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동사 펠리에어palliare는 ‘외투를 입히다, 덮어 감추다’라는 뜻으로, 완화 의료palliative medicine의 1차 목적이 죽음의 증상을 숨기는 데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말은 죽음이 가까이 올 때 모르핀에 취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말고는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완화 의료를 떠받치는 원칙을 하나만 꼽자면, 살아감과 죽어 감은 이항 대립처럼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짝꿍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로시가 참으로 멋지게 증명했듯이 죽어 가는 사람도 여전히 생기 넘치고 팔팔하다.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내게 기분 좋은 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편안하고 품위 있게 눈을 감도록 도왔다고 느낀 날이다. 하지만 우리가 훨씬 더 선호하는 날은, 죽어 가는 환자가 사람답게 살도록 도와준 날이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다. 환자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식사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거나, 값비싼 입욕제를 풀고 목욕을 하거나, 집에서 키우던 반려견을 잠시 데려와 쓰다듬을 수도 있다. 호스피스 부속 예배당에서 꽃으로 장식된 휠체어를 타고 "믿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거나 정원에 나가서 오색방울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다. 화려한 조명이나 팡파르, 드럼 소리나 환호성 따위는 필요 없다. 모든 환자가 말기 진단을 받은 병동에서도 삶은 참으로 멋지게 펼쳐진다.

내가 호스피스에서 일을 막 시작했을 무렵, 헬렌 던모어라는 시인이 불치병 말기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던모어는 암 투병 과정에서 얻은 체험을 《파도 속에서Inside the Wave》라는 마지막 시집에 담아냈다. 책 표지 뒷면에 실린 작가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nn ‘살아 있다는 말은 파도 속에 있다는 뜻이며, 그 파도가 부서져 사라질 때까지 내내 휩쓸려 다닌다는 뜻이다.’

던모어는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또 다른 파도가 넘실거리다 부서진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넘실거리는 파도의 물마루가 부서지기 직전까지 글을 썼다. 그리고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주변 세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일례로, 수술대에 누워 있는 동안 수술실 문밖에 설치된 작은 폭포를 주목했다. 수술실 직원은 무심코 지나쳐도 던모어는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요소인 물을 발견하자 실내 폭포가 주는 갑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을 찬미했다.

던모어는 64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7개월 뒤에 ‘2017 코스타 북 어워즈Costa Book Awards’에 추서되었다. 수상식 다음 날, 던모어의 딸인 테스 찬리는 BBC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 나와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내도록 엄마가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그 내용을 꼼짝 않고 들었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물리칠 수 없으며, 얼마간이라도 유예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의학은 우리 삶을 연장할 힘을 지녔지만, 의도치 않게 고통마저 연장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생명 연장 치료가 다른 이에게는 의사들이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몹쓸 경험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화학 요법과 수술 때문에 끔찍한 부작용에 시달리던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아무도 죽어 가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진 않을 겁니다." 예전에 한 환자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인간이고 또 하필 암에 걸려 있을 때는 예외라는 겁니다."

심폐 소생술과 인공호흡, 위관胃管을 통한 장기적 영양 공급이 가능한 시대라, 우리는 삶을 끈질기게 이어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나? 오늘날, 의사들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개입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환자가 간신히 연명이라도 하게끔 어떻게 살려 낼 것인가를 따질 게 아니라, 이 환자를 굳이 살려야 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우리는 불가피한 죽음을 두고서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윤리적으로 곤란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수명 연장이라는 약속은 못 지키면서 부작용만 잔뜩 안기는 과잉 진료의 시대에, 의사와 환자와 가족이 이젠 노력을 멈추고 그만 놓아줄 때가 됐다고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 의학의 온갖 업적과 영웅담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사례는 의학적 중재가 오히려 죽음의 경험을 질질 끌면서 훼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렇듯 집요한 과잉 진료를 두고 ‘필사적 종양학desperation oncology’이라는 이름까지 생겨났다. 부작용은 차치하고 성공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데도 치료를 감행하려는 유혹을 일컫는 말이다.

