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는 3만 명 남짓의 고려인들이살고 있다. 러시아 (10만 명)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CIS) 각지에 사는 50만 명의 전체 고려인 숫자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우크라이나 내 소수 민족 가운데 그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민족도 없을 것이다. 특히 고려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스탈린 압제의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 시절 ‘홀로도모르‘로 인해 민족 절멸의 위기를 겪었다면 고려인들도 스탈린의 대대적인 강제 추방 조치 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비극에 내몰렸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려인의 등장은 스탈린이극동 연해주에 살던 18만 명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하면서 비롯되었다. 고려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인 일본의 스파이들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스탈린의 기우(杞憂)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1937년 9월 어느날,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 지역 곳곳에 살던 고려인들은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태워졌다. 소련 관리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간단히 짐을 챙겨빨리 나오라는 말만 했다. 한밤중에 난데없이 잠에서 깬 아이들은 겁에 질렸고, 어른들도 어디로 가는지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태운 화물 열차는 한 달여를 달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황무지에 도착했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1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비위생적인 열차 내에서 죽음을 맞았다.
정든 삶의 터전을 놔두고 하루아침에 허허벌판에 도착했을 때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지만 앉아서 신세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려인들은 먹거리와 일거리를 찾아 바삐 움직였다. 봄이 오자 황무지를 개간해 쌀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특유의 근면함으로 3년여가 지나자 고려인 가운데 ‘노동 영웅‘이 탄생하면서 삶의 기틀을 잡아 갔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고려인들의 거주 이전을 막던 족쇄가 풀렸다. 이후 고려인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소련 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돼 러시아를 포함한 15개 나라로 쪼개지면서 발생했다. 소련에서 분리되어 나온 국가들은 고려인들에게 일괄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았다. 소련 국적을 버리고 우크라이나 국적을 얻기 위해서는 복잡한 등록 절차가 필요했지만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살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공식 서류를 갖지 못했다.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접수하는지 그 방법도 몰랐다. 그러다보니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 살았던 많은 고려인들이 무국적 상태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와 한국 모두로부터 최소한의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땅에 살지만 소련 해체 후 국적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버금가는 고난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정부는 2007년 이후 우크라이나 내 무국적 고려인들이 현지 국적을 받을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력해 무국적 고려인들이 스스로 신원을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추방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무국적이던 고려인이 이후 얼마나 국적을 취득했는지는 파악된 것이 없다. 정권 교체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초심을 갖고 지원할지도 미지수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이 이역만리의 땅에 오기까지 그들의 조상이 겪은 수난과 이를 극복해온 과정들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