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나는 응급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의 수치에 집중하며 닥치는 대로 진료했다. 잠깐 만났다가 당일 근무 시간이 끝나면 더는 그들을 볼 일이 없었다. 노련하고 능숙한 의사로 단련되는 게 내 목표였다. 하지만 자신감이 커지면서 매사를 산업적 잣대로 접근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덩달아 커졌다. 의사? 나는 그저 오작동하는 신체 부품을 수선하는 기계공이었다. 결함을 파악해서 후다닥 수선하는 기계공. 우리가 수선한 건 사람이 아니라 장기臟器였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몇 년 뒤에 두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봐요. 열 살이나 열한 살쯤. 아버지의 존재론적 고뇌에 아이들도 빠질 만한 나이가 됐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나는 톰이 슬며시 웃는 모습에 힘을 얻어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애들이 당신에게, ‘아빠, 어차피 죽을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톰이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도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려 줄 것 같네요. 멋진 세상을 누리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일요일에 공원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 그런 걸 알려 주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당신의 답변이에요. 그중에 영원히 지속하기 때문에 소중한 건 하나도 없잖아요. ‘석양이 다 무슨 소용이야? 잠깐 머물다 사라질 건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톰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도시를 떠나 히피처럼 살라는 말이군요, 그렇죠?"

"아마도."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포르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달렸겠죠. 그런데 당신이 아끼는 것들은 결국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아닌가요?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즐거움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 왜 영원히 지속돼야 하죠? 난 오히려 그런 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도 그렇고요."

톰은 다음 날 아침 퇴원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으로부터 한동안 자신을 지켜 줄 장치를 가슴에 달고 살아서 걸어 나갔다. 우리의 대화가 그에게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덕분에 적어도 그는 담당 의사가 자기에게 마음 쓴다는 건 알지 않았을까.

톰과 이야기하던 중에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는데, 그 당장엔 차마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톰도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을 것 같다. 톰이 급성 심장 마비로 진짜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삶은 단박에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으로써 삶의 덧없음을 보여 주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부검을 통해 그의 브루가다 증후군이 밝혀졌을 테고, 그러면 두 아들은 유전자 검사를 받을 것이다. 톰은 인생의 전성기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두 아들의 생명을 구했을 수도 있다. 유전적 질환이 대부분 그렇듯이, 브루가다 증후군도 자식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줄리는 방금 론의 병상에서 상실감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흐느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 의사는 이런 경우에 진정제를 놔 주었다. 하지만 비탄에 잠긴 사람을 둔감하게 하는 벤조디아제핀 주사제는 사실 의사의 불편함을 더는 목적이 더 컸다. 나는 기존의 약물로는 도와줄 게 없는 상황에서 뭔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다 불쑥 내 능력 밖의 제안을 하고 말았다.

"줄리, 론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으세요? 내 말은, 그러니까 남편 옆에 눕고 싶으세요?"

흐느낌이 뚝 그쳤다. 줄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래도 될까요? 그… 그게 가능한 건가요?"

그래도 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론은 쿠션이 보강된 침대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무기력해진 그의 몸을 옆으로 살짝 옮겼다. 시간과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 만에 줄리가 누울 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줄리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어 손을 잡고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속삭이면서 뺨에 와 닿는 가냘픈 그의 숨결을 느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사랑하는 부부의 너무도 소중한 마지막 순간을 위해 우리는 조명을 낮추고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

그날 내가 취한 행동이 옳거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걸 의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통곡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줄리를 간호사가 얼른 부축해 주었다. 우리는 따끈한 차를 건네고, 안아 주고, 기댈 어깨도 제공했다. 어떤 위로도 줄리의 상실감을 덜어 준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뒤, 줄리가 선물 바구니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줄리는 비탄에 잠겨 눈앞이 캄캄할 때 호스피스 의료진이 보여 준 호의와 배려가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 깃든 염려와 연민에도 불구하고, 대학 병원보다 더 삭막한 건축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네온 등이 번득이는 각 구역과 기나긴 복도로 이뤄진 병원 건물에서는 오로지 위생과 효율성만 중요하다. 손이 닿는 곳은 전부 소독제로 닦여 있고, 조명은 눈에 거슬릴 만큼 강하고 기능적이다. 병원은 결국 병약자를 위한 대규모 수용 시설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포드 자동차의 대규모 공장을 여럿 건축한 미국의 유명 건축가 앨버트 칸은 1925년 미시간 대학 병원을 설계할 때 공장 조립 라인의 논리를 적용했다. 효율성과 생산성, 멸균과 청결만을 따졌다. 존엄과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 공항 탑승구처럼 삭막한 환경을 조성했으니, 사람들이 집에서 눈을 감고 싶어 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의학은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 ‘의사doctor’는 라틴어 도세르docere에서 온 말로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반면 ‘환자patient’는 라틴어 파티엔스patiens에서 온 말로 ‘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NHS 병원 안팎에서 환자에게 요구하는 인내와 극기는 실로 엄청나다. 가령 응급실에서는 진료 순서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고, 암 치료를 시작하려면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환자에게 고통을 덜어 주겠다고 해 놓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킨다. 의사가 다가올 때까지 환자는 수술복 차림에 손목 밴드를 차고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미력하나마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도록 타고난 종種으로서, 이러한 현실은 확실히 참아 내기 어렵다.

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때, 나는 마치 반란군에 가입하는 기분을 느꼈다. 호스피스는 업무 내용뿐만 아니라 공간 배치에서도 기존의 의료 패러다임을 무너뜨렸다. 출근 첫날부터 온갖 기대와 가능성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병원에선 왜 아내가 죽어 가는 남편 옆에 누워 따스한 온기를 전할 수 없는 걸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을 때, 우리는 왜 환자가 배우자와 사랑을 나눌 방법을 먼저 찾아보지 않는 걸까? 그들이 어찌할 줄 몰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왜 그냥 지켜보기만 할까? 사랑하는 아빠를 떠나보내기 전에 함께 영화를 보려고 피자를 사 들고 오는 10대에게 왜 문을 활짝 열어 주지 못할까? 반려동물이 사람보다 더 큰 위로를 줄 수도 있는데, 왜 개나 고양이를 건강에 유해하다고만 할까? 통념에서 가장 벗어난 질문을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완화 의료와 관련 없는 일반 병원 환경에선 왜 이 모든 의문을 아예 제기하지도 않는 걸까? 요컨대, 왜 유아 병동에 입원한 어린아이나 죽음의 문턱에 선 중환자일 때만 진정한 환자 중심의 병원 환경을 누리는 것일가? 고통과 불안에 떠는 모든 환자가 이러한 위로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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