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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와 음악 ㅣ 범우문고 250
로맹 롤랑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7년 12월
평점 :
베토벤(1770~1827)은 일생 동안 교향곡을 9 곡을 완성하였고, 열 번째 교향곡을 구상하다가 죽음을 맞음으로써 1 악장도 마무리하지 못한 미완성 교향곡도 남겼다. 게다가, 교향곡으로 볼 수도 있고 관현악곡으로 여길 수도 있는 ˝전쟁 교향곡˝까지 있다.[1]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1799 년(29 세)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베토벤과 교향곡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하겠다.
베토벤의 인생 절정기에서 교향곡 제 8 번이 작곡되었음을 상기하자. 그러나 빈 회의 이후 사교계의 관심이 정치로 쏠렸고, 이탈리아 취향이 수입되었다. 한편, 1812 년부터 1816 년 사이에 베토벤의 친구나 지원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죽었다. 이후로 베토벤은 완전히 홀로 되었다.
베토벤은 생활의 번잡함, 빈곤, 갖가지 걱정으로 지쳐서 1816 년부터 1821 년까지 5 년 동안에 피아노를 위한 세 작품(101, 102, 106)밖에 쓰지 못하였다. 그의 적대자들은 그가 이미 힘을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821 년부터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장엄 미사를 완성하였다.
베토벤은 1823 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1824 년 2 월에 교향곡 제 9 번을 완성하였다. 교향곡 제 8 번 이후 10 년이 걸린 셈이었다.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에서 그 당시 시대 상황과 베토벤이 처했던 주변상을 설명한다.
베토벤은 전 생애를 통하여 환희를 노래하려고 애썼다. 송가의 바른 형식과 수용 작품을 고르기 위한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는 1785 년에 쓰였다. 1793 년부터 필생의 계획으로 삼게 되었다. 1808 년에 피아노, 관현악, 합창을 위한 환상곡(일명 합창 환상곡)을 작곡하였고, 1810 년에 괴테의 시 ˝작은 꽃, 작은 꽃잎˝에 작곡한 작품에서도 ˝합창˝의 테마가 나타나 있다. 로맹 롤랑에 따르면, 교향곡 제 7 번의 초안과 ˝맥베드 서곡˝의 계획 사이에서 실러의 싯구를 음악의 테마에 맞추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테마를 사용한 ˝명명축일 서곡˝을 1811 년에 작곡하였다. 1815 년 이전에 교향곡 제 9 번에서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티브 몇 개가 나타났고, ˝환희의 송가˝를 위한 결정적인 테마는 1822 년에 쓰여졌다.
그러나 베토벤은 교향곡 제 9 번을 작곡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피날레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향곡 제 9 번에 ˝환희의 송가˝를 포함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교향곡 제 10 번으로 미뤄질 뻔 하였다. 관현악법에 자신이 있었던 베토벤은 기악으로 피날레를 구상하고 있었다. 교향곡 안에 합창곡을 넣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부신 환희의 아름다움을 노래 부르기를 갈망하였고 결국 위대한 ˝환희의 송가˝가 탄생하였다.
1824 년 5 월 7 일 빈에서 장엄 미사와 교향곡 제 9 번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베토벤은 합창 교향곡을 지휘하였다. 그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는데도 그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한 여가수가 나와서 그의 손을 잡아 청중 쪽으로 돌아서게 할 때까지 그는 그런 광경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연주회는 참으로 대단한 성공이었다. 청중들의 갈채는 마치 폭동 같은 대소동이었다. 경관들이 출동하여 이 대단한 열광을 제지해야만 했다. 베토벤은 연주회가 끝난 뒤 너무나 감동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대단한 성공도 일시적인 것이었다. 음악회에서 들어온 수입은 한 푼도 없었다. 베토벤은 여전히 가난하였고 병약하였고 고독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제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주1. ˝웰링턴의 승리˝라고도 불리는 작품이다. 작품 번호 91. 베토벤이 자필로 악보에 ˝전쟁 교향곡˝으로 제목을 써놓았다. 이 곡은 악장으로 구성되지 않고 2 부로 되어있다. 제 1 부 전쟁터, 제 2 부 승리의 교향곡 표제가 붙여졌다. 연주 시간도 15 분 정도로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