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령 -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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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없다면 어떤 글쓰기도 있을 수 없다

1944년 독일 알고이의 베르타흐에서 태어난 '빈프리트 게오르크 막시밀리안 제발트'. 영국 노리치의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에서 3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브리티시문학번역원 초대원장을 지냈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하인리히뵐문학상, 베를린문학상 등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소설 《현기증. 감정들》,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아우스터리츠》, 세 권의 시집, 에세이 《공중전과 문학》을 남겼다.

이 책은 그가 2001년 자동차 사고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 '린 섀런 슈워츠'에 의해 만들어졌다. 중요한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에세이를 엮어 만들어 냈다.

역시나 처음 만난 작가이기에 역자 후기부터 훑어봤다. 공진호 번역가는 같은 번역가로서 제발트의 번역 방식을 흥미로워했다. 《이민자들》독어를 영어 버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역과 직역 논쟁으로 커졌다.

결국 독어 원작 보다 영어 번역 교정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훗날 제발트 전기 작가는 그래서 독어본 보다 영어본이 원작자가 공들인 완성체라 평가한다. 모르는 작가였지만 집요하고 성가신 완벽 추구 성향에 성격 지향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교통사고 당시 죽음의 순간에도 친구가 낭송하는 자신의 시가 라디오를 흘러나왔다니 자존감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책 소에는 평소 그의 일화나 인터뷰 성향, 문학적 성향을 다루고 있다. 전쟁 직후 때어났다. 알프스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죽음과 늘 가까웠고, 그로 인해 다양한 관점이 생긴듯하다. 스스로를 유령 사냥꾼으로 지칭하며 독일 산문 픽션의 창조자로 불린다. 후반부의 연보까지 읽어보면 전 세계적인 '제발디언'의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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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뛴다
유준상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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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이야기 전달자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기준은 이야기가 재미있느냐 아니냐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재미가 아닌 이야기 안에 충분히 공감할 만한 요소가 있고, 연기적으로 다양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주는 작품을 택한다.

배우 인터뷰 때 종종 일지에 대한 말을 듣는다. "그때 뭐라고 썼는지..", "얼마 전에 촬영 때 쓴 일지 같은 걸 봤어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피곤할 텐데 일기를 꾸준히 쓰네' 생각했다. 배우마다 다를 테지만 대략 그날 분위기, 특이했던 점, 기억 남았던 순간, 내가 잘한 것, 못한 것 등을 쓰는 것 같았다.

배우들은 그걸 끄적거리면서 인터뷰하는구나, 크랭크업은 1년 길게는 3, 4년 전 것도 끄집어내야 하니까. (기자들이 당시 촬영 분위기나 감독, 배우와의 호흡, 에피소드 등을 물어본다) 일지를 들춰 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김혜자 선생님 책 이후로 오랜만에 또 배우 에세이를 읽었다. 배우, 감독, 뮤지션 등 다방면으로 활동 중인 유준상의 에세이였다. 머리말에 이런 말이 있어 눈길을 끈다. '스무 살 이후 지금까지 배우일지 와 공연 일지를 쓰고 있다. 분실한 일지들도 있지만 세어 보니 모두 서른대여섯 권의 노트가 남았다.' 글이 인상적이었다. 공연 일지로 분리해서 쓰는 배우도 있구나.

 

이 책은 그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쓴 글 중 2015년 때와 <바넘: 위대한 쇼맨> 공연 일지를 엮은 것이다. 꾸준히 쓰는 사람은 조금씩 성장한다. 나도 일기는 가끔 쓰지만 영화글(리뷰, 한줄평, SNS 짧은 글)은 매일 끄적이는 직업병을 떠올릴 때. 성실한 지구력은 습관이 되고 쌓여서 자산이 된다는 걸 실감했다.

배우란 이야기 전달자로서 인물을 더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곱씹는다. 말하는 직업. 사람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성찰하는 거라고 쓰여있다. 말하기는 발음을 꼭꼭 씹어서 한 호흡으로 내뱉는 것이다. 연습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연기처럼 음악, 연출도 겸하며 느낀 소회도 적혀있다. 냉담함, 무관심을 버티고 불안함이 엄습하지만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인생이다.

