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조윤범의 유쾌한 강의 - 오페라의 연금술사 : 푸치니의 삶과 음악」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조윤범의 유창하고 유쾌한 입담 때문에 두 시간 동안 강의가 이어지는 내내 한시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푸치니에 대하여 새로 알게 된 내용도 있다.
0. 가난한 삶 속에서 예술혼이 영글다
푸치니는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6 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을 식히지 못하였다. 피사를 방문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관람한 후 푸치니는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헌신과 삼촌의 기부와 장학금 덕분에 가까스로 밀라노 음악원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생활고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하숙집에서 만나서 함께 기거한 친구 중에 오페라 ‘까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작곡한 마스카니가 있었다. 또한 학생 시절의 경험이 나중에 오페라 작품에 반영되기도 했다.
1. 푸치니는 리코르디 출판사의 전속 작곡가였다
푸치니의 음악원 졸업 작품은 관현악곡이었다. 관현악곡은 큰돈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베르디의 오페라 대본 출판권을 독점하고 있던 리코르디 출판사가 푸치니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그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한 것이다. (푸치니는 어머니한테 알렸고, 함께 기뻐했다는 강사의 추측성 설명이 보태졌다.) 매달 출판사는 수당을 제공했다. 푸치니는 리코르디 출판사의 전속 작곡가가 된 후 첫 10 년 동안 오페라 2 편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다. 푸치니의 첫 오페라 ‘요정 빌리(Le Villi)’와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르’가 그랬다. 이로 인해 리코르디 출판사 역시 크게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삼세번이 될 뻔한) 지원이 계속된 덕분에 푸치니는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완성할 수 있었고, 이는 베르디를 잇는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는 데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리코르디 출판사는 베르디에 이어 푸치니까지 오페라 출판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푸치니의 재능을 알아채고 오페라 작곡가로 재목임을 인정한 안목도 놀랍지만 푸치니가 성공하기까지 기다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출판사의 끈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 푸치니는 스칼라 극장의 초연 실패 징크스가 있었다
스칼라 극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고, 오페라 상연 극장으로 유명하다. 당시 스칼라 극장은 (흥행이 보장된) 베르디 오페라를 주로 상연하였다. (오늘 강의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오페라 ‘에드가르’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였다.)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이 커짐에 따라 그의 오페라를 공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과 ‘토스카’에 이어지는 작품 ‘나비부인’을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였지만, 이번에도 흥행에 실패하였다. 이후 개작을 거친 후 극장을 바꿔 재공연하여 크게 성공하였지만, 푸치니는 스칼라 극장에 대한 반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른바 징크스가 되었다. 이 때문에 푸치니는 생전에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올리지 않았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의 초연이 스칼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이루어졌지만, 푸치니 사후에 성사된 일이었다. 얼마나 극적인가. (징크스는 깨지는 것이라고 누가 말하였는지 더는 신경쓰지 않아도 상관없겠다.)
3.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동지였다
오늘 강의에서는 이들이 친해졌다가 불화를 겪고서 헤어졌다고만 언급이 있었고, 강사한테서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였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기에 나중에 정리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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