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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뛴다
유준상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0월
평점 :
배우는 이야기 전달자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기준은 이야기가 재미있느냐 아니냐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재미가 아닌 이야기 안에 충분히 공감할 만한 요소가 있고, 연기적으로 다양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주는 작품을 택한다.
배우 인터뷰 때 종종 일지에 대한 말을 듣는다. "그때 뭐라고 썼는지..", "얼마 전에 촬영 때 쓴 일지 같은 걸 봤어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피곤할 텐데 일기를 꾸준히 쓰네' 생각했다. 배우마다 다를 테지만 대략 그날 분위기, 특이했던 점, 기억 남았던 순간, 내가 잘한 것, 못한 것 등을 쓰는 것 같았다.
배우들은 그걸 끄적거리면서 인터뷰하는구나, 크랭크업은 1년 길게는 3, 4년 전 것도 끄집어내야 하니까. (기자들이 당시 촬영 분위기나 감독, 배우와의 호흡, 에피소드 등을 물어본다) 일지를 들춰 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김혜자 선생님 책 이후로 오랜만에 또 배우 에세이를 읽었다. 배우, 감독, 뮤지션 등 다방면으로 활동 중인 유준상의 에세이였다. 머리말에 이런 말이 있어 눈길을 끈다. '스무 살 이후 지금까지 배우일지 와 공연 일지를 쓰고 있다. 분실한 일지들도 있지만 세어 보니 모두 서른대여섯 권의 노트가 남았다.' 글이 인상적이었다. 공연 일지로 분리해서 쓰는 배우도 있구나.
이 책은 그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쓴 글 중 2015년 때와 <바넘: 위대한 쇼맨> 공연 일지를 엮은 것이다. 꾸준히 쓰는 사람은 조금씩 성장한다. 나도 일기는 가끔 쓰지만 영화글(리뷰, 한줄평, SNS 짧은 글)은 매일 끄적이는 직업병을 떠올릴 때. 성실한 지구력은 습관이 되고 쌓여서 자산이 된다는 걸 실감했다.
배우란 이야기 전달자로서 인물을 더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곱씹는다. 말하는 직업. 사람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성찰하는 거라고 쓰여있다. 말하기는 발음을 꼭꼭 씹어서 한 호흡으로 내뱉는 것이다. 연습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연기처럼 음악, 연출도 겸하며 느낀 소회도 적혀있다. 냉담함, 무관심을 버티고 불안함이 엄습하지만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인생이다.
유준상은 50이 되던 해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다짐도 적었다. 코로나 확진으로 병상에 누워 '나를 위해 뛴다'는 말의 이유도 깨닫는다. 60이 되어서도 그 말을 되새기겠다는 선언이었다. 건강도 일도 명상도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는 반백살 배우의 일기를 들여다보며 나 또한 고무되었다.
하루도 글 쓰지 않고, 영화 보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짧은 인생 동안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공연 일지가 대부분이었지만 곧 영화 <소년들>로 만날 것 같아 기대된다. 에세이를 읽은 후 보게 되는 유준상의 연기말이다.
어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3시간 반 동안 맨정신으로 이야기했다. 배우가 된 친구인데 주로 무대에 서고 영화를 하고 싶어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배우계 이야기, 업계 분위기, 사는 이야기, 신념 등을 듣고 영감도 많이 받았다. '영화'라는 매개체 하나만으로도 두런두런 몇 시간이고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배우란 직업을 더 알아간 기분이다. 집에 돌아와 아침에 읽다 중단했던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아침과 조금 다른게 느껴지더라. 앞으로 내 일을 하는 데 있어 용기와 위로가 될 것 같다. 10월 첫날 출발이 좋았으니 남은 두 달의 2023년도 잘 마무리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