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이 모순과 다를 바가 없다. <비터스위트>는 쓰고 달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개인적으로 외국어 발음대로 붙여진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나 성의가 없다고 느껴지는 데다 무슨 의미인지 확 와닿지 않으니까.) 책 속에서는 ‘달콤씁쓸함’으로 번역하였다. 왜 제목은 번역하지 않은 걸까. 저자는 수전 케인. <콰이어트> 저자로 만났던 기억이 나서 이름이 낯설지 않다.
저자는 슬픈 음악을 듣고 행복감을 느끼는 별난 감정에 젖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였다. 그러면서 이중적인 감정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탐구한 끝에 해답을 찾은 것 같다. 그 답안이 장장 삼 백여 쪽에 달한다. 공식적인 집필 기간은 2016 년부터지만 평생에 걸쳐 연구해온 저자의 노력과 끈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 보자며, 제목 때문에 펼친 책을 그냥 덮지 않기로 한다.
이런 류의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엄밀히 말해 슬픈 음악이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정말이다. 사랑의 감정이 물밀듯 북받쳐 오른다. 음악은 이 슬픔을 이해하는 세상 모든 영혼들과의 깊은 유대감을 주고,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해내는 그 뮤지션의 능력에 대한 경외감도 솟구치게 한다. 음악을 들을 때 혼자일 경우엔 저절로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모으며 기도하는 동작을 취할 때도 많다. 뼛속까지 불가지론자인데다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지도 않는 내가 말이다. 하지만 음악은 내 마음을 열어준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가슴 근육이 팽창되는 느낌까지 든다. 나를 비롯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조차 괜찮게 받아들여진다. 죽음에 대한 이런 평정심은 약 3분쯤 이어지고 말더라도 음악을 들을 때마다 평정심이 일어나면서 나를 조금씩 바꿔놓는다. 초월이라는 것이 자신이 사라지고 모두에게 연결된 느낌이 드는 순간이라면 음악 속에서의 이런 달콤씁쓸한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초월을 가장 가까이 체험하는, 그것도 거듭거듭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체험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때 나는 슬픈 음악을 듣고 행복감을 느끼는 별난 감정에 젖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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