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 이어서 나오는 이종산 작가님의 ‘두 친구‘라는 작품이다. 예은과 지원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한동안 따로 연락없이 지내다가 제주도에 사는 지원이 예은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처음엔 그냥저냥 평범한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읽다보니 뭔가 스산한(?)느낌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뒤통수가 오싹해졌다.

이 단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뭔가 메시지가 느껴졌는데,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때만이 진정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자인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기에 작가가 생각한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느꼈다. 한편으로는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엿볼 수 있었는데, 상대방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잘 돕는 것이 뒤늦게 돕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높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나온 이 단편 소설을 읽고 독자인 나의 느낌대로 끄적이긴 했지만, 실상은 나도 여기 나온 ‘예은‘이라는 인물처럼 행동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어려움에 빠진 친구를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때때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작가님이 이 작품에 등장시켰던 ‘작은 짐승‘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독자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 혹은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마음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아마 이것은 이 소설을 쓴 작가님의 생각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겉으로는 하하호호 웃으면서도 뒤에서는 혹은 속마음으로는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사람들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내 안의 ‘작은 짐승‘ 이라는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을 법한 감정인듯하다. 인간이라는 게 무슨 성인군자나 득도한 신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두 친구‘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님의 프로필이 나오는데 이 소설이 약간은 섬뜩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추론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쓰셨던 작품들이 주로 호러, 미스터리 같은 것들 위주였던 분이시라 그랬던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공포소설 장르 쪽을 일부러 찾아보거나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간만에 Axt를 통해 접하면서 이 쪽 분야도 나름의 매력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오싹함이 다시금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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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다음에는 소설가 송섬 님의 ‘무제‘라는 작품이 나온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기념일‘이었는데 수록된 작품을 읽다보니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념일과는 그 성격이 약간은 다른 느낌의 날이었다.

주인공은 일기를 쓰는 오랜 습관이 있는데, 뭐 거창하게 다이어리에 주저리주저리 쓰는 것은 아니고 달력에 자신의 스케줄과 해당 날짜에 있었던 일을 적어두는 정도로 매일 기록을 남기는 정도의 일기다. 근데 특이한 점은 1년 중 하루(여기서는 3월 13일)가 꼭 비어있어서 왜 그런가 봤더니 12일날 자고 14일날 깨어나는 아주 독특한 패턴이 주인공에게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주인공은 ‘병원이라도 한 번 가봐야하나‘ 같은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아는 지인의 지인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한다. 근데 결과적으로는 그냥 주인공 자신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마다 정말 남들은 생각조차도 하기 힘든 고민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고민없는 사람은 없다는 나 스스로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냥 크게 문제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잠깐 고민이 들 수는 있을지언정 그 또한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좀 더 집중하는게 올바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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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송섬 님의 ‘무제‘ 다음에는 문학평론가 황예인 님의 책 리뷰가 2개 나온다. 하나는 윤고은 작가님의 《불타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오쿠다 히데오 작가님의 《라디오 체조》다.

첫 번째 책인 《불타는 작품》은 리뷰해주신 평론가님의 말처럼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요즘 트렌드가 명확한 결론보다는 약간은 독자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책인《라디오 체조》는 정신과 의사인 이라부가 등장인물들과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번 쯤 읽어보고픈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통해 쾌감을 느낀다는 컨셉이 뭔가 후련함을 전해준다고나 할까. 캐릭터가 독특한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뻔하거나 상식적이기 보다는 예측불가의 캐릭터인 이라부가 어떤 인물일지 평론가님의 리뷰 너머에 있는 실제 책의 본문 내용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샘솟게 만드는 리뷰였다.

