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유럽의 학문을 배울 기회가 적었던 일본이 어떻게 명ㆍ청대 중국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유럽인들로부터 이끌어내서 ‘난학’이라는 학문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대항해시대 이래로 세계를 휩쓴 유럽의 군사적 위협을 일본이 명ㆍ청대 중국보다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넘어가는 1600년대 전후, 네덜란드는 마우리츠(Maurits, 1567~1625) 오라녜 공작의 지도 아래 세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군대를 가진 유럽의 군사 강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군사 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 불린 군사적ㆍ행정적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선두에 선 것이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러나 군사 강국 네덜란드도 동중국해에서는 명나라와의 전투에 패했고, 일본에서는 1609년 규슈 서북쪽 히라도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아직 군사 혁명 초기의 유럽은 명ㆍ청대 중국이나 일본과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쳐서 무역 관계를 맺는 데 만족하기로 했겠지만, 그보다는 유럽 세력들에게 좀 더 정복하기 손쉬운 지역이 전 세계에 많았다는 것이 그런 선택의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한때 스페인ㆍ포르투갈과의 경쟁에서 앞선 네덜란드는 영국ㆍ프랑스 등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도널드 킨이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러시아는 18세기에, 영국과 미국이라는 이른바 앵글로색슨 세력은 19세기에 비로소 일본에 접근하지만, 이 두 세력이 관심을 가진 나라는 일본이 아닌 청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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