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고령 환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만 될 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고백할 때면 마음이 무척 무겁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나날을 회의감에 젖어 무의미하게 허비한다. 하지만 그들이 토로하는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죽어 간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은 모두 헛되거나, 아니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매 순간이 소중하다. 완화 의료 운동의 창시자인 데임 시슬리 손더스가 이런 말을 했다.nn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중요하며,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평온하게 생을 마치도록, 그리고 그때까지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되뇌는 이야기는 파괴적 효력이 있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 완화 의료에서 더 그럴 수 있다. 평생 한 번 겪는 죽음은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직접 경험해 볼 수 없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선 두려움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결국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물리적 사실과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결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종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거나 초라하거나 외롭거나 불쾌할 거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이러한 서술 자체가 그러한 결말을 짓도록 돕기 때문에 우리의 암울한 상상을 과학 기술로 뒤집을 수가 없다. 플로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삶이 끝나 갈 때 최악을 상상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과 달리, 환자들은 대개 죽음을 맞으려고 호스피스에 들어오지 않는다. 호스피스 업무 중 극히 일부분만 입원 환자의 병상 주변에서 이뤄진다. 대다수 업무는 데이 센터day center와 커뮤니티 활동으로 채워진다. 흔히 질병의 초기 단계여서 호스피스에 오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한 환자들은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데이 센터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가한다. 또 호스피스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환자가 머무르는 가정과 요양 시설, 병원의 다른 구역을 방문하여 환자와 그 가족, 비전문 의료 팀에게 갖가지 도움과 전문 기술을 제공한다. 극심한 통증과 구토, 호흡 곤란과 불안감 등 복합 증상으로 호스피스에 입원하더라도 중간에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하는 환자도 꽤 많다.

우리의 데이 센터는 활기가 넘친다. 미술 치료와 음악 치료 외에, 환자들은 시를 쓰고 수채화를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그 과정에서 환자들끼리 친밀한 관계를 맺어 서로 격려하고 지원한다. 함께 식사하면서 즐겁게 웃고 떠든다. 한번은 부활절 일요일에 출근했더니 사무실에 초콜릿 바구니가 가득했다. 전날 데이 센터 환자들이 호스피스 직원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했다고 한다. 말기 진단은 사형 선고가 아니라 앞으로 수년간 펼쳐질 인생 과정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어쩔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뿐만 아니라 사랑과 희망, 나눔과 친절 같은 선한 자질로 채워 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게 전혀 실감나지 않아." 한 환자가 내게 말했다. "난 아직 삶으로 충만하거든."

그날 밤 나는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 상실의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인간의 본성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우리 인간이 나를 늘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흔히 호스피스 업무가 무척 힘들고 우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와 정반대라고 대답한다. 호스피스에는 용기와 연민과 사랑하는 마음 등 인간 본성의 선한 자질이 가장 정제된 형태로 존재한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최고의 모습을 선보이는 사람들을 수시로 목격한다. 내 주변엔 자신의 최고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로 가득하다. <햄릿>의 주인공 햄릿은 냉소에 찬 목소리로 외쳤는지 모르지만, 나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속삭인다.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작품이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이먼은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스테로이드는 호흡을 개선하는 데 놀라운 효과가 있었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사이먼이 지치기 시작했다. 그의 암은 진행 속도가 유난히 빨라서 그를 순식간에 제압해 버렸다.nn "아버지가 티미의 생일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소피가 복도에서 내게 물었다.nn "솔직히 그럴 것 같지 않아요."nn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티미의 여섯 번째 생일은 일주일 후였는데, 사이먼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nn "좋은 생각이 있어요. 올해만 티미의 생일을 좀 앞당기면 어떨까요?"nn 며칠 뒤, 사이먼의 병실 문밖에 ‘티미의 생일 파티’라고 쓴 종이와 풍선이 걸렸다. 그걸 본 티미는 좋아서 비명을 지르며 할아버지 품으로 뛰어들었다. 선물 포장을 마구 뜯는 바람에 종이가 사방으로 날렸다. 가족과 친구들은 병상 주변에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광선검, 곰 인형, 버즈 라이트이어 캐릭터를 본뜬 생일 케이크, 생일 축하 노래, 왁자한 웃음소리의 중심에는 초췌한 남자가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어금니는 앙다물었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났다.nn 다음 날 아침, 사이먼은 의식이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결국 공포심도, 숨을 쉬기 위한 헐떡임도 없이 차가운 모래를 남기고 물러나는 썰물처럼 조용히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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