 

유준상은 50이 되던 해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다짐도 적었다. 코로나 확진으로 병상에 누워 '나를 위해 뛴다'는 말의 이유도 깨닫는다. 60이 되어서도 그 말을 되새기겠다는 선언이었다. 건강도 일도 명상도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는 반백살 배우의 일기를 들여다보며 나 또한 고무되었다.

하루도 글 쓰지 않고, 영화 보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짧은 인생 동안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공연 일지가 대부분이었지만 곧 영화 <소년들>로 만날 것 같아 기대된다. 에세이를 읽은 후 보게 되는 유준상의 연기말이다.

어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3시간 반 동안 맨정신으로 이야기했다. 배우가 된 친구인데 주로 무대에 서고 영화를 하고 싶어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배우계 이야기, 업계 분위기, 사는 이야기, 신념 등을 듣고 영감도 많이 받았다. '영화'라는 매개체 하나만으로도 두런두런 몇 시간이고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배우란 직업을 더 알아간 기분이다. 집에 돌아와 아침에 읽다 중단했던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아침과 조금 다른게 느껴지더라. 앞으로 내 일을 하는 데 있어 용기와 위로가 될 것 같다. 10월 첫날 출발이 좋았으니 남은 두 달의 2023년도 잘 마무리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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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나카무라 쓰네코.오쿠다 히로미 지음, 박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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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에서 조연으로,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면 '근사한 노인'이 된다.


흔히 100세 시대라고는하지만 돈, 일, 동기, 가족 등이 없는 노년은 불행하다. 저자 '나카무라 쓰네코'는 의사였지만 돈을 벌어오지 않는 남편 대신 가장으로 일하며 구십 언저리에 은퇴하게 된다. 은퇴 이유도 본인의 의지보다는 넘어져 대퇴골경부가 골절되면서다. 이후 재활과 요양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단다.


이 책은 54세 정신과 전문의 '오쿠다 히로미'가 인생 선배이자 평생 현역인 나카무라 쓰네코의 인생 방식을 알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이 듦을 즐길 수 있을지 혜안이 들어 있다. 나카무라 선생은 구십이 넘어 언제라도 삶을 등 질 수 있기에 정신이 온전했을 때 재산 장례비 등을 처리했고 유서도 썼다. 아들 부부에게 폐 끼치기 싫어 요양 시설을 찾았다. 자식들에게 남겨야 할 것은 돈이 아닌 지혜라고 했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입니다.

인간관계를 서서히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어차피 혼자 왔던 인생 혼자 가는 고독사도 싫지 않다고 했다. 떠날 때도 훌훌 사라지는 거다.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세대라 의연한 마음이 생기기도 할 거다. 거기에 일본인 특유의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이 독립적인 사람을 만들었던 거 같다.


죽을 때는 지위, 명예, 돈, 가족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으니 현실에 충실하자는 생각에 동의한다. 리얼충. 미래에 급급해 종종거리며 불안해하는 것보다 지금을 잘 살면 미래를 완성하는 거라고 믿는 거다. 내일의 걱정과 어제의 후회는 그만하고 오늘 잘 살기에 집중하자.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자.

내담자의 사연은 각각이지만 불안한 노후의 걱정이 대부분이다. 그때 힘이 되는 말과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나이 드는 것을 부정해 봤자 불행해질 뿐,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것도 행복이다. 나이를 한 해 두해 먹으니 주변 사람들 관계가 정리된다. 나카무라 선생은 친구가 많으면 좋기도 하지만, 고민도 커진다고 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 크고 잘 풀리지도 않기 때문에 나와 맞는 친구와 사귀는 게 좋다고 한다. 무의미한 인사치레와 허울뿐인 관계는 정리하자는 것.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지인과 몇 마디 나누면 쉽게 그 생각이 전염되더라. 책에서처럼 행복한 모습, 자랑거리만 올리는 SNS에 휘둘리지 말고 고독을 즐겨 보기로 했다. 인간관계에도 에너지 절약이 필요하다.