연락이 끊어졌을 즈음, 지원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걸 힘들어했고, 항상 불안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지원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콕 짚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 P124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지원은 밝고 천진난만했다. 어느 자리든 지원이 오면 분위기가 밝아지고는 했다. 사람들은 지원을 좋아했다. 예은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 지원이 부러웠다.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는 지원이 정말 좋기도 했다. 예은이 의기소침해질 때면 지원은 항상 밝게 응원하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 P125

그런 관계가 뒤집힌 것도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지원은 점차 어두워졌다. 몇 년 전부터는 사람도 잘 만나지 않는 것 같았다. 지원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일단 아무 일이나 해봐. 그래야 적성을 찾지." 예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위로나 응원을 섞는 것도 잊지 않았다. - P125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태평한 소리를 할까? 부모님한테 용돈 받아 생활하는 것부터 그만둬야지. 당장 돈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작은 짐승은 신나서 맞장구쳤다. 그치! 맞는 얘기야. 재는 정신을 좀 차려야 해, 한가하니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자꾸안 좋은 생각이나 하는 거야. 그러면서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악순환이지.‘ - P125

무슨 일이든 해보라고 하면 지원은 수업료가 비싼 클래스를 새로 등록했다. 요가필라테스, 발레, 수영, 글쓰기 수업, 인문학 강좌, 연기 교실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베이킹도 그중 하나였다. ‘차라리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지‘ 예은은 그런 말을 꾹 삼키고는 했다. 몇 번 넌지시 얘기한 적도 있었지만, 지원은 엄두가 안 난다고만 말할뿐이었다. 예은은 그런 지원이 답답했다. 나중에는 위로나 응원도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 P125

예은은 피곤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들이 있어 며칠 동안 무리하게 일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지금 담당하고 있는 작가의 원고 교정을 마무리하고 급하게 메일을 보낸 뒤에 오후 3시쯤 출판사 사무실에서 나왔다. 공항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고, 수속하고 대기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비행기는 출발이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5시 반쯤 겨우겨우 비행기를 타고 나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지원을 만나 먹을 것을 산다고 여기저기를 한참 돌아다녔다. - P126

이제는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체력이 거의 바닥났다. 하지만 예은 역시 배가 부르기도 했고, 지원의 가게가 보고 싶기도 했다. 잠깐 산책하는 정도야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게도 이 동네에 있다고 하지 않나. 어차피 자정까지 할 일도 없었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 P126

예은도 오늘 코트를 입었다. 한 달 전쯤에 백화점에서 산 캐시미어 울 코트였다.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몇 번 입지는 못했다. 출근할 때 입고 갈까 하다가도 결국 손이 가는 것은 작년부터 닳도록 입은 패딩 점퍼였다. 그러나 요즘 매일 입는 그 점퍼는 여행에서 입기에는 궁색해 보였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지원을 만나는 것인데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 P127

예은은 지원이 건네준 자신의 코트를 걸치고 말했다. 새삼 좋은 코트를 사놓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이 나는 카멜색 코트가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지원이 입은 패딩 점퍼는 수수해 보였다. 그래도 아마 좋은 브랜드일 것이다. 지원은 예전부더 비싸고 좋은 옷만 입었다. 예은이 대학 때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던 돈은 물론이고, 취직해서 매달 받는 월급으로도 사기 어려운 가격의 옷들이었다. 지원은 그런 옷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 입었다. - P127

자신의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값비싼 옷을 입고 눈물을 글썽이며 하소연을 하는 지원을 보고 있으면 예은은 하품이 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짜증이 치밀고는 했다. "집에만 있어서 그래. 자꾸 나와서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지." 그런 식으로 가시 돋친 충고를 던질 때도 있었다. 그런 일이 늘면서 지원도 예은에게 더는 우울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지원이 자기만의 세계에 더 깊게 빠지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 P127

지원에게는 정리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상태가 불안정해질수록 강박도 심해졌다. 종종 지원의 집에 놀러가보면 집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사방이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지원이 사는 집에 있는 방들이 그렇게 깨끗한 것도 그리 신기한 일 같지 않았다. 지원은 매일 그 집을 쓸고 닦고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깨끗한 상태가 될 때까지. - P128

"나는 나무가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준 거라고 생각해. 아주 외로운 여자였을 거야. 그 여자"
지원이 나무를 만졌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것을 쓰다듬는 것처럼 예은은 뒤로 물러났다. 그 나무보다 지원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지원은 얼마간 나무를 만지며 미소 짓다가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 P129