의사들이 환자를 더 오래, 더 잘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오히려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연장한다면, 의학은 분명히 제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살려는 욕구가 불타오를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행동일까? 헨리의 경우, 지나고 나서 보니 그의 시련은 헛된 일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엔 그냥 두면 그를 뻔히 죽게 할 암을 제거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목표였다.

이 균형을 바로잡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침묵이다. 침묵 때문에 웰다잉에서 멀어지거나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죽지 못하는 것이다. 삶을 연장하는 치료의 위험성과 혜택, 그런 치료를 시도할 때마다 치러야 할 잠재적 대가에 대해서 터놓고 솔직하게 논의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형태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가게 된다.

영국 인구의 82퍼센트가 말년에 받길 원하는 치료에 대해 확고한 의견을 품고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있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겨우 4퍼센트에 불과하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대비한다니, 사람에 따라서는 겁나고 불안해서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의사들 중에도 꺼리는 사람이 있는데 일반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렇지만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는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서 자기 의사를 미리 알리고 존중받을 수 있는 수단이다. 이러한 논의를 미룬다면, 훗날 죽음의 방식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당신은 늘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싶지만, 그러한 속내를 미리 밝혀 두지 않으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혼수상태로 마지막 나날을 보내게 될 수 있다. 온갖 가능성에 대한 대화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고 싶은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간혹 섹스와 죽음의 문제를 놓고, 현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를 비교하곤 한다. 빅토리아 시대엔 죽음은 활발하게 논의되었지만, 섹스는 엄격한 금기 사항이었다. 반면 우리 시대엔 섹스는 늘 화제의 중심이지만, 죽음은 입에 잘 올리지도 못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벌어질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을 두고서, 우리는 누군가가 ‘저 세상으로 갔다’거나 누군가를 ‘잃었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둘러싼 문제가 아무리 골치 아프더라도 우리는, 특히 의사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우리가 어차피 죽을 운명임을 거듭 인정해야 한다.

"당신 생각에는…" 보니치 교수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생각에는 그게… 그러니까…"

나는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굉장히 오래 살기는 어려울 거라고 보나요?"

나는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보니치 교수님, 연세가 이미 102세입니다. 당연히 오래 살기 어렵죠! 한 세기를 넘기고 두 번째 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얼마나 더 바라세요?’ 하지만 그녀는 내게 너무도 간결한 답변만 허용했다. 내가 죽음의 ‘ㅈ’ 자도 꺼내기 전에 내 말을 잘랐다.

"네, 그건 어…."
"고마워요. 알았으니까 이젠 나가 봐요."

병실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슬며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회진 시간은 다시 경제학 수업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그녀가 잠결에 평온하게 숨을 거뒀을 때, 나는 극단적 부정 자체가 삶을 연장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보니치 교수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장수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논의하는 ‘올바른’ 방식 따위는 없다. 그저 개인의 취향 문제라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의사는 솔직한 대화의 모범을 정할 수 있고 또 정해야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면 말은 그저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 말보다는 말기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가정과 호스피스와 병원 등 어디에서나 똑같이 편안하고 품위 있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과 치료사를 충분히 확보하는 문제가 훨씬 시급하다.

현역에서 물러날 즈음 아버지는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몹시 속상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환자와 만나는 순간을 가장 즐거워했고, 우리를 인간으로 묶어 주는 고통과 두려움, 희망과 꿈을 나누고 싶어 했다. 이젠 운 좋게 내가 그러한 특권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한때는 죽음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삶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세상을 일찍 하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서서히 늘어지는 살과 하나둘 잡히는 주름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친구가 잃어버린 젊음을 한탄하면 맞장구를 쳐 주긴 했지만 좌절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흰머리와 돋보기 안경을 장수의 선물로 간주했다. 외모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노화는 권리도 아니고 도전도 아니었다. 피해야 할 것도 아니었다. 노화는 특권이었다.

