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아버지가 런던에서 인턴 시절을 보냈던 60년대를 추억하며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동이 틀 무렵 병원을 빠져 나와 모퉁이에 있는 술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스피탈필즈 마켓에서 밤새 고기를 썬 사내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사흘 밤낮으로 당직을 서느라 쌓인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로 자리 잡은 BBC 프롬스BBC Proms의 저렴한 티켓을 구입해, 로열 앨버트 홀의 맨 끄트머리에 서서 차이콥스키와 말러를 들었다.
아버지에겐 음악이 아름다운 꽃잎일 것 같았다. 그래서 2017년 봄, BBC 프롬스 공연 티켓을 앨버트 홀 안쪽의 가장 좋은 자리로 골라 부모님 몰래 예매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에드워드 엘가의 교향곡 2번을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살아 있을지, 설사 살아 있더라도 런던까지 다녀올 기운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티켓이 희망의 부적인 양, 침대 옆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바렌보임이 객석을 향해 돌아서더니 통념을 깨고 직접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영국과 독일, 스페인 등 다양한 나라를 넘나들며 살았고, 이스라엘 국적자이지만 팔레스타인 시민권도 가지고 있는 바렌보임은 분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정치적 의도 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우려에서 이야기를 꺼낸다며 말을 이었다.
"프랑스 국민이 괴테를 배우려면 번역본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베토벤 교향곡을 듣는 데는 번역본이 필요 없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너무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우리 음악계는 국가를 따지지 않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독일의 어떤 음악가도 당신에게 ‘난 독일 음악가라서 브람스와 슈만, 베토벤만 연주할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 종교적 광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만으로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진정한 악은 여러분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는 인본주의로, 이 인본주의로만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온갖 차이를 넘어서서 사람들을 한데 묶어 주는 수단이었다. 우리가 누구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동료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슬며시 웃었다.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를 두고도 아버지와 나는 의견이 달랐다. 하지만 바렌보임의 명쾌한 연설은 우리의 작은 의견 대립뿐만 아니라 콘서트홀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콘크리트 장벽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의 절절한 목소리는 우리 각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바렌보임은 오케스트라를 향해 돌아서서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곧이어 앙코르 연주가 선물처럼 콘서트홀을 가득 메웠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였다. 부모님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객석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고, 입술에선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증오와 적대로 가득한 시국에 엘가를 이용해 인류애를 호소한 바렌보임의 행동은 대단히 훌륭했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건 그도 모르는 새 무대 앞에 앉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자의 심장을 뜨겁게 뛰도록 해 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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