"이게 내 가게야."
지원이 손을 펼쳐 앞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것은 폐가였다. 오래 방치된 빈집 같았다. 빈집을 둘러싸고 있었을 담은 무너져 있었고, 집에 얹힌 초가지붕은 흘러내리듯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문짝은 아예 떨어져나가 마당에서 뒹굴었다. 집 뒤쪽 벽은 부수다 만 것인지 뻥 뚫려 있는 듯했다. 집 주변에 불빛이 없어서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 P129

지원은 기분이 좋아진 듯 웃으며 예은의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은 친밀했다. 그러나 예은은 약간 숨이 막혔다. 여기 와서 조금씩 느끼기는 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지원은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입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기서 혼자 지내면서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이겠지. 예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지원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 P130

예은은 사람에게는 어떤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 강하지 않다. 마음이 약해지면 사람의 정신에는 분열이 생긴다. 분열이 생긴 틈으로 온갖 것이 흘러들어온다. 주로 악하고 어두운 것들이 환각이나 환청이 생길 수도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보고 들리게 된다. 그러다 정신이 아예 산산조각 나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선을 넘어가면 사람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 그 세상은 외롭고 무서운 곳이다. - P130

예은은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랬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남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저 혼자 끌어안고서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선을 넘지 않고 이 세상에 남으려 힘껏 버텼다. - P131

지원이 우울한 목소리로 밤에 전화를 걸어와 몇 시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들어주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원과 있으면 함께 파도에 삼켜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은은 우울과 불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선 너머의 세계로 데려가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1년 전에 지원은 그 파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파도가 지원을 휩쓸고 가버렸다. 지원은 선 너머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 P131

예은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됐다. 지원과 화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나 순진하게 느껴졌다. - P131

케이크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어설프게 쌓아올린 스펀지 시트들은 한쪽으로 무너지듯 기울었고, 그 실패의 무더기에 하얀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케이크 재료로 장난을 쳐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케이크 위에는 새빨간 크림으로 열한 글자가 레터링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예은 생일 축하해‘ - P132

지원은 그렇게 물으며 예은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깊은 시선을 예은은 견딜 수가 없었다. 지원의 눈빛과 시선이 예은의 안에 있는 작은 짐승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속이 간질거렸다. 몸까지 가려운 듯했다. - P133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은 많은 일을 잘못 기억한다. - P135

예은에게 지원은 지나간 옛 친구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예은은 아직 지원을 놓지 못했다. - P135

‘아무래도 이번에 같이 서울로 올라가는 게 좋겠어. 내일 잘 설득해봐야지?‘
예은은 뒤척이며 생각했다.
"소용없을 걸? 쟤는 이미 망가졌어. 낫기 어려울 거야."
작은 짐승이 불쑥 나타나 말했다. 작은 짐승은 눈앞에 있었다. 언제 밖으로 나온거야?‘ 예은은 눈앞의 작은 짐승에게 반박했다.
"아니야. 나아질 거야 꾸준히 치료받으면 돼." - P135

"이제 와서 위하는 척하기는 예전에 좀 잘하지 그랬어. 재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냉정하게 외면했잖아. 네가 조금만 신경썼어도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것이 작은 짐승의 레퍼토리였다. 작은 짐승은 몸을 도사리고 있다가 한 번씩 불쑥 나타나 그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혼자 있는 깊은 밤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 기쁘거나 슬픈 순간에. - P136

예은은 거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짐승은 집요하게 거울을 들이댔다. 거울에 또 다른 기억들이 지나갔다. 거절했던 순간들. 차가운 얼굴, 냉정한 말, 받지 않은 전화들 예은은 팔로 얼굴을 가리고 쥐어짜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나도 힘들었어. 나도 내 인생이 있잖아. 내 인생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고. 내가 그 애의 짐까지 짊어질 수는 없는 거잖아. 자기 짐은 자기가 감당해야지. 그렇지 않아?" 작은 짐승이 히죽 웃는다. 작은 짐승의 얼굴이 광대처럼 바뀌었다. 하얀 눈물을 달고 빨간 입으로 활짝 웃고 있는 피에로. - P137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지원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것 같았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예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P137

방 안을 떠돌던 검은 그림자가 예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작은 짐승은 펄쩍 뛰쳐나가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친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친구는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예은은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는지도 몰랐던 그것을. 아마 지원도 그럴 것이다. - P139