내가 태어난 1972년에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밀러는 90대로 들어서면서 노화를 주제로 비범한 에세이를 발표했다. 나는 그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 특히 <여든이 되면서On Turning Eighty>를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에세이에는 의학의 자만심에 대한 그의 비관적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의학이 그동안 눈부시게 진보하긴 했지만, 불치병은 여전히 인간이 떠받드는 신들의 수만큼 많다. 아무리 박멸하려 해도 세균과 미생물은 늘 살아남는 것 같다. 웬만한 치료가 다 실패하면, 외과의가 나서서 우리를 갈가리 찢고 마지막 남은 한 푼까지 싹 걷어 간다. 그런 게 바로 당신을 위한 진보이다.

오늘날, 의사와 윤리학자, 언론과 대중이 의학의 의도치 않은 해악을 놓고 논쟁한다는 점에서 밀러는 대단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에세이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불치병, 즉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그의 성찰이었다. 밀러에 따르면, 젊음의 진정한 척도는 시간이 아니라 태도라고 주장한다.



여든 살 나이에 불구나 병자가 아니라면, 건강을 유지하고 여전히 산책을 즐기며 식사를 맛있게 한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잠을 잘 잔다면, 꽃과 새, 산과 바다에 여전히 마음이 동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니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이는 더 어린데도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하루하루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상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작은 소리로.

"빌어먹을! 난 당신의 졸개가 아니야!"

거듭해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을 세상에 내놓은 죄를 저지른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만족하며 산다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있다면, 점점 더 심술궂고 독하고 냉소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인생을 참 멋지게 살고 있다.



내 경우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밀러처럼 경외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환자들을 돌보는 것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다. 내 주변엔 인생을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환자들이 많다. 그리고 마땅히 슬픔에 잠겨야 할 상황에서 정반대로 반응하는 환자들도 아주 많다.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마련이다. 피터라는 환자는 죽기 직전에 비통함과 아픔을 애절하게 토로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오. 나는 내 딸을 사랑하오. 나는 이 세상 모든 걸 사랑하오."

그 말에 담긴 애절함은 가만히 듣고 있기 어려웠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직업상 슬픔에 수없이 노출된 데다가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을 해 왔는데도, 나는 암이 내 아버지를 죽일 거라는 충격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낮에는 최대한 덤덤한 마음으로 일을 수행했지만, 아니 수행하는 척했지만, 밤에는 지푸라기를 움켜잡으며 애를 태웠다. ‘시험약’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인터넷에서 특효약으로 떠도는 엉터리 물건을 찾아 헤맸다. 의사로서 키워 온 과학적 판단력은 모두 사라지고 희망 사항만 남았다.

‘기적을 안겨 줄 새로운 면역 치료법들. 단클론 항체. 새로운 CTLA-4 억제제. 이 상황을 역전시키고 아버지의 삶을 되돌릴 수 있는 시험약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 가지 않을 시험약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아버지를 잃지 않으려는 간절한 열망 때문에 때로는 그간의 경험과 이성이 마구 흔들렸다. 아버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불사할 각오였다.