지하철 1호선은 유독 천상천하 유아독존 노인이 많다. 가만히 있다가 린치 당하는 것 같은 분들이 참 많은데 나는 늙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저렇게 뒤틀려버린 이유가 있지 않을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지도처럼 그려지는 것 같다. 곧 마흔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구십, 오십 대의 가르침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아 나의 사십 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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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망치는 말 아이를 구하는 말 - 1만 명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범죄심리학자가 전하는
데구치 야스유키 지음, 김지윤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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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만 명이 넘는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말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설명해 두었다. 범죄심리학자인 데구치 야스유키는 무심코 건넸던 말이 부메랑이 되어 아이를 망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일상 대화, 무심코 한 입버릇을 반추하고 진심을 건네길 응원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아이와 어른 사이뿐만이 아니다. 대인관계 전반이 그러하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듯이 한 번 꺼낸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신중해야 하는 거다. 잘 되라고 한 말이 범죄로 이어진다는 섬뜩한 전제가 와닿았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때는 다음과 같다.


*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 : 개성을 파괴하는 말

* 빨리빨리 해! : 미래 예측 능력을 방해하는 말

*열심히 해: 의욕을 떨어뜨리는 말

*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눈부신 자기긍정감을 해치는 말

*공부 좀 해라: 부모와 아이의 신뢰관계를 무너뜨리는 말

*조심해: 공감능력을 죽이는 말


하지만 아이, 부모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서로를 탓하며 증오할 필요 없다는 거다. 저자는 내가 이렇게 된 건 부모 탓이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속의 불만, 분노 등을 토해내 보라고 권한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거나 일기나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키워야 한단다.


부모도 자격이 없다고 포기하기 보다 부모가 처음이라 서툴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래야 부모든 아이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다. 진심을 담아 사과하거나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면 자녀도 부모의 노파심과 걱정 사랑을 알 수 있다.


평범함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처럼. 가족의 모습은 제각각이기에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지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가족도 기업 브랜딩처럼 가치관을 브랜딩 해 보는 거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건강한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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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잠 못 들고 있었군요 -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밤
은종 지음 / 프리즘(스노우폭스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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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힘들고 불행한 일을 듣는 것만큼 항마력 강한 일이 있을까. 최근 드라마 [이로운 사기]를 보고 있어 과거의 트라우마가 미치는 영향을 깊게 생각해 보게 한다. 드라마는 불우한 집안 환경에서 자라난 영재들이 자신도 모른 채 범죄에 가담해 전과자가 되고 가족과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10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타인에게 과하게 공감하는 게 병인 '과공감증후군'을 앓고 있는 변호사와 얽히면서 고구마 뿌리처럼 줄줄이 따라 올라오는 과거가 충격의 연속으로 진행된다.


드라마 속 한무영 변호사는 이로움과 어릴 적 퀴즈대회에서 만난 적 있는데 이 둘뿐만 아닌 여러 사람이 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 물려 있어 복잡하다. 누가 누구를 쉽게 악인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구조다. 이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내 죄도 밝혀야 하는 이중적인 관계. 이 모든 판을 짠 설계자 회장의 정체가 밝혀지며 드라마는 충격 속에서 허우적 된다. 누가 누를 단죄하고 복수할 수 있을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드라마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책 《당신도 잠 못 들고 있었군요》을 읽어보니,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고 이를 해소해 주는 상담가, 정신과 의사 등이 현대사회에 꼭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분들과 대면하지 못할 경우 이러한 책이나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도움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죄책감과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너의 잘 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진정을 넘어선 근본적인 치료일 테니까.

그리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도움을 요청해 보는 거다. [이로운 사기]의 가장 큰 줄기는 이로움과 적목 키드가 인생을 통째로 날린 복수를 하려는 것이지만 변호사, 기자, 검사, 보호관찰관, 정신과 의사 등 다양한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로움 혼자 하려고 했던 일이었지만 한무영의 한 발자국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7살 때부터 명상을 시작해 30년 넘게 타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때 만난 사람과 자연, 자신에게 영감을 얻어 회복력의 정수를 탐구했다. 책 속에 담겨 있는 사적인 에피소드는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의 나를 위해 다독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긋나긋한 말투로 이야기하듯 써 내려간 문체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목소리나 처음 보는 사람의 익명성까지 폭넓은 경험에 도달할 수 있었다. 행복은 상대적이라 도달할 수도 이룰 수도 없다고 믿는다. 다만 행복하다는 추상적인 감정에 자주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느낀다. 깊어가는 가을 힘들고 어지러웠던 여름을 차분히 정리할 책으로 손색없이 추천한다. 조용히 차분히 흔들리는 내면과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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