이런 식으로 마쳐진다. - P252

외국어가 정보의 방화벽 역할을 하던 시절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핀란드어 폴더 논란의 진정한 승자는 구글 번역기인 모양이다. - P256

뒷날 그(조지 블레이크)는 인터뷰에서 후회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고 했다. "배신하려면 먼저 거기에 속해야 한다. 나는 속한 적이 없다." 이 유명한 말은 영국의 민족적, 사회적 편협성에 대한 고발로 여겨졌다. - P257

스파이로서 블레이크의 최대 업적은 동베를린 지하에 미국과 영국이 땅굴을 파서 몰래 설치한 감청 시설을 소련에 알려준 것이다. 덕분에 소련은 이 시설을 계획 단계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공 후 일 년 넘게 운용되도록 모른 체하고 있었다. - P258

작가 존 르카레의 말은 어떤 일반적인 정서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필비 (케임브리지 5인조의 한 명)를 아주 싫어하지만 블레이크에게는 동정심을 느낀다. 블레이크 같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들이 봉사하는 사회 계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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