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중앙정부에서 국정을 처리하는 젊은 관료들을 국가의 핵심 역량으로 키우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집현전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된 학문연구기관으로, 고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름만 남은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임금은 즉위년에 좌의정 박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집현전을 상설기관으로 재정비했다.

임금은 집현전을 명실상부한 학문연구기관이자 인재양성기관으로 거듭나게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 최고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경험과 학식이 풍부한 정1품, 정2품 등 고위관료들을 집현전에 소속시키고 정3품 부제학에게 전담 팀장을 맡겼다. 그리고 젊고 유능한 신진관료들을 직제학, 직전, 응교 등의 실무 관료로 임명하여 집현전이 활발하게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임금은 더 나아가 집현전 소속의 신진 학사들을 경연 검토관으로 참여시켜 집현전에 힘을 실었다. 임금은 이렇게 젊고 유능한 학사들을 상시로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만들어 국가의 새로운 동량을 키우는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임금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학문과 정책을 토론해야 했으므로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세종은 내관들을 시켜 집현전 학사들이 공부에 불편함이 없도록 지성으로 보살피게 했다. 아침과 저녁 식사를 빈객(임금의 손님) 수준으로 대접하게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초기 학문이 뛰어난 젊은 선비를 일컫는 집현전 학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강희맹, 성삼문, 박팽년, 이개, 류성원, 하위지 등 내로라하는 당대 일류 학자들이 모두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세종은 여기에 더해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도입하여 지식경영의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사가독서제의 취지는 오늘날 대학 교수의 안식년제와 비슷하지만 그 운용은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세종 2년(1420), 집현전의 뛰어난 학사를 선발하여 유급휴가를 주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한 것이 시작이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하도록 했지만 1442년부터는 산중의 진관사에서 독서하도록 해서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불렀다.

세조 때 집현전과 함께 폐지된 것을 성종이 예문관을 설립하면서 부활시켰다. 성종은 독서당을 설치하고 규칙을 만들어 계절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고, 월별·주별로 제술시험을 보아 불합격하면 퇴출시켰다. 인조 이후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세종은 사가독서제가 놀고먹는 제도로 악용되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감독체계를 도입했다. 변계량으로 하여금 감독을 맡게 해 독서 목록을 꼼꼼하게 체크했으며, 실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독서 이력과 논문을 제출하게 했다.

사가독서에 선발된 관리들은 일 년에 네 번씩 자신이 읽은 경전과 역사서를 적어서 보고하고 매달 세 번 그간 읽은 책에 대한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다. 이들은 집에서 한시도 쉴 수가 없었으며, 집현전에 출근할 때보다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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