"내일은 네가 가고 싶은 곳 다 가자. 케이크 가게도 다시 가보고 싶어. 아까는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는데, 이제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안 봐도 알지. 분명 멋질 거야."
두 친구 중 하나가 말했다. - P139

일기를 쓰는 대신 달력의 빈칸에 하루 일과를 간략히 메모하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날짜 옆에는 일어난 시간과 잠든 시간을 적고, 그날의 날씨를 간략한 기호로 표시한다. 굳이 날씨를 기록하는 것은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한 요령이다. 일정과 일기를 구분하기 위해 두 가지 색 볼펜을 사용한다. 일어날 일은 검정펜 이미 일어난 일은 파란 펜.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P141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겠지 - P143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잖아요." - P152

숫자로 따지면 겨우 1년 중 하루 365분의 1이다. 퍼센티지로는 0.27%.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는 높지만 폐암에 걸릴 확률보다는 낮다. 아무튼 그리 큰 손실은 아니다. - P155

0.27%일 뿐이야-나는 최면술사처럼 이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숫자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빈 달력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1년 중 겨우 하루를 잃어버렸을 뿐인데 그 외의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미세한 구멍이 난 모래주머니가 된 것처럼. - P155

나의 하루하루는 무빙워크 위를 걷는 것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흘러간다. 계절에 따라 배경은 계속 바뀌지만 발밑은 평탄하고 편안하며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여유를 부리기엔 약간 빠른 속도로. - P156

결국 그것이 나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도시의 한 지점에서 태어나 쉼 없이 걷다가 다른 지점에서 죽는 것. 엄마도 아빠도 이렇게 살았고 언니도, 오빠도, 친구들도 모두 엇비슷하게 살고 있다. 어쩌다 당근 농사꾼이 된 한 명만 제외하면, 아무튼 나는 지금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말하자면 계속 무빙워크 위를 걷고 싶다. - P156

꽤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 빨대가 꽂힌 유리잔은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메뉴는 아이스 카페모카 (처럼 보였다). - P157

"사람들은 남의 사연을 들을 땐 즉각 스마트한 해결 방안을 내놓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당황한 나머지 당연한 것도 떠올리지 못하거든요." - P158

"전 되도록 남의 손은 빌리고 싶지 않았어요." - P161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엔 남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생활 습관을 바꾸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를 타러 가는 대신 가끔 지각하는 걸 택했어요. 내 앞으로 떨어진 일만 적당히 해치우고 매일 제시간에 퇴근했습니다. 짬을 내어 운동도 했고요. 하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더군요." - P162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 P162

"누군가 사고가 뻗어나가는 일을 막고 있다. 이렇게 느껴본 적 없습니까?" - P163

"이렇게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요." - P163

"몇 날 며칠을 깊이 고민한 결과 저는 이런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어요. 이건 우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저쪽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 P163

"우리의 삶이 두 쪽으로 나뉜 겁니다. 남자는 손날로 자신의 얼굴을 반으로 갈라보였다. "이쪽의 전 1년 중 364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 하루, 매년 8월 15일엔 저쪽의 제가 눈을 뜨지요. 침대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서 그쪽의 삶을 사는 겁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 P163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안심이 되더군요." - P165

지금은 일단 느긋하게 지내고 싶다. 달력이 무어라 말하든 3월 13일은 나와 세계 사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 P166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미로와 덫을 제가 직접 통과해야만 했고요. - P169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 P170

자신에게 늘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던 피디의 말이 이라부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을 지켜보며 스태프는 즐거움을 느끼는 거야. - P174

사람은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기 마련이지만, 그 렌즈가 함께 살아가는 데(혹은 그 렌즈의 소유자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다면, 이라부는 그가 보는 풍경, 그러니까 그가 동참하기를 원하는 세상에 눈을 딱 감아버리는 거지.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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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4-04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안의 ‘작은 짐승‘ ... 잘 관찰하고 돌봐야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오늘 잘 보내시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4 10:59   좋아요 1 | URL
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작은 짐승‘ 하나씩은 있는 듯 합니다. 살다보면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할 때가 종종 있는데 저 또한 잘 관리하는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서곡님도 보람찬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