나는 스티븐 케틀이 실물 크기로 제작한 앨런 튜링의 조각상을 한동안 바라봤다. 근대 컴퓨터 기술과 인공 지능의 아버지이자, 세계 대전의 진로를 바꿨을 수도 있는 남자가 자신의 암호 해독기 앞에 서글픈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동성애 혐오증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악성 종양에 의해 살해당했다. 튜링은 경찰에 ‘중대한 외설’, 즉 동성애를 고백했다가 화학적 거세에 동의한 뒤에야 교도소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이었던 기밀 정보 취급 허가가 취소되고 정보 업무가 말소되었다. 튜링은 2년 뒤 자택에서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했다. 옆에는 반쯤 먹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조각상은 웨일스 슬레이트 광산에서 캐낸 50만 개의 슬레이트로 제작되었는데, 각 슬레이트는 5억 년이나 된 것이었다. 우주 공간이나 수학만큼 방대해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블랙홀이니 지질학적 시간이니, 나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포와 암호, 종양학과 지질학의 수백만이나 수조 같은 엄청난 규모에 맞서자니, 한 인간의 삶이 공기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른거리는 숫자 사이로 눈물이 고이려 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일터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새로워 보였다. 특히 환자 가족에게 불확실성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흔히 두 가지 질문으로 괴로워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전에도 이런 질문에 최대한 답변하려 애를 썼지만, 이제는 그러는 게 당연한 의무처럼 느껴졌다.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잘 모른다고 답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왠지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대체로 질문의 답을 알고 있거나 적어도 예측할 수 있었다. 물론 오판의 가능성이 늘 존재하지만, 적어도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후를 예측할 수 있다. 환자나 가족들은 경험도 없고 정보도 부족하므로 불확실한 상태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주의 사항과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신중하게 알려 준다면, 환자와 그 가족들이 그것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임종 순간에 영혼이 탈출한다는 끈질긴 주장의 증거가 미시간 주 헨리 포드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곳엔 파라핀으로 밀봉된 시험관이 있는데, 그 안에 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의 마지막 숨결, 즉 탈출하는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당시에 헨리 포드는 에디슨의 조명 회사에 입사해 수석 엔지니어로까지 승진했다. 포드 역시 열성적인 발명가라 여가 시간에 자동차 모델을 디자인하곤 했다. 그때 디자인한 모델이 훗날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포드 모델 T’로 탄생했다. 에디슨과 포드는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1931년 에디슨이 불치병에 걸렸을 때 포드는 에디슨의 아들 찰스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면서 아버지 입에 시험관을 대고 있다가 마지막 숨결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찰스는 훗날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때의 일을 전했다. ‘아버지는 주로 전기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고 기억되지만, 사실 화학을 더 좋아했다. 임종 시에 아버지 옆에 시험관들이 가깝게 놓여 있었던 것은 그 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직후, 나는 주치의인 허버트 S. 하우 박사에게 시험관들을 파라핀으로 밀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나중에 나는 그중 하나를 포드 씨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 시험관이 수년 동안 사라졌다가 1978년에 ‘에디슨의 마지막 숨결?’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다시 나타났다. 그 뒤로, 이 시험관은 박물관에 계속 전시되고 있다. 딱히 유리 속에 갇힌 영혼이 아니더라도 우정의 영속적 힘을 상징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문득 필립 라킨의 ‘아룬델 무덤An Arundel Tomb’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 시의 유명한 마지막 행은 1956년부터 줄곧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중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다.’

필립 라킨의 시 ‘오바드Aubade(새벽의 노래)’는 죽음 공포증, 즉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오는 불안을 대단히 잘 묘사했다. 오바드는 원래 새벽을 흥겹게 알리는 노래나 시를 말한다. 흔히 동이 트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연인과 관련된다. 하지만 1977년 완성된 라킨의 오바드는 음울하고 풍자적이다. 시인은 밤에 얼큰하게 취했다가 ‘고요한 어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두려움에 마비된 채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때쯤이면 나는 거기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본다:

쉼 없이 다가와 하루가 훌쩍 더 가까워진 죽음



라킨은 이러한 전망이 너무 끔찍해서 ‘그 섬광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라고 말한다. 어떤 것도 그에겐 위안을 주지 못한다. 애초에 느끼지도 못할 일을 두려워하는 게 터무니없다는 그럴싸한 주장도, 종교의 속임수도 위안이 못 된다. 라킨은 자신의 망각보다 더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 이게 바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맛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며,

사랑할 대상도, 연결할 대상도 없이

마취된 채 다시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



매우 드물긴 하지만, 라킨처럼 임박한 죽음이 너무 두려워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는 환자가 있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살아가는 행위는 그저 가혹한 심리적 시련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 며칠이나 몇 시간을 남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다른 조치로는 그 증상을 완화할 수 없을 때, 마지막 옵션이 ‘지속적으로 깊은 수면 상태continuous deep sedation’에 빠뜨리는 것이다. 의식 불명 상태로까지 진정제를 투여하면 환자는 비로소 고뇌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덜어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조력사나 안락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쨌든 대다수 환자는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 대개 낮은 용량의 진정제로도 두려움을 충분히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주변 세계와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내가 그날 만난 남자는 60년간 해로한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의 심장까지 희생하려 했다는 것이다. 죽음이 숨통을 조여 오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결국 죽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다. 현재성보다 더 위대하고, 자연보다 더 위대하며, 감각적 쾌락보다 더 위대한 것은 바로 인간적 연결의 힘이다.

