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의 제목은 ‘잠깐 쉬는 바람에‘라는 것인데, 앞선 포스팅에 나왔던 존 르카레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독자인 나는 글을 읽으면서 계속 존 르카레의《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는 소설에 대한 설명과는 별개로 도대체 왜 제목이 ‘잠깐 쉬는 바람에‘ 일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는데, p.295에 밑줄 친 문장에서 글쓴이의 의도를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글쓴이가 이 소설의 핵심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제목을 이렇게 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목에 대한 논의와는 별도로 p.296에 밑줄 친 문장은 조직이라는 것에 속해있는 개개인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단지 자기자신의 생존의 차원을 뛰어넘어 조직에도 필요한 일이 진정 무엇인지를 독자들이 고민해보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국의 영문학자들이 주인공인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교수들』(1984)에는 셰익스피어의 첫 일본어 번역의 희한한 제목들을 부끄러워하는 일본인 번역가가 나온다. - P286
유명한 고전의 상당수가 제목부터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우리는 주기적으로 접하게 된다. 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from the Cold)》도 그런 지목의 대상이 되었는데, 제목을 ‘현업에 복귀한 스파이‘로 해야 옳다는 주장이 있다. - P287
위대함은 보통 자기가 깨닫지 못할 때 달성되는 듯하다. - P287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추운 나라』) - P287
『추운 나라』는 영국 베스트셀러를 넘어 곧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국추리작가협회상(대거상)과 미국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상)을 다 받았다. 두 상을 석권한 건 이 소설이 처음이다. - P287
그레이엄 그린은 "내가 읽은 최고의 스파이 소설"이라고 찬양했다. 그 뒤 모든 판본의 표지를 장식하게 될 이 찬사는 원로 작가 J. B. 프리스틀리의 찬사("최고의 구성, 차가운 지옥의 분위기")와 함께 당대의 흥분을 간직하고 있다. - P288
초기의 장르 소설과 후기의 문학적인 소설이 상호 보증하면서 양자가 점진적으로 더 많은 신용을 획득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 - P289
‘순수함‘을 보증하는 쪽, 즉 더 많은 보증의 책임을 진 쪽은 초기의 소설 『추운 나라』이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얽혀 있다는 데 있다. - P289
cold는 여러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춥다, 차갑다 말고도 은퇴했다. 현업에서 떠났다는 뜻도 있고, 길을 잃었다. 준비가되지 않았다는 뜻도 있다. ‘워밍업‘ 할 때 그 warm의 반대편의미로 말이다. 이런 용법은 컴퓨터를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켜는 ‘콜드 부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P289
원어가 중의적이더라도 번역은 선택을 해야 한다.《추운 나라》는 cold의 가장 익숙한 뜻 ‘춥다‘를 택한 번역이다. 이런 선택의 강점은 일차적인 뜻이 파생시키는 여러 의미들을 가장 많이 붙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차가움 - 냉혹-냉전으로 이어지는 의미의 연쇄는 이 소설이 냉전의 절정기에 등장했다는 시간적 맥락을 부여한다. - P290
‘나라‘의 추가는 스파이에게 국제적인 임무를 기대하는 독자들, 특히 스파이라는 말 자체를 외국어로 수입한 동양의 독자들의 상상에 부합했다. - P290
the cold라는 어구는 소설 초반 주인공 리머스와 상관 컨트롤의 두 번의 면담 중에 나온다. 컨트롤은 말한다. "사람이 영원히 추운 곳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 P291
"이것이 자네의 마지막 임무일세. 그러고 나면 자네는 추운 곳에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거지." - P292
추운 곳은 고생스러운 정보부 업무 또는 직장 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 듯하다. - P292
(대부분의 모호한 제목들은 본문 속에서는 어떤 뜻인지 밝혀진다.) - P292
그(컨트롤)의 목적은 가능한 한 the cold라는 말의 편리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 편리함은 모호함에서 나온다. 지금 그가 행하는 것은 ‘설득과 약속‘인데, 리머스의 동의를 받아 낼 수만 있다면 the cold가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지든 컨트롤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 P293
컨트롤 덕분에 우리는 리머스의 직업적 상황이라는 주제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때 떠오르는 또 하나의 번역이 서두에 적었던 ‘현업에 복귀한 스파이‘이다. - P293
‘현업에서 떠나 있다‘는 앞에 열거했던 cold의 여러 뜻 속에들어 있던 것이다. 여기에 ‘돌아오다‘를 붙이면 ‘현업에서 떠났다가 복귀한 스파이‘라는 제목이 얻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컨트롤과 리머스의 면담에서 암시된 의미인 ‘외근, 바깥에서의 고생, 또는 직업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과 정반대의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 P293
은퇴와 복직은 르카레의 전 작품에서 하나의 상수로 존재하는 주제 - P294
이 책은 인간이 공백기를 갖는다는 것, 정신이 해이해진다는 것에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있는지에 관한 소설이다. 그가 계속 조직에 있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을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잠깐 인간으로 돌아온 뒤 그건 불가능한 일이된다. - P295
르카레는 말한다. 인간은 뜻하지 않게 서툴러진다. 그런데 그건 결함이라기보다 안전장치인 것이다. - P295
발표 당시《추운 나라》는 비도덕적인 조직과 그에 철저히 농락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단지 그 얘기뿐이었다면 이 소설의 긴 여행은 꽤 오래전에 멈추었을 것이다. - P295
우리가 생각처럼 간단히 비인간화되지 않는 존재이며 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무수한 계기가 주어져있다는 건 희망을 준다기보다는 두려운 이야기이다. 그 계기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더 이상 타인과 조직에 책임 전가를 할 수 없고 자기 행위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 P295
르카레의 윤리학을 응용하자면, 우리는 의식적으로도 서툴고 생경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이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직에도 필요한 일이다. 숙련자와 동조자에만 익숙한 조직은 이미 병든 것이기 때문이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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