아버지는 곧 너무 약해져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터였다. 하지만 미소와 유머 감각은 여전했다. 떠나기 일주일쯤 전,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손목시계가 멈췄다.

"허허, 거참 신기하구나."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마저 내 시간이 다 됐다고 알려 주는구나."

그날 늦게 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죽는 게 두려우세요?"

"죽는 게 두렵냐고?"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증상은 두려울 수 있지만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더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 사는 데는 더 미련이 없단다. 이만하면 잘 살았으니까."

죽어 가는 사람을 행운아로 묘사하는 게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아버지는 확실히 복 받은 사람이었다. 내가 돌봤던 수많은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그간에 살아온 삶으로 기억될 터였다. 아버지는 통증을 비롯한 여러 증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세상과 서서히 분리되었다. 그 과정이 놀랄 만큼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서사의 끝자락에 이른 지금, 아버지에게는 평생 헌신했던 일과 반세기 가까이 사랑했던 아내, 어린 손주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어떻게든 연장하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세 자식이 남았다. 3대에 걸친 살아 있는 유산 앞에서 아버지는 깊고도 충만한 성취감을 느꼈다.

"늘 친절해야 한다."

내내 잠에 빠져 있던 아버지가 눈을 뜨더니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침대에 반쯤 누워 있다가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대로 떠나면 안 돼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아서 내 가슴에 올렸다. 그리고 잡은 손을 꾹 누르며 말했다.

"레이첼, 나는 떠나는 게 아니야. 이 안에 늘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 핀과 에비의 마음속에도 늘 함께 있을 거야."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우리와 늘 함께할 거라는 걸 알았다. 내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중요한 사후 세계였다.

그 날 밤, 나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올리버 색스의 수필집을 펼쳐 들었다. 말기암 진단을 받은 직후에 쓰였다가 사후에 출판된 책이었다. 평생 의사이자 작가로 활발히 활동해 온 색스가 80년 넘게 살아온 인생과 사랑을 돌아보며 적은 글에는 고마움이 가득했다.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두렵지 않은 척은 못 하겠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돌아다니고 생각하고 썼다. 나는 세상과 교류했고, 작가들과 독자들을 상대로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색스처럼 고마운 마음을 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버지가 성심성의껏 돌봤던 환자들과의 특별한 교류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정과 일에서 모두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만족했고, 그 사실이 아버지의 현재를 빛나게 해 주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샴푸로 거품을 내서 아버지의 두피에 부드럽게 문질렀다. 거품과 물로 나 역시 반쯤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아버지의 뼈마디에 쏠렸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뼈마디를 살집이라곤 없는 피부가 감싸고 있었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스펀지로 구석구석 문질렀다. 한때 나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던 두 팔, 어린 자식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던 갈빗대, 의기양양한 꼬마 군주처럼 우리를 태워 주던 어깨, 내가 걸음마를 떼면서 손을 뻗쳐 붙잡았던 허벅지. 아버지는 벌거벗은 상태에서도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 얼굴에서 수치심이나 굴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와 나도 아버지와 똑같이 노출됐다고 느꼈다. 슬픔 때문에 옷과 살가죽 너머 골수까지 속속들이 들춰진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비좁은 욕조에서 남편과 아내와 딸이 살을 맞대고 행하는 이 마지막 목욕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승화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씻겨 줬던 것처럼 내가 아버지를 씻겨 줄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요, 보답이요, 마지막 사랑의 행위였다. 이보다 더 